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하철 통합 노사정 잠정 합의안 비판:
비용 절감을 위해 인력 감축을 수용하라는 통합 합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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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 서울시, 서울메트로(1~4호선)·서울도시철도공사(5~8호선), 서울지하철노조·5678서울도시철도노조의 대표자들이 서울지하철 양 공사 통합(2017년 1월 1일 출범을 목표) 관련 노사정 잠정 합의안(이하 합의안)을 도출했다.
서울시는 “관주도의 일방적 통합이 아닌” “노조가 주체로 참여한 [국내] 최초의 통합” 추진 사례라며, 이번 합의안의 의의를 평가했다.
그러나 합의안의 내용을 보면 박원순 시장과 서울시가 추구한 인력 ‘효율화’와 비용 절감이라는 핵심 목표가 관철됐음을 알 수 있다. 서울시는 2014년 12월 통합안을 발표하면서, 지하철 양 공사의 운영 인력이 9호선에 비해 많다며, “중복업무 정리, 인력 재편을 통해 조직을 슬림화”하는 것이 통합의 목표라고 밝혔었다.
첫째, 합의안은 향후 5년간 1천29명을 감축해 정원을 줄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실 감축 인원 규모를 둘러싸고는 논란이 있다. 양 노조 중앙집행부는 실제 정원 축소는 본사 관리 중복 인원 2백91명에 불과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임금피크제가 시행돼 채용되는 인원 7백38명(정원에 포함되지 않는 별도 정원)이 향후 별도 정원 제도 종료 시 “정원으로 편입”한다는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많은 활동가들은 우려를 제기한다. 우선 노조 집행부 주장대로 별도 정원 제도가 끝나려면 임금피크제가 중단돼야 하는데, 이에 대한 내용은 합의문 어디에도 없다. 설사 별도 정원 제도가 종료된다 해도 정원은 늘리지 않고 기존 정원 내에 편입하는 것일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즉, 별도 정원이 편입되면 신규 충원을 하지 않아, 실제 인원이 1천29명 감축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합의안에는 줄어든 정원 규모만 명시했기 때문이다. 총액인건비 예산 결정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기재부와 행자부가 정원 증가 방식은 허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므로 이런 우려는 타당해 보인다.
무엇보다 지금 지하철 현장은 인력 부족과 높은 노동강도로 아우성이다. 단적으로 도시철도 기관사들은 1인 승무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와 공황장애 등을 겪고 있고, 이 때문에 자살하는 노동자가 속출했다. 차량 정비·기술·역무 노동자들은 제2의 발암 물질인 야간 근무를 줄이고자 인력 충원과 제대로 된 4조2교대 도입을 요구해 왔다.
그래서 서울지하철노조와 도시철도노조는 약 5천 명 충원을 요구했었다. 게다가 이 추가 인원은 서울시가 내놓은 여러 권고에 바탕해 산정한 규모다.
한편, 인원 감축으로 “절감된 인건비의 55퍼센트 이상을 처우 개선에 투입”하기로 합의했다(1인당 평균 2백11만 원 인상). 즉 인력 감축으로 인해 발생할 노동강도 강화를 일정한 임금 인상으로 보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인력 충원 없는 4조2교대 시범 시행으로 야간 노동은 단축됐지만 일부 직종의 노동강도는 유지가 버거울 정도로 높은 상황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인력 충원을 통한 4조2교대를 시행해 노동강도가 완화되기 바란다. 임금과 노동강도 모두 노동자들에게 중요한 노동조건이다. 게다가 이는 안전한 지하철 운행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둘째, 승강장 스크린도어 관리와 차량 정비와 같은 안전 업무의 직영화는 4년 뒤에나 추진하기로 해 지하철 안전과 비정규 노동자 처우 개선은 뒷전으로 밀렸다
애초 서울시는 2012년에 비정규직 대책을 내놓으면서 2015년 4월에 외주화된 서울메트로 경정비 업무를 직영으로 전환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서울시는 이 약속을 지하철 통합공사 출범일인 2017년 1월 1일로 미루더니, 또다시 자회사로 편입 후 4년을 기다리라는 것이다.
또, 서울메트로의 스크린도어 관리 업무 외주화도 심각한 문제다. 지난해 2호선 강남역 스크린도어를 혼자 수리하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들어오는 열차에 끼어 사망한 사건은 외주화가 낳은 참사였다.
셋째,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시간, 노동강도 등 핵심 노동조건에 관련된 문제들(임금체계, 조직 설계, 직급 체계, 근무 형태 등)은 대부분 추후 “협의”와 “합의”로 미뤄졌다. 게다가 그 내용도 모호해 노사정 모두 자기 식대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처럼 이번 합의안은 지하철 안전과 공공부문의 질 좋은 일자리 확충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핵심 내용들보다 비용 절감이 우선됐다는 점에서 매우 유감스럽다.
그동안 서울시가 대중교통 요금을 지속적으로 인상해 온 것도 적자를 줄여야 한다는 이유였다. 지하철 양 공사 적자의 주요 부분은 무임수송비용과 원가보다 낮은 요금 등 ‘착한 적자’ 때문이었는데도 말이다.
또,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면 공공서비스 향상도 기대할 수 없다.
서울시가 더 나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려면 적자 감축이나 비용 절감을 최우선 사항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대중 교통 등 공공서비스 개선과 확대에 필요한 예산은 노동자와 서민에게 떠넘길 게 아니라 마땅히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박원순 시장에 바라는 것은 중앙 정부가 하듯이 공공서비스를 긴축적으로 운영하는 게 아니라 박근혜 정부에 맞서 공공서비스를 지키라는 것이다.
“3불(不) 기본 원칙”을 지켜야
이처럼 합의안 내용들은, 그동안 서울지하철노조와 도시철도노조가 통합의 기본 원칙으로 천명해 왔던 “3불(不) 기본 원칙”(인력감축·노동조건 후퇴·구조조정 불가)에 위배된다.
그런데도 양 노조 집행부가 합의안을 수용한 것은 매우 유감이다.
노조 집행부가 이 합의안을 수용한 것에 대해 불만이 큰 것은 당연하다. 서울지하철 승무지부와 기술지부는 합의안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3월 23일 열린 서울지하철노조 임시 대의원대회에서도 많은 대의원들이 ‘원칙을 깨버린 양 노조 집행부의 합의 때문에 현장엔 혼란과 분열이 커지고 있다’며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지하철노조 차량지부장을 비롯한 적잖은 좌파 활동가들은 “시와 사측의 정원 삭감 구조조정에 맞서 싸워 온 것이 자랑스러운 [민주파]서울지하철노조의 역사였다”며 이번 합의안의 부결을 호소하고 있다.
현재 시청역에서 안전 업무 직영화를 요구하며 농성 중인 공공운수노조 서울지하철비정규직지부는 4년 뒤 직영화 약속에 반대하며 농성을 이어 나가겠다고 밝히고 있다. “비정규직에게 4년 뒤 직영 전환은 약속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4년간 시민 안전 문제는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그런데 이런 반발에도 양 지하철 노조 중앙집행부는 합의안을 가결시켜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서울지하철노조 중앙집행부는 이번 합의안이 부결돼 박원순 시장 하에서 통합되지 못하면, 나중엔 더 심각한 구조조정 속에서 통합이 강요될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막장의 노동 개악, 최악의 불통 정부에 통합의 칼자루를 쥐어 주는 것보다, 노동조합을 협상의 주체로 인정하는 서울시를 상대로 통합의 파고를 넘는 것이 현명할 길이라고 생각”한다.(서울지하철노조 김현상 위원장 담화문)
그러나 통합의 칼자루를 누가 쥐고 있든 관건은 양 노조 노동자들이 단결해 노동조건의 상향평준화를 쟁취할 투쟁력이다. 향후 정부의 노동개악과 공공부문 구조조정 공격을 막아 내는 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노조 집행부가 조합원들에게 노동조건이 악화될 가능성이 크고,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싸워 온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외면하며 합의안을 수용하라고 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투지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울지하철노조 김현상 위원장은 이번 합의안이 “차선책”이었다고 옹호한다. 그러나 그간 서울지하철노조 중앙집행부가 퇴직금 누진제 폐지와 임금피크제 수용 등에 대해 설명한 논리도 비슷했다. ‘어차피 정부의 지침이므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 거부하면 더 큰 불이익이 따를 뿐이다. 그나마 박원순의 서울시와 협상을 하게 돼 이 정도로 선방한 것이다.’
부결
박원순 시장은 박근혜 정부처럼 일방적으로 자신의 정책을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박원순 시장이 ‘거버넌스’를 강조하는 데서 보듯 타협과 협상의 과정을 나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 타협과 협상의 결과는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2013년 12월에 퇴직금 누진제 폐지, 2015년 임금피크제 도입 등에서 보듯 말이다.
박원순 시장은 박근혜 정부와는 다른 방식을 추구하지만, 기성 체제 지배자들이 크게 반발하지 않을 정도로 제한된 수준에서만 그렇게 한다.
정부의 ‘노동 개혁’에 정면으로 거스르지 않고, 노동자들의 피해를 일부 줄이는 정도로 타협을 끌어내는 식이다.
그런데 경제 위기 심화 속에 지배자들이 일치 단결해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 타협의 내용이 보잘것없기 십상이다.
따라서 박원순 시장에 기대서는 노동자들의 조건을 제대로 지킬 수가 없다.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보여 주듯, 진보교육감들의 개혁 배신과 공격에 맞서 항의와 투쟁을 조직해야만 지금의 조건을 지키고 더 나아가 일부 양보를 얻어 낼 수도 있다.
또한, 박원순 시장 하에서 지하철 통합이 안 된다고 해서 더 해로운 통합이 정해진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만약 이번 합의안이 부결된다면, 노동자들이 인력 감축 방식의 구조조정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정부와 사측에 보여 주는 것이다. 지하철노조 활동가들이 노동자들의 이런 열망을 받아 안아 기층에서 투쟁을 조직해 나간다면, 다음 공격에 맞설 힘을 키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합의안 수용을 묻는 찬반 투표를 앞두고 지금까지 서울지하철노조 4개 지부 중 승무지부와 기술지부는 지부 차원의 반대 성명을 발표했고, 차량지부는 지부장 개인 명의로 부결 호소문을 발표했다. 창동차량지회와 동대문승무지회도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서울지하철노조 대의원 44명이 합의안 비판 입장을 제출했다. 여러 활동가 모임도 반대 성명에 동참하고 있다.
양 공사 노조 좌파 활동가들이 이런 불만을 잘 조직해 잠정 합의안이 부결될 수 있기를 바란다.
노동이사제와 경영협의회가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을까?
이번 합의안 내용에는 노동이사제와 경영협의회 도입도 포함돼 있다. 이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적지 않은 듯하다.
박근혜 정부가 노조의 단협 일부 조항들이 “과도한 경영권 침해”라며 공격하는 상황에서 노조의 경영참가를 제도화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기대를 살 법하다.
정반대로 기업주들의 입장에선 썩 반가운 소식은 아니다. 그래서 〈동아일보〉는 “노동계 일각에서는 노동이사제를 저성과자 해고 등을 막는 수단으로 홍보한다. 이래서야 서울지하철의 방만 경영을 수술하고 적자폭을 줄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며 박원순 시장에게 노동이사제 도입의 취지를 해명하라고 압박했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고용과 노동조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경영상 결정들에 개입하는 것은 필요하고 정당하다.
그럼에도 노동이사제와 경영협의회가 노동조건 개선과 방어를 위한 유용한 수단이 될 것이라고 만 볼 순 없다.
우선 지하철 통합공사에서 전체 이사회 구성과 노동이사의 몫, 경영협의회의 위상과 수준 등이 어느 정도일지는 아직 미정이다. 박원순 시장이 노동조합의 영향력을 얼마만큼 인정할지 불확실하다.
가장 수준 높은 경영 참여를 보장한다는 독일에서조차 노동자들은 기업 경영에 실질적인 결정권을 전혀 갖지 못한 게 현실이다.
독일의 경우, 노동자가 2천 명 이상인 기업에선 ‘공동결정제’를 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독일의 모든 대기업에는 노사가 참여하는 감독이사회와 기업의 실질적 경영을 이끄는 임원들로 구성된 경영이사회가 구성돼 있다.
대기업의 감독이사회는 경영이사회의 결정을 승인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고, 노사 양측이 각각 절반씩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경영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감독이사회 의장은 사측 인물이 차지하도록 돼 있고, 노사 간에 동수로 맞설 때는 의장이 2표를 행사한다. 결국 감독이사회도 사측의 주요 결정을 거부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독일에서도, 경영 참여는 정부와 사측의 공세를 막지 못했다. 2000년대에 ‘하르츠 개혁’으로 노동조건이 대폭 악화됐지만, 공동결정제는 무력했다. 이 때문에 오늘날 독일 일자리의 거의 4분의 1이 저임금·시간제 일자리인 ‘미니잡(Mini job)’이다.
또한, 노동이사제와 경영협의회는 회사의 경영 상황에 노조가 공동책임을 져야 한다는 압박이 돼, 노조에게 족쇄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경영 참가는 노조가 고통분담안을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압력으로 작용해, 되레 노동자 간 분열을 낳고, 노조 지도부가 정부·기업주와의 협상에 매달리게 해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약화시켜 왔다는 점도 곱씹어 봐야 한다.[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노조 경영 참여는 노동자들을 분열시킨다”(〈노동자 연대〉140호) 기사를 참조하시오.]
따라서 노동이사제와 경영협의회 등 경영참여의 제도화가 아니라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력과 활동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