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이냐, 해외자본이냐? 악마의 양 손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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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와 해외 자본의 한국 경제 지배력에 대한 대처 방안을 놓고 경제관료와 대기업가, 정치인 들 사이에 긴장이 형성되고 있다. 좌파들 사이에서도 뜨거운 논쟁거리다.
우선, 노무현 정부는 전임 정부의 시장 개방 정책을 어느 정도 변화시키려는 듯하다. 경제부총리 이헌재는 작년 11월 정기 국회에서 “외국 투기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에 대비, 국내 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연기금을 적극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신자유주의 전도사라는 이헌재가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정부 개입 의지를 밝힐 만큼 정부 관료들의 상황 인식은 심각하다. 외화(달러)가 급하다고 곳간에서 돈 되는 건 다 내다 팔다 보니 이제는 곳간 주인 몸뚱아리마저 넘어가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
상장기업에 대한 해외 자본의 지분은 43.9퍼센트로, 1백40조 원에 달한다. 2대 주주가 외국인인 상장기업 수는 1백38개다. 사기업들도 위기감을 갖고 있다. 작년 연초 SK그룹에 대한 소버린의 경영권 위협이 있었고 어느 정도 엄살이기는 하지만 삼성전자는 적대적 인수·합병 위협을 토로했다.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은 61.37퍼센트다.
반면, 공정위의 발표를 보면, 한국 재벌 총수들은 평균 1.95퍼센트, 일가로는 평균 4.61퍼센트의 지분으로 계열사들을 지배하고 있다. 재벌 지분 구조의 취약성이 이제 부메랑이 되어 날아오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공정거래위원장 강철규는 “해외투기자본의 준동을 막을 규제가 필요하다. 이론적으로 토빈세를 검토해 볼 만하다”고까지 언급했다. 재경부 금융정책국장 김석동은 “다른 선진국에서도 국가 기간사업에 대해선 적대적 인수·합병 방어책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SK 경영권 방어에 국민연금이 상당한 구실을 했다.
국가 관료들은 국가 경제에 대한 영향력이나 통제력에 고유의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 권한이 클수록 지배계급 내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확고해진다.
이 때문에 경제 관료들과 열린우리당의 관료 출신 정치인들은 시장, 특히 국내 주요 기업들(기간산업)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을 회복하는 형태로 위기에 대처하길 원하는 듯하다.
이헌재는 작년 내내 국내 사모펀드 허용, 국민은행장 김정태 교체, 뉴딜 정책 논란 등에서 정부의 경제 개입 의지를 확고히 드러냈다.
물론 이런 조치들이 국가자본주의 시대로 회귀나 좌파적 국가 개입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헌재는 성장론자답게 “기업을 일으켜 국민을 부유하게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이는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구분해 해외 금융자본에게서 국내 산업자본을 보호하고 필요한 경우 개입하겠다는 것으로 들린다.
최근 정부의 시장 개입에 대한 논의가 국내 기업(재벌)의 경영권 방어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러나 경제관료들의 정책은 모순적이다. 케인스주의적 요소가 강화되면 국제 금융시장과 국내외 사기업들이 반발할 텐데,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의 영향력 강화를 포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정한 권력자들인 대기업들 스스로 모순된 처지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은 시장주의를 강화하려는 입장이지만 지분 구조가 취약한 상황에서 해외 자본이 경영권(권력)을 위협할 때 정부가 나서서 방어해 주길 바란다.
한나라당이 연기금 의결권을 마지막까지 반대했지만, 애초 연기금을 통한 경영권 방어를 요구한 것은 대기업들이었다. 연기금만이 해외 자본에 대항할 만한 규모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최대 관심사는 기업 경영권을 통한 산업 지배력이며, 이는 해외 자본과 정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한나라당의 반대는 연기금 의결권이 트로이의 목마가 되지 않나 하는 일말의 불안감을 대변한 것이다. 한나라당은 상대적으로 일관된 신자유주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데, 일반으로 신자유주의가 대기업가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나라당 자체가 행정 기구에서 배제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은 또, 노무현 정부를 반시장주의 좌파로 몰아붙이는 것이 우익들을 결속하는 데에도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사실, 주주 자본주의의 관점에서는 지분만큼 의결권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점 때문에 〈조선일보〉조차 조심스런 어조로 재계와 한나라당의 연기금 의결권 반대를 비판했다.
대기업들이 연기금 의결권보다 더 불만을 느낀 것은 정부의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재벌 금융 계열사의 의결권 행사를 제한하는 데다 출자총액제한을 완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또한 총수의 재벌 지배력과 직결되는 문제다. 대표적으로 삼성그룹은 삼성생명을 통해 삼성전자 등 계열사 지분을 다량 보유하고 있다.
결국, 공정위의 재벌 지분구조 공개는 관련 법안들의 국회 통과가 지연되는 상황에서 재벌들에게 보내는 경고 메시지였던 셈이다. 하지만 결국 정부는 공정거래법 시행령 제정시 금융계열사 의결권 축소 완화 등 재계의 요구를 대폭 수용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 개입 기조에 대한 한나라당과 대기업가들의 불만에는 더 근본적인 요인들이 잠재해 있다.
그것은 첫째, 정부와 재계 간의 힘겨루기 과정에서 정부가 사용하는 정책 수단들이 이른바 ‘반기업 정서’를 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빈부격차가 날로 확대되는 가운데 공개된 재벌의 지분구조는 기업권력 비판론자들에게 확실히 좋은 소재가 되고 있다.
둘째, 정부의 해외 자본 견제가 정부의 신자유주의 기조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도전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정부의 언사와 행동은 마치 전임 정부의 경제 개방 정책을 비판해 온 사람들의 주장이 올바랐다고 인정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좌파 내부에서 단순히 재벌을 보호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협소하다. 지배계급 내 갈등은 각 분파들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하고 주도권을 잡으려는 시도에서 발생한다.
일면적인 투기자본 반대는 자칫 정부에 대한 전략적 지지로 전락할 수도 있다. 대안연대의 일부 학자들이나 일부 노조 지도자들처럼 재벌과 동맹하려 하거나, 장하성 교수처럼 해외 투기자본과 동맹하려는 것, 어떤 선택도 효과적 대안이 아니다.
정부의 시장 개입은 재벌들의 경영권 방어가 아니라 복지 확대와 산업과 금융의 공공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정부와 사기업들에게서 독립적인 대중적 힘이 필요하다. 3자 간의 갈등이 드러내는 지배계급 전체의 취약성과 위선을 공격하면서 광범한 반기업 정서와 연결된 대중운동을 건설하는 일이 더 효과적인 대안이다.
우리에게는 초국적 금융자본이나 재벌의 손을 잡지 않고 스스로 물살에서 헤엄쳐 나올 수 있는 힘이 있다. 노동계급이 민주적이고 집단적으로 경제를 운영한다는 사상적 무기를 확고히 부여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