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의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민주노총 배제 결정:
보건의료노조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위원 추천을 철회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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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1일 박근혜 정부는 건강보험 가입자 중 노동자들을 대표해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이하 건정심)에 참가하던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대신 산하 산별 연맹인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 등이 참가하라고 통보했다.
건정심은 김대중 정부 시절 과도한 수가 인상으로 벌어진 건강보험 적자 사태를 해결하겠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기구다. 당시 정부는 ‘사회적 합의’를 명분으로 정부와 사용자들뿐 아니라 노동자들과 농민 등을 대표하는 단체를 이 기구에 끌어들였다.
하지만 건정심에서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25명 가운데 고작 두 명뿐이고 기업주들과 병원 측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과잉대표돼 있다. 사실상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는 꼴이다.
실제 민주노총 등이 요구한 노동자들의 건강보험 적용 확대는 묵살되기 일쑤였던 반면, 보험료는 꾸준히 인상돼 왔다. 심지어 지난해 건강보험 재정 흑자가 17조 원이나 됐는데도 올해 보험료를 인상했다. 기업주들이 노동자들의 보험료 절반을 부담하도록 돼 있기 때문에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보험료 인상폭은 줄어왔지만 정부는 이를 이유로 건강보험 보장성도 떨어뜨려 왔다.
노동자들에게 보험료 부담을 떠넘기지 않고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이려면 무엇보다 정부의 책임을 강화하고 기업주들의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대폭 인상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건정심은 이런 실질적인 조처를 결정할 권한도 없을 뿐더러 정부와 기업주들에게 유리한 구조라 커다란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정부는 느닷없이 지난 10여 년 동안 건정심에 참여해 온 민주노총을 배제하고 임의로 산하 산별 노조인 보건의료노조에 참여 제안을 했다. 이는 “전체 노동자를 대표하는 총연맹의 대표성을 무시했고 노동조합의 자주적 결정 원칙도 훼손”한 것으로 “부당한 지배개입”이자 “민주노총의 사회적 위상을 흔들고 탄압하려는 의도의 연장선에 있다.”(민주노총 성명, 2.5)
박근혜 정부가 이런 건정심에 민주노총 대신 보건의료노조 등을 끌어들이려 하는 것은 정부가 추진하는 건강보험 관련 정책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의료 민영화
박근혜 정부는 2013년 이후 줄기차게 의료 민영화 정책을 추진해 왔다. 이는 경제 위기 하에서 자본가들에게 새로운 투자처를 만들어 주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광범한 의료 민영화 반대 여론과 반대 운동 때문에 이런 시도는 일정한 한계 내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2014년 보건의료노조와 의료연대본부 등 노동조합이 의료 민영화에 반대하는 파업에 나서자 운동 전체가 크게 고무됐고 ‘의료 민영화가 아니다’ 하는 정부의 반론은 설 자리를 잃었다.
또, 원격진료에 반대하는 의사들과 특히 대형병원 전공의들의 반발은 박근혜의 의료 민영화 추진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박근혜는 원격진료를 확대해가고 있지만 ‘시범사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추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편, 영리 자회사를 허용하고 부대사업 범위를 대폭 늘리는 등의 조처가 이뤄졌음에도 실제 투자에 나선 병원과 기업들은 아직 많지 않다. 이들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경제 상황 때문에 이 정도의 조처만으로는 여전히 불안 요인이 많다고 여기는 듯하다. 병원의 영리행위를 금지하는 의료법이 여전히 그대로라는 법적인 문제도 걸려있다. 박근혜가 포괄적 민영화 촉진법인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통과를 이토록 강조하는 까닭이다.
다른 한편, 박근혜는 병원에 안정적인 수입원을 보장함으로써 의료 민영화에 대한 병원들의 관망적 태도를 교정하고 신규 투자를 활성화하려 하는 듯하다. 건강보험 수가 인상은 이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의사들의 불만을 달래 저항을 완화하려는 계산도 할 법하다.
그러나 수가 인상은 건강보험 재정에 영향을 끼친다. 역대 정부들은 수가를 인상할 때마다 보험료를 올리는 방식으로 노동자들에게 그 부담을 떠넘겨 왔다. 지금은 흑자가 17조 원이나 쌓여 있지만 재정이 부족해지면 또 보험료 인상을 강요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정부는 건강보험료 수입의 20퍼센트를 지원하기로 한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왔고 그마저 몇년 안에 중단할 가능성을 따져 보고 있다.
이 때문에 건정심에 참여해 온 민주노총은 대체로 이런 ‘수가 – 보험료 인상’에 반대해 왔다. 대신 정부가 지원을 늘리고 공공병원을 확대해 시장을 통제해야 한다고 요구해 왔다.
그런데 정부는 이런 요구에 부응하기는커녕(심지어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의료 민영화 등 역주행을 해 왔다. 그러자 보건의료 운동 내에서도 제도를 뜯어고치기는 어려우니 현 제도 하에서 ‘보험료를 올려서라도 보장성을 늘리자’(건강보험 하나로)는 주장이 제기됐다. 일부 시민단체뿐 아니라 보건의료노조도 이 정책을 지지했다. 보건의료노조의 ‘적정부담-적정보장-적정수가’ 구호가 이와 일맥상통한다. 물론 보장성을 높이는 것은 당장에 필요하고 무척 중요한 일이다. 또, 개별 병원들에서는 이런 방식이 노동자와 사용자 양측에 일정한 활로를 열어 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정부 자신이 의료 민영화를 추진하는 상황에서는 보험료 인상이 단순히 병의원의 수익성 개선에만 도움을 줄 뿐 보장성 확대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또 병원의 수익성 증대가 인력 충원 등 노동자들의 조건 개선으로 이어질지는 정해져있지 않다. 정부가 일부 책임지고 있는 건강보험 재정 부담을 노동자들의 보험료로 대신하려 할 가능성도 크다. 따라서 민주노총이 이런 요구를 채택하지 않은 것은 올바른 결정이었다.
수가 인상과 건강보험
박근혜 정부는 보건의료노조의 ‘적정부담-적정보장-적정수가’ 요구가 사실상 수가 인상을 뜻한다는 점을 겨냥해, 민주노총과 달리 건정심에서 수가 인상에 쉽게 합의해 줄 것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보건의료노조를 건정심에 참여하도록 한 뒤 “적정 급여”라는 요구를 들어줄 것처럼 하며 ‘수가 – 보험료 인상’에 동의를 끌어낼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또, 건정심 참가 자격을 두고 민주노총과 보건의료노조 사이를 이간질하는 효과도 노리는 듯하다.
따라서 보건의료노조는 민주노총과 한목소리로 정부의 부당한 민주노총 배제에 항의해야 한다. 이를 위해 민주노총과 함께 “가능한 법적·실천적 수단을 동원하여 강력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동안 의료 민영화 반대 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워 온 보건의료노조가 투쟁의 대의를 일관되게 지키고 더 많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는 길이기도 하다.
* 이 기사는 2월 25일에 게재됐지만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구성원 수가 26명으로 잘못 기재돼 3월 3일 수정됐음을("25명"으로)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