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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제도 일본 국가가 저지른 성노예화 범죄

이번에 한미일 지배자들은 ‘위안부’ 문제를 제국주의 동맹 구축의 걸림돌 정도로 인식하는 잔인한 자들임을 스스로 드러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피해를 증언하고 나선 지 24년이 지났고, 실제 피해를 당한 지 70여 년이 지났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고령의 나이가 돼, 이미 세상을 떴거나 죽을 날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죽어서도 잊혀질 수 없는 일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제 식민기에 사기·유괴·납치에 의해 ‘군위안소’에 감금된 채 성노예 생활을 강요받았다. 당시 이들은 대부분 스무 살도 안 된 소녀들이었다.

이 범죄를 자행한 주체는 일본 군대와 정부, 즉 일본 국가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전쟁이 확대되고 장기화되면서 현지인들에 대한 일본 군인들의 범죄 행위가 늘어났다. 군대 내의 하극상 문제도 심각해졌다. 일본 군부는 군인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위안”을 제공할 필요성을 느꼈다. 병력을 약화시킬 성병을 예방하는 것도 중요했다. ‘군위안소’는 1932년부터 있긴 했지만, 중일전쟁 발발 직후부터 훨씬 더 많이, 체계적으로 설치됐다.

‘군위안부’가 된 사람들은 여러 아시아 나라 출신이었지만, 그중 조선인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조선인 ‘군위안부’는 ‘군위안소’의 설치가 확대되는 중일전쟁 발발 후부터 해방 전까지 대거 징모(국가에서 불러 모음)됐다. 현재 한국 정부가 추정하는 ‘위안부’ 피해자는 약 8만~20만 명이다.

이 여성들은 가난한 농촌 가정의 자식들이었다. 이들은 ‘여공으로 취직시켜 주겠다’,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집을 나섰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농촌은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적 농업 정책에 가뭄·홍수까지 겹쳐 매우 피폐해진 상태였다. 농촌에서 식모살이나 애보개(아이를 돌보는 사람)를 하며 푼돈만 받던 가난한 어린 여성들에게 ‘여공’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기회처럼 보였을 것이다. ‘군위안부’ 징모업자들은 여성들의 이런 사정을 이용했다. 그러나 이 여성들은 취직을 시켜 준다기에 돈을 벌러 간 것이지 성노예가 되고자 간 것이 아니었다.

일본 군인이나 경찰이 총부리를 겨누고 강제로 끌고 가거나, 징모업자들이 인신매매로 끌고 간 사례도 있었다.

지옥

‘군위안소’에서 ‘군위안부’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당했다. 증언자들은 그곳이 바로 지옥이었다고 말한다.

증언자들의 말에 따르면, ‘위안부’들은 하루에 적게는 10~20명을 상대했다. 주말에는 군인들이 줄을 지어 들어왔기 때문에 몇 명을 상대했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쉬는 날은 거의 없었다. ‘위안부’가 기진맥진해서 기절하면, 일본 군인은 아편을 주사했다. 주말에는 군인이 들어오기 전에 미리 아편 주사를 놓았다. 어떤 때는 다른 부대가 있는 곳으로 이동해 임시 막사에서 그 부대의 거의 모든 병사를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기절한 상태로 리어카에 실려 ‘위안소’로 돌아왔다.

관리인들은 군인을 상대하기 싫다고 반항하는 ‘위안부’들의 손가락을 자르거나 전기고문을 하거나 담뱃불로 지지기도 했다. 군인들의 폭행도 빈번했다. ‘위안소’ 이용 규정에는 ‘위안부와 주인을 폭행하지 말라’는 조항이 대부분 있었다. 그만큼 군인들의 폭행이 빈번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 군인들은 ‘위안소’를 “공동변소”라고 불렀는데, 이는 여성들이 얼마나 천대받는 위치에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많은 여성들이 성병·결핵 등 질병에 걸리거나 아편중독·임신·출산·낙태 등을 겪은 뒤 죽었다. 일본군은 낙태 시술을 하면서 아예 ‘위안부’의 자궁까지 제거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자살 미수에 그치는 것은 불행이었다. 도망치다 잡히면 총살당하거나 고문받을 것을 알면서도 ‘위안부’ 여성들은 탈출을 시도했다.

연합군의 포로로 붙잡힌 ‘위안부’들 사진 속 임신한 여성은 북한 피해자 故 박영심 할머니(1921~2006).

“역사학자들은 일본군 위안부 여성 중 살아남은 비율이 25퍼센트 정도일 것으로 추산한다. 전장에 투입된 병사, 대서양 노예무역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끌려갔던 흑인노예들의 사망률보다도 높다.”(K J Noh, 〈프레시안〉)

이런 생활을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했다는 일본 우익들의 망언(일본 총리 아베도 공유하는 인식)은 피해 여성들을 두 번 세 번 죽이는 일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일본군은 ‘위안부’ 여성들을 여러 방법으로 학살했다. 여성들을 참호에 밀어 넣고 폭탄을 던지거나, 매장하거나, 중병에 걸린 여성에게 독약 주사를 놓았다는 증언들이 있다. ‘위안부’에 관한 문서들은 불태워졌다. 조직적 범죄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서였다. 1944년 10월 한 중국 기자는 그 참혹한 현장을 묘사하는 기사를 썼다.

“적이 완전 숙청된 지 한 시간도 안 돼 나는 곧 시내로 들어가 전장을 탐색했다 … 적의 시체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며 … 담 모퉁이에 조선인 군위안부 15명의 시체가 한곳에 쌓여 있었는데 가슴과 유방이 도려내어져 있었고 홍색 녹색 옷들이 서로 얼룩거렸다. 그중에는 아직 기저귀를 찬 아기까지 끼어 있었다.”

일본이 패망한 뒤 열린 도쿄재판에서 미국은 위안부 문제를 알고 있었음에도 일본을 처벌하지 않았다. 일본을 대소련 견제를 위한 동맹으로 키우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마치 위안부 희생자들을 위하는 척하지만 일본의 많은 전쟁 범죄를 덮은 당사자이기도 하다.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군위안부’였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하며 살았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용기 있는 증언을 할 때까지 약 반세기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성폭력 피해자를 오히려 비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들은 스스로 결혼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결혼을 하더라도 출산을 못하거나 성적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군위안부’ 생활은 이 여성들의 삶 전체를 파괴했다.

명백한 일본국가의 범죄

‘군위안소’의 창설·징모·운용·관리의 주체는 일본군이었다. ‘위안소’ 설치를 허가하고 통제·감독하는 실질적인 권한은 일본 정부와 군에 있었다.

“위안소 설치는 파견군의 명령(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명령이 내려오면 전쟁터와 점령지 부는 현지에서 여성을 모집하든가 아니면 업자를 선정해서 일본·조선·대만에서 여성들을 모집하도록 했다. 파견군이 내무성·조선총독부·대만총독부에 의뢰해 현지 경찰이 업자를 선정해서 모집하는 경우도 있었다. 업자 및 여성의 도항과 전지·점령지에서의 이동에는 군이 편의를 제공했다. 군위안소로 사용할 건물은 군이 접수해서 업자에게 이용하도록 했으며, 건물의 개조도 군이 했다. 군위안소 이용규칙·이용요금 등도 군이 결정했다. 군’위안부’의 성병 검사는 군의가 했으며, 각 부대는 군위안소를 감독·통제했다.”(《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요시미 요시아키, 2013)

‘일본군은 “관여”만 했을 뿐 군위안소의 주된 운영 주체는 민간업자들이었고 이들에 의한 단순한 상행위였다’는 일본 우익들의 주장은 당시 일본의 전시 체제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이다. 전시 통제 상황에서 업자가 제멋대로 전쟁터로 찾아가 ‘위안소’를 만드는 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일본군이 강제로 징집한 적이 없으므로 일본 정부의 직접적 책임은 없다는 주장도 책임 회피 논리일 뿐이다. 일본군이 직접 나서 여성을 끌고 가지 않은 경우라 할지라도 말단의 징모업자들을 지휘하고 통제한 것은 일본군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제도》(2015)의 저자 윤명숙은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군이 전면에 나서면 조선인들의 반발을 살 게 분명한 정황에서 징모업자들을 활용해 여성들을 끌고 간 것이라고 설명한다. 당시 조선인들은 출국하려면 반드시 거주지 관할 경찰서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는 점만 봐도, 조선총독부의 허가 없이 그 많은 여성을 동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군위안부’ 문제는 한 국가가 계획적·조직적·체계적으로 수많은 여성을 성노예로 만든 것으로서 명백한 국가 범죄다. 당시 일본 군인들의 처지에서 붙인 “위안”부라는 명칭은 이런 본질을 가린다. 여성의 입장에서 이것은 성폭행이었다. 국가가 자행한 이 범죄에 일본 정부가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법적 책임을 지라는 것은 정말이지 최소한의 요구다.

한국 지배자들도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없다

1990년 들어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이래, 일본 정부는 국가의 분명한 법적 책임을 부인해 왔다. 그리고 설사 국제법상 책임이 있다 해도 그에 따른 보상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마무리됐고, 특히 1965년 한일협정으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해 왔다.

일본의 이런 태도는 전쟁 범죄의 책임자들(과 그 후예들)이 현재 일본 지배계급의 핵심에 포진해 있고, 이자들이 일본의 재무장을 주도하는 것과 관계 있다. 일본은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군사대국화의 길로 들어섰다. 군사대국화로 나아가는 데 과거의 제국주의적 전쟁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범죄를 인정하고 진정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 지배자들은 ‘위안부’ 문제를 한일 외교의 골칫거리로 여겨 왔다. 박근혜가 지난해 12월 28일 ‘위안부’ 협상이 타결된 직후 일본 외상 기시다 후미오를 청와대로 불러 접견하고 있다. ⓒ사진 출처 청와대

그러나 더 분개스러운 점은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의 이런 인식을 인정해 왔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을 부정하지 않는 한, 정부 차원에서 일본을 상대로 피해자에 대한 개인 배상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노무현 정부는 ‘위안부’ 문제는 한일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발표하고서도,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아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큰 실망감을 줬다.

그런데 한일협정은 과거를 묻지 않음으로써 일본의 전쟁 범죄에 면죄부를 준 협정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과거를 묻지 않는 대신, 무상 자금 3억 달러와 차관 2억 달러를 제공받기로 했다. 이후 이 돈은 박정희 정권이 국가 주도 수출 중심 공업화를 추진하며 장기 집권 기반을 닦는 데 긴요하게 쓰였다. 당시 이 협정은 강력한 대중적 반발에 부딪혔다.

한국 지배자들은 대중의 눈치를 보면서도 일본의 뜻을 거스르는 요구(즉, 피해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인 일본 국가의 사죄와 법적 책임, 개인 배상 요구)는 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국가의 운영자로서 한국 지배자들은 ‘위안부’ 문제를 한일 외교의 골칫거리로 인식해 왔다. 근본에서 이것은 한국·일본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관철시키려는 미국의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다. 1965년 박정희의 한일협정과 50년 후 그의 딸이 추진한 ‘위안부 협상’ 모두 이런 맥락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제국주의의 피해자들은 두 번 세 번 제국주의에 짓밟혔다. 다른 말로, 이는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위안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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