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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새 세대 페미니즘의 강점과 약점을 보여 주는 책

이민경 지음, 봄알람, 2016

지난해부터 시작된 페미니즘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지지가 페미니즘 서적 출판과 판매의 급증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가 정식 출판사와 유명 서점 없이 개인들의 후원만으로 초판 5천 부를 찍고 그것이 5일 만에 동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이 책은 발간 한 달 만에 1만여 부가 판매됐다고 한다.

“성차별 토픽 일상회화 매뉴얼”을 표방하는 이 책이 유명 작가의 책이 아님에도 젊은 여성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은 이유는 그 세대 여성들 사이에서 그만큼 일상의 성차별에 대한 분노가 깊고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20~30대 여성들은 이전 세대 여성들보다 비교적 평등하게 자라났고 평등에 대한 욕구가 크지만 사회에 나가면 여전히 여성에 대한 폄하와 무시, 광범한 성적 비하가 난무한 현실을 맞닥뜨리며 분개하고 있다. 특히, 일부 젊은 여성들은 자신들이 자주 접하는 온라인 환경에서 여성을 싸잡아 비하하는 얘기를 접하며 모욕감을 느끼고 있다. 게다가 ‘요즘도 성차별이 있냐?’, ‘오히려 역차별이 문제’라면서 페미니즘을 부당하게 공격하는 일부 남성들의 주장은 많은 여성들의 부아를 더 치밀게 만든다.

사실, 이 책은 본격 대화에 들어간 후의 매뉴얼보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여성도 자신이 원치 않는 대화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누차 강조하는 앞부분에 훨씬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이것은 여성을 동등한 대화 상대로 존중하지 않거나 ‘토론’의 탈을 쓰고서 성차별적 주장을 하는 상대에게 필자가 얼마나 답답함을 느꼈는지를 짐작케 한다. 이것은 여성의 ‘NO’는 ‘NO’가 실현되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많은 여성들의 경험을 반영한다.

사실, 20대인 이 책의 필자와 여성 동료들이 겪은 경험(카페에서 회의 중 한 아저씨가 다짜고짜 끼어들어 회의를 방해해 여성들이 좋은 말로 대화를 거절하자, 그 남성이 반말과 욕설로 비난하며 훼방 놓은 사례)과 비슷한 일을 나도 겪었다. 이밖에도 이 사회에서 여성이라고 무시당한 경험이 한둘이겠는가. 이 과정에서 여성들이 위축될 수 있다. 나도 여성의 능동성을 고무하는 사회변혁 단체에서 여러 해 동안 활동하고 나서야 비로소 다양한 성차별적 상황에 굴하지 않고 비교적 잘 대처할 수 있게 됐다. 따라서 여성의 'NO'는 'NO'이며, 성차별주의자들에게까지 친절할 필요는 없고 맞서 싸워도 된다는 용기를 북돋는 것이 여성들에게 꼭 필요한 조언이라는 점에 공감한다. 많은 독자들이 공감과 통쾌함을 느끼는 부분도 바로 이 지점일 듯하다.

그런데 “한국 영 페미니스트의 정치적 감성”을 잘 보여 주는 책이라는 김현미 교수의 추천사가 말해주듯이 이 책에는 실전 지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여성혐오 사회’ 담론이나 메갈리아, 미러링 등 최근 페미니즘의 뜨거운 쟁점들을 다루고 있고, 책 전반에 걸쳐 여성 차별의 메커니즘과 그것에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에 대한 필자 나름의 방법론과 문제의식이 녹아 있으므로 이 점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차별과 혐오

필자는 한국의 상당수 페미니스트들이 그렇듯이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의 핵심 주장을 공유하는 듯하다. 즉, 광범한 여성 차별 현상을 모두 “여성 혐오”로 규정하면서, 여성 혐오는 공기처럼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고,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다양한 성차별 현상을 모두 ‘여성 혐오’라고 호명하는 것 자체가 차별에 맞서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고 본다. 여기에는 “아주 작은 여성혐오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작은 성차별조차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의도는 좋았다 할지라도, 혐오와 차별을 구분하지 않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여성혐오 사회”라고 규정하는 것은 현실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가령, 필자는 여성의 말을 무시하는 것과 여성을 살해하는 것은 같은 “비탈”, 즉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여성차별적 사회라 할지라도, 모든 남성이 여성에 대해 사회악의 근원이라는 공포심을 가지거나 그래서 여성들이 이 사회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여기진 않는다. 또한, 심한 여성비하적 표현을 단지 온라인 익명 게시판에 끄적거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 세계에서 여성을 살해하는 사람은 더 극소수이다. 그럼에도 이 모두를 본질적으로 같은 선상에 있는 ‘혐오’로 보고, 남성 모두가 잠재적 가해자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런 주장은 여성 차별에 반대할 수도 있는 남성들을 차별 반대 운동 쪽으로 이끌기보다는 오히려 밀어내는 효과를 내기 쉽다. 뒤에서도 더 다루겠지만, 이것은 여성차별의 근원이 어디에 있고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누구와 맞서 싸워야 하는지 하는 문제와도 연결돼 있다. (‘여성 혐오 사회’ 담론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내가 〈노동자 연대〉 176호에 쓴 ‘‘여성 혐오 사회’ 담론은 여성 차별에 맞선 운동에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는가? :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서평’을 참고하시오.)

그런데 필자는 ‘여성 혐오 사회’ 담론이나 ‘모든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견해가 어떤 진영에서 나왔는지를 구분하지 않은 채, 이런 주장이 결국 ‘여성 혐오’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손쉽게 일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성해방에는 아무 관심 없는 경찰이나 ‘일베’ 따위가 강남역 살인 사건을 뭐라고 규정했는지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여성 차별 반대 운동의 올바른 전략을 위해 우리 운동 안에서 진지하게 토론돼야 할 문제다. 사실, 이전에는 다수 페미니스트들도 “성차별”로 부르던 것들을 왜 얼마 전부터 갑자기 “여성 혐오”로 바꿔 부르게 됐는지는 그 용어의 사용자들이 제대로 설명해야 할 정치적 의무가 있다. “성차별”을 모두 “여성 혐오”로 바꿔 부르지 않았어도 이전의 여성운동이 차별에 덜 진지했던 것은 결코 아니지 않은가?

메갈리아와 미러링

한편, 필자는 여성 비하·혐오 표현을 남성에게 고스란히 돌려주는 메갈리아의 미러링 방식을 두고, 이런 ‘남성 혐오’ 때문에 ‘여성 혐오’가 더 심해졌다거나 ‘여성 혐오’와 ‘남성 혐오’의 무게가 똑같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그리고 지금껏 페미니스트들이 ‘점잖은’ 방식으로 주장할 때는 귀기울이지 않다가 미러링처럼 “저급하고 의미 없는 수”(필자 자신의 표현)에만 반응하는 것도 문제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책은 미러링 방식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고, 필자가 이 책을 처음 낼 때 속했던 페미디아(여성주의 정보생산자조합) 성원들의 인터뷰를 봐도 메갈리아보다는 “좀 더 정제된 언어”로 페미니즘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을 지향하는 듯하다.)

나 또한 여성 차별은 실제 현실에 물질적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여성 비하·혐오 발언과 그것을 흉내낸 남성 비하·혐오 표현의 무게가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남성들도 한 번 당해 봐라’ 하는 심정이 생겼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성차별주의자들이 메갈리아를 비판할 자격은 없다’고 항변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과연 메갈리아의 미러링 방식이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에서 효과적인 전술인지, 효과적이지 않다면 왜 그런지,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토론해야 한다. 특히 일부 메갈리안들이 우리 사회에서 명백히 차별받는 집단인 성소수자와 장애인 남성까지 무차별적으로 비하하는 것은 결코 옹호할 수 없는 문제다. 이미 이 점을 둘러싸고 메갈리아는 분열을 겪은 바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성운동 내에서 미러링 방식의 유효성을 두고 이견이 있다. 미러링이 비효과적임은 “남성 혐오의 실질적인 힘은 아주 작아서 여성혐오의 뿌리에 스크래치도 내지 못하고 있다”는 필자 자신의 언급에서도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덧붙여야 할 것은, 미러링이 여성 차별을 완화하지도 못하면서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운동 내에서는 불필요한 갈등과 역효과를 낳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메갈리아 논쟁은 성 적대적인 분리주의 페미니즘이 과연 여성해방의 올바른 이론과 전략인가라는 문제와도 떼려야 뗄 수 없다.

개인의 정치학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의 정치학’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이것은 단지 이 책만의 특징은 아니고 오늘날 새 세대 페미니즘 지지자들이 정서적으로 강력히 이끌리는 경향인 듯하다.) 즉, 여성 차별 문제를 다룰 때 그 출발점과 종착점을 모두 개인들에게서 찾는다.

필자는 자기 주장의 근거로 여성 개개인의 경험과 직관이면 충분하다고 보는 듯하다. 차별이 유지되는 메커니즘에서도 (사회구조를 잠시 언급하긴 하지만) 결국 개개인들의 태도에 초점을 맞춘다. 가령, 차별에 의식적으로 도전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차별적인 기존 사회구조에 한 명분의 힘을 싣는다”고 본다거나 “개개인의 여성혐오는 사회 전반의 여성혐오를 공고히 하는 양분”이라는 주장은 사회를 개인의 행위의 합으로 보는 관점을 시사한다. 그래서 결국 모든 개인들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의 토대를 키웠거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문제인 양 가해에 일조한 채로 살아왔거나, 적극적으로 가해했거나, 셋 중 하나”로 분류된다. 차별의 근원이나 그것이 유지되는 메커니즘에서 자본주의 체제나 자본주의 국가 기구 등 사회구조가 하는 구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문제의 해결책도 개인들에게 맞춰져 있다. 개인의 삶 속에서 남성과 맞서 싸우는 것을 중시하며, 개인이 받은 차별의 경험을 말하는 것 자체를 주된 실천이자 변화의 동력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이 개인들과의 논쟁 기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 있어 보인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여성 차별을 개개인의 미시적 관계로 축소(환원)하지 않고, 사회를 전체적으로 분석하고 그 안에서 개인들이 어떤 구실을 하고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주목한다. 그래야만 개인 간의 관계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은 개인의 경험이나 구실을 인정하지 않고 사회 구조가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는 기계적 유물론과는 다르다. 우리는 개인들의 차별 경험이나 그로 인해 생기는 직관을 무시해선 안 된다. 특히, 차별을 직접 겪어 보지 않은 남성들이 여성 차별의 경험을 무시하면서 일방적으로 가르치려고만 드는 태도는 사절이다.

그러나 개인의 경험이 곧 온전한 진실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사회의 본질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경험 상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진실은 반대이듯이 말이다. 또한, 개인들의 경험과 의식은 매우 불균등할 뿐 아니라 삶과 투쟁의 경험을 통해 변화하기 때문에 각자가 특정 시기에 가진 경험이 곧 사회 전체의 구조와 형상을 고스란히 축소한 것이 될 수 없다.

한편, 차별에 동참하거나 차별에 동조·침묵하거나 또는 차별에 무지한 개인들이 차별의 유지에 어느 정도 일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차별은 구체적 개인을 매개로 구현되고, 상당수 노동자들도 차별에 동참·방관한다는 점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차별을 유지하는 데서 엄청난 이득을 얻고, 그래서 차별을 체계적으로 유지해야 할 이해관계가 있고, 실제로 남녀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조건을 좌지우지하는 경제력과 강제력을 행사해 체계적으로 차별을 부추기고 있는 진정한 권력자들(세계 자본가들과 자본주의 국가)과 그런 이해관계와 권력이 전혀 없는 남성 노동자 개개인들을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

남성 노동자들이 차별을 직접 경험하지 않거나 차별에 적극 맞서 싸우지 않는다 해서 곧 그 차별을 유지하는 데에 이해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차별에 반대하는 것이 그들의 객관적 이해관계에 걸맞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대규모 사회적 분업 과정 속에서 집단적으로 일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조건을 지키려면 동료들과 함께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투쟁해야만 한다. 노동자들의 이런 존재 방식은 계급이 왜 서로 다른 차별을 받는 사람들의 단결의 토대가 되는지를 설명해 준다. 노동자 계급은 그들이 그 내부의 차별을 용인하면 할수록 전체의 조건을 지키는 힘을 갉아먹기 때문에 차별에 반대하는 것이 유리한 독특한 피착취 집단이다. 노동자 개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상관 없이 말이다.

이것은 개인들의 차별적 태도가 차별적인 사회 구조의 토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반대라는 점을 보여 준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개개인의 의식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사회변혁 활동가들은 이런 일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자연대가 신문을 발행하고 다양한 규모의 토론 모임을 꾸준히 개최하는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결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인간들의 의식적인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전히 개개인들이 각자 의식을 깨우치려는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명백하다. 우리는 무중력 상태에 있는 게 아니고, 여성 차별이 자연스럽다고 부추겨지고 체계적으로 차별이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강력한 자장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간이 사회 변화의 주체이지만, 사회 변화는 개인주의적 방식으로 존재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개인들이 뭉쳐 조직을 만들고, 특히 자본주의의 심장인 이윤을 생산하는 노동자 계급이 집단적 투쟁을 해야만 그 속에서 변화의 핵심 동력이 나온다고 본다.

여성의 ‘NO’가 ‘NO’임을 분명히 자각하고, 차별을 용납하지 않고자 하는 여성들이 개인의 정치학에서 더 나아가 사회구조를 바꾸는 계급 정치학의 대열에 함께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이 체제에 깊이 뿌리 박힌 여성 차별에 맞서 더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투쟁할 전망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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