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과 인공지능 논쟁:
사회주의 유토피아인가, 자본주의 디스토피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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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알파고가 바둑에서 인간을 이긴 뒤 국내외에서 인공지능과 로봇에 대한 오해와 환상이 부쩍 늘었다. 심지어 인공지능이 결합된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모두 차지할 것이라거나, 이 때문에 기본소득 같은 새로운 복지 제도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주류 정치인의 입에서도 흘러나올 정도다. 정말 그런 시대가 우리의 코앞에까지 성큼 다가왔을까?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마이클 로버츠가 로봇과 인공지능을 둘러싼 여러 쟁점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제시한다.
다음 세대에는 로봇과 인공지능이 인간 노동을 대체하고 경제를 주도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날까?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들의 일자리와 삶의 질은 어떻게 바뀔까? 로봇과 인공지능의 시대는 우리 시대에 사회주의 유토피아, 다시 말해 인간이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고 넘쳐나는 풍요 속에서 발전해 나가는 조화로운 사회일까? 아니면 경제 위기는 갈수록 극심해지고 계급투쟁이 더욱 격해지는 자본주의 디스토피아일까?
로봇 활용은 빠르게 늘고 있다. 지난 십 년간 선진 자본주의 경제의 산업에서 로봇의 활용도는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일본과 한국은 제조업에서 노동자 1만 명 당 로봇 3백 대가 도입된 나라들로, 로봇 활용도가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그 다음은 독일로 노동자 1만 명 당 로봇 2백50대 정도가 활용되고 있다. 미국은 1만 명 당 로봇 수가 일본이나 한국의 절반이 안 된다. 지난 십 년간 로봇 도입률은 브라질에서 40퍼센트, 중국에서 210퍼센트, 독일에서 11퍼센트, 한국에서 57퍼센트, 미국에서 41퍼센트 정도 증가했다.
인공지능이라는 용어는 기계들이 단지 미리 프로그램 된 내용대로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황과 경험에 맞게 프로그램과 작업을 학습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인공지능은 로봇이 학습을 수행하고 지능을 향상시킬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앤드류 맥아피는 지능이 높은 인공지능 기계들이 보급돼 많은 일자리들이 사라지게 되는 ‘SF(공상과학) 경제’가 곧 실현될 수 있다고 보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MIT 동료인 에릭 브린욜프슨과 《제2의 기계 시대》를 공저한 저명한 교수다. 그에 따르면 SF 경제의 도래는 우리 사회에 크나큰 경제적·사회적 혜택을 줄 것이지만 “노동의 가치가 절하되는” 경제 체제가 등장할 수도 있다고 덧붙인다.
기술적인
옥스퍼드대학교 경제학 교수인 칼 베네딕트 프레이와 마이클 오즈본은 기술 진보가 7백2개의 직업군에 끼치게 될 영향을 예측했다. 그들이 조사한 직업군에는 발 전문의부터 여행 가이드, 동물조련사, 개인금융 상담사, 청소부까지 광범한 일자리가 포함됐는데, 이들이 내놓은 연구 결과는 충격적이다.
“우리의 추계에 따르면, 미국 내 일자리 중 47퍼센트가 사라질 위험에 놓여 있다. 더군다나, 임금이 낮을수록 교육 수준이 낮을수록 컴퓨터로 일자리가 대체될 확률이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다. … 지난 수십 년간은 기술진보가 진행됨에 따라 중위소득군의 일자리가 감소하는 패턴이 보였다. 그러나 이에 반해, 우리의 모델에 따르면 가까운 미래에 컴퓨터에 의해 대체될 일자리는 주로 저숙련 저임금 직업군에 몰려 있다. 이에 반해 고숙련 고임금 일자리들은 컴퓨터 자본재에 대한 투자가 늘어난다고 해도 상당 부분 유지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최근 런던정치경제대학교 경제성과연구소의 게오르크 그레츠와 가이 마이클스는 유럽·호주·한국·미국 등 17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14대 산업을 대상으로 연구를 했는데(주되게는 제조업 관련 산업들이었지만, 농업과 공공부문도 포함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산업로봇은 노동생산성과 총요소생산성 그리고 임금을 증진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또한 산업로봇의 도입으로 총노동시간은 감소하지 않았지만, 고용 감소 효과가 있다는 증거는 관찰됐다. 고용 감소 효과는 주로 저임금 일자리에서, 그리고 일부 반(半)숙련 일자리에서 관찰됐다.
요컨대, 앞선 연구 결과와 달리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고역(노동시간)을 줄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로봇이 도입됨으로써 미숙련 노동자들과 일부 반숙련 노동자들의 일자리는 사라졌다. 요컨대 일감은 늘었지만 노동시간은 줄지 않았고 실업은 증가했다는 것이다. 사실, 미국에서 노동시간은 1970년대 이래 계속 증가해 왔다.
모순
자본주의적 축적의 근본 원리는 이윤을 늘리고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기계를 도입해 개별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경쟁 자본가들보다 비용을 줄이고 싶어 한다. 이런 방식 덕분에 자본주의는 사회의 생산력 발전에서 엄청나게 혁명적인 구실을 했다.
그러나 모순도 있다.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키기 위해 신기술을 도입하면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감원된다. 신기술이 노동을 절약하는 효과를 낳는 것이다. 물론, 생산성 향상으로 총산출이 증가하면 새로운 부문이 생겨나 일자리를 보충한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쳐 “자본 편향적” 또는 노동절약적 기술 진보가 이뤄져 투하된 자본의 비용에 비해 비교적 적은 가치가 창출된다. 노동만이 가치를 만들기 때문이다. 요컨대 생산성이 상승하지만 수익성은 저하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경향이 지속적으로 관철되면 생산은 위기를 겪게 된다. 그리 되면 신기술 도입으로 생긴 경제적 이득은 사라진다. 심지어 손실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현대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하에서는 수익성이 투자와 생산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로봇공학과 인공지능이 극도로 발전한(공상과학 소설 같은) 미래가 실현된다면, 이런 분석은 어떤 함의를 지니게 될까? 로봇이 로봇을 생산할 뿐 아니라, 로봇이 원재료의 추출과 생산을 모두 담당할 뿐 아니라, 사적·공적 업무를 모두 로봇이 처리해 생산과정에서 인간의 노동이 전혀 필요하지 않게 되는 1백 퍼센트 자동화된 상황을 떠올려 보자. 마침내 인간[노동] 없이도 원료를 제품으로 가공하는 과정에서 부가가치가 창출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창출한다는 마르크스의 학설이 논파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 하에서 가치가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생산된 모든 상품에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존재한다. 사용가치란 사람들에게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뜻한다. 교환가치는 노동시간으로 측정된 가치로, 자본가에 의해 인간 노동으로부터 추출되며 시장 교환을 통해 실현된다. 자본주의에서는 둘 중 하나만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투자와 생산과정을 궁극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이다.
가치는 (그 정의상) 자본주의에 고유한 실체이다. 물론 산노동은 사물을 창조할 수 있고 용역을 제공할 수 있다.(사용가치) 그러나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에서 핵심은 가치이다. [더 자세한 설명은 ‘마르크스와 《자본론》②-자본주의 상품 가치의 비밀을 들춰내다’를 보시오 ━ 옮긴이] 자본 소유자들은 생산수단(역시 노동의 산물)을 통제하고 노동이 만드는 가치를 전유하기 위해서만 그 생산수단을 사용하려 한다. 자본은 스스로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없다. 이제 로봇과 인공지능이 일반화돼 완전 자동화가 이뤄진 가상적 상황을 분석해 보자. 이 경우 (사용가치의) 생산성은 무한대로 발산하되 이윤율(잉여가치/투하자본가치)은 0으로 수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닐 것이다. 차라리 고대 로마의 노예제 경제체제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본래 고대 로마에서는 영세농민의 생산에 의존해 경제가 운용됐다. 수백 년에 걸쳐 이는 노예노동에 의존하는 체제로 전환됐다. 광업과 농업을 비롯한 온갖 일들을 노예가 전담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까닭은 로마에 노예가 매우 풍부하게 공급됐기 때문이다. 로마는 공화국 시기에서 제정 시기까지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엄청난 양의 전리품들을 노획했는데 노예도 그 일부였다.
노예노동
노예 소유주들이 노예노동을 활용하는 편이 자유민을 고용하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혔다. (적어도 처음엔 그랬다.) 그래서 노예 소유주들은 소작농들을 자기 땅에서 쫓아냈다. 농민들을 쫓아내 빚을 독촉하고, 전쟁터로 징발하고, 순전히 폭력으로 내쫓는 등 다양한 수단을 활용했다. 이에 따라 과거에 자유민이었던 농민들은 제 발로 노예가 되거나 도시로 이주해야 했다. 도시로 이주하면 밥벌이를 위해 고되고 천한 노동을 감수하거나 구걸을 해야만 했다. 계급투쟁은 끊이질 않았다. 노예 소유 귀족과 노예들 사이에서, 귀족들과 도시의 원자화된 평민들 사이에서 투쟁이 계속됐다.
경제[생산]의 완전한 로봇화가 이뤄진다면 생산수단의 소유자들(로봇 소유주들)이 비용을 전혀 들이지 않고 재화와 서비스를 향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로봇을 만드는 로봇을 다시 로봇이 만드는 식). 그리하여 이들은 희소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지고의 풍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재화와 서비스를 무한대로 공급받으니 로봇 소유주들은 “이윤”이라는 것을 생산할 필요조차 없이 마음껏 소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치 고대 로마의 노예 소유 귀족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들은 그저 노예노동의 생산물들을 소비했을 뿐 이윤을 획득하려 애쓰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상품을 판매하지도, 사업체를 운영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로봇 경제는 모든 이가 희소성 제약에서 해방된 풍요로운 사회일 수도 있지만,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 극도로 큰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 사회일 수도 있다. 둘 중에 어떤 미래가 실현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사회적 “선택”에 달려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주의에서의 계급투쟁의 결과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 노동을 완전히 대체할 날은 언제쯤일까?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지적한 바에 따르면 인간에게 가장 손쉬운 일들이 기계의 입장에서는 가장 어려운 일에 속한다. 예컨대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동전을 꺼내는 일 따위 말이다. 미국의 로봇 회사인 아이로봇이 내놓은 제품인 ‘룸바’는 완전 자동이다. 하지만 그 로봇이 완전 자동화될 수 있는 이유는 바닥 청소라는 극도로 간단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아이로봇이 출시한 팩봇은 그보다 더 비싼 모델이지만 사람이 원격조종을 해야만 작동할 수 있다. 팩봇의 기능은 폭탄 제거다.
미(美) 국방부의 연구 부서인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최근 캘리포니아 포모나에서 우승상금 2백만 달러가 걸린 로봇공학 경진 대회를 열었다. 한 시간 내에 가장 많은 인명 구조 작업을 수행한 로봇을 제작한 사람을 뽑는 대회였다. 로봇들에게는 작업 8개를 하는 데 1시간이 주어졌는데, 인간이라면 다해도 10분도 안 돼 해치울 수 있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로봇들은 대부분 그 작업을 수행하지 못했다.
자율적
당시 참가한 로봇 대부분은 다리가 두 개였지만, 다리가 네 개거나 바퀴가 달렸거나 바퀴와 다리가 모두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완전히 자동으로 움직이는 로봇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조종사가 무선 네트워크를 통해 기계를 조종하며, 인간의 감독 없이는 그러한 기계들은 대개 무용지물이 돼 버린다. 로봇이 직접 계획을 세우고 완전한 자율성을 누리는 데 필요한 “인지” 영역에서는 로봇 기술이 대체로 답보 상태다. 이 때문에 많은 로봇 연구자들이 대안적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클라우드 로봇(공학)’, 혹은 ‘협력적 로봇’은 인간과 결합되는 로봇을 개발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로봇이 자율적으로 작동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말이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완전히 자율적인 인공지능과 로봇이 빠르게 도입되는 데에 자본주의 체제가 걸림돌이라고 지적했다. 신기술을 위한 재원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익성을 높일 만한 데에 투입되기 때문이다. 그는 “한때 사람들은 날아다니는 자동차와 텔레포트 장치 그리고 노동을 대신해 줄 로봇이 가까운 미래에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중에서 실현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1960년대에 산업자본가들은 모두가 기대해 마지 않던 로봇 공장이 아니라 노동집약적 저기술 생산설비들을 세계적으로 재배치하는 데에 엄청난 돈을 투자했다. 그리고 각국 정부들은 무기 개발 같은 방위산업 분야나 정보통신 및 보안 기술을 고도화시키는 등 군사 연구에 재원을 집중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다음과 같이 꼬집었다. “이 세상에 로봇 공장이 안 만들어진 이유는 로봇공학 관련 연구 재원의 95퍼센트 가까이가 펜타곤[미 국방부]에 의해서 조달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펜타곤은 무인 종이 공장을 개발보다는 무인 정찰기 개발에 더 관심이 많다.”
생태계
예일대학교 경제학 교수 윌리엄 노드하우스는 미래에 인공지능과 로봇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추정했다. 그에 따르면,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경제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일은 여전히 요원하다. 소비자들이 아이폰에 열광하더라도 전자제품을 먹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적어도 오늘날의 기술 수준으로는 다양한 생산요소가 투입돼야 생산이 이뤄질 수 있다. 정보재뿐만 아니라 노동, 에너지, 천연자원 등의 형태로 희소자원(“손으로 잡을 수 있는 재료”)이 투하돼야 한다는 것이다. 노드하우스는 지난 10여 년의 추세로 추정하면 로봇 기술이 완전 자동화를 이룰 정도로 발전하는 데에 “한 세기 가량의 도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결론 지었다.
지구의 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대중의 필요를 충족하고 가난을 끝내고 풍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기술 진보가 우리가 바라는 바다. 만약 인공지능과 로봇공학 기술이 우리를 그러한 사회에 좀 더 가깝게 데려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로봇이 인간의 고역을 최소한으로 줄여 주는 조화롭고 풍요로운 사회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자본이다.
지난해 영국 고용기술위원회(UKCES)는 ‘직업의 미래’ 보고서를 발표해 장기 침체와 기술 진보에 따른 생산성 향상이 계속될 경우 일자리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에 관해 몇 가지 예측과 전망을 제시했다. 그런데 그 예측들은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좋은 기술이 없고 연줄도 변변찮고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미래는 처참할 정도로 열악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경제성장과 혁신이 전문직들에게는 고소득을 안겨주지만, 사회 성원 대다수는 고용 기회 감소와 제자리 임금에 시달리게 하는 상황이 현실화될지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사회는 격렬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로봇을 포함한) 생산수단이 소수 자본가들의 손에 있는 한, 로봇 사회의 혜택은 오로지 소수의 지배계급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지더라도 자본가들은 거기에서 혜택을 볼 것이다. 그리하여 신기술의 이익 대부분이 가장 부유한 이들에게 돌아간다면, 디스토피아적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다.
소유권
[글 서두에서 소개한 《제2의 기계 시대》에 관한] 존 랭캐스터의 서평을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세상이 정상적으로 굴러가도록 하려면 소유권 제도를 변혁하는 것 외에 남은 방도가 없다. 내가 이런 미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바로 자본주의 더하기 로봇으로 형성된 디스토피아적 미래 사회는 너무나도 끔찍할 것이기 때문에 도저히 정치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제시하는 대안 사회는 윌리엄 모리스가 꿈꾼 미래와 똑같다. 만인이 가치 있는 노동에 참여하면서 제대로 된 보상을 받는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내가 그린 미래에는 로봇이 존재한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이 책은 오늘의 현실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하지만, 우리가 초(超)자본주의적 디스토피아와 사회주의적 이상향이라는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과 특히 사회주의라는 대안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