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혐오 사회’ 담론은 여성 차별에 맞선 운동에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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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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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몇 년간 페미니즘 진영에서 유행한 ‘여성 혐오 사회’ 담론이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 이슈가 됐다. 성 상품화와 강간을 미화하거나 가십거리로 취급하는 문화, 10년 넘게 변함없는 남녀 임금 격차 등 여성 차별이 만연한 현실에 대한 반발의 맥락에서 ‘여성 혐오’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특히 ‘일베’ 같은 일부 온라인 우익이 주도한 ‘역차별’론은 여성 차별 현실을 호도해 여성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여성 혐오’ 개념이 널리 쓰이는 만큼,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분명한 경우가 많고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서구의 여성운동 내에서도 차별과 혐오 개념에 대한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럼에도 ‘여성 혐오’를 매우 느슨하게 사용하면 우리가 ‘여성 혐오가 일상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는 생각으로 쉽게 발전할 수 있다.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우에노 치즈코, 은행나무, 2012)는 이러한 ‘여성 혐오 사회’ 담론을 잘 보여 주는 책이다. 이 책은 2012년 한국에서 출간돼 꾸준히 인기를 얻었고,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 ‘여성 혐오 사회’ 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 책의 핵심 주장을 공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에노 치즈코 교수(이하 존칭 생략)는 최근 방한해 ‘여성 혐오’에 대한 여러 강연과 인터뷰를 했다.
이 책이 인기를 끈 이유는 일상의 다양한 여성 차별 현상과 문화, 그리고 여성 차별에 가담하는 남성들을 비교적 쉽고 간결한 문체로 가차없이 비판할 뿐 아니라, 여성들에게는 혐오에 당당히 맞서라는 메시지를 주기 때문인 듯하다. 이것이 만연한 여성 차별에 불만을 가진 여성들의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듯하다.[1]
이 책은 차별 현상에 대한 다양한 묘사를 담고 있지만, 더 나아가 현 사회를 ‘여성 혐오 사회’로 규정하고 그것이 유지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나름의 설명도 담고 있으므로 여성 차별 현실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특히 이 부분을 살펴봐야 한다.
여성 혐오란 무엇인가
이 책의 첫번째 특징은 매우 광범한 ‘여성 혐오’ 개념이다.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 혐오’를 하나로 명확히 규정하기보다는 여러가지 의미로 정의한다. 가령,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여성의 객관화, 타자화’, ‘여성 멸시’, ‘남자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여자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저주하는 것’ 등. 이밖에도 그는 일상의 다양한 여성 차별 현상을 모두 ‘여성 혐오’에 포함시킨다.
그런데 여성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여자로 태어나 손해”라는 생각을 안 해 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혐오 개념을 이렇게 느슨하게 사용하다 보니, 그가 볼 때 “여성 혐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마치 중력처럼 시스템 전체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자기 혐오”에 빠질 수밖에 없고, 상당수 여성들도 여성 혐오의 “대리인”이 된다. “여성 혐오라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결국 내 안에 이미 깊이 탑재된 것”이다.
강남역 사건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이처럼 확장된 여성 혐오 개념이 쓰였다. 가령, 한국여성단체연합 인권위원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는 성차별적 인식, 야한 만화 보기, 여성에 대한 폭력, 여성 살해 등 수위가 다른 여러 행위들이 모두 ‘여성 혐오’이고, ‘여성들은 우연히 살아남았을 뿐 일상적으로 강남역 사건과 같은 일을 겪는다’, ‘여성 혐오는 공기처럼 흐르고 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한 급진좌파 기관지에조차 “이 사회의 여성에 대한 인식 그 모든 것이 여성 혐오이다. 아주 쉽게 내뱉는 농담과 호칭에서부터 견고한 믿음에까지”라는 주장이 실렸다.
그런데 여성 혐오가 “중력”이나 “공기”처럼 헤어날 수 없는 거라면 우리는 어떻게 여성 혐오에 맞서 싸울 수 있나 하는 문제는 제쳐두더라도(이 문제는 뒤에서 다루겠다), 혐오 개념을 차별과 아무런 구분 없이 사용하는 이런 용법이 과연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여성 차별 반대 운동에 효과적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혐오 개념의 확장은 다양한 여성 차별의 심각성을 환기시키자는 좋은 취지로 시작했을지 몰라도 현실을 제대로 진단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꼭 좋은 효과를 내는 것도 아니다.
성소수자나 이주민 혐오는 단지 차별적 말과 행동을 뜻하는 게 아니라, 성소수자나 이주민을 사회악의 근원으로 여기고 사회에서 배척하려는 것을 뜻한다. 가령, 성소수자 혐오는 성소수자를 ‘전환 치료’의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이주민 혐오는 단속 추방 운동으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혐오 표현과 범죄를 연구해 온 진보적 법학자도 “범죄학적, 형사법적으로 봤을 때 강남역 사건이 증오범죄가 아닐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숙명여대 법학과 홍성수 교수).
‘여성 혐오’는 차별과는 구분돼야 한다. 우리 사회가 여성차별적 사회라 할지라도, 모든 남성이 여성을 사회악의 근원으로 여기거나 더 나아가 여성들을 이 사회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여기진 않는다. 또한, 그 생각을 단지 온라인 익명 게시판에 끄적거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 세계에서 여성을 살해하는 사람은 더 극소수다. 따라서 여성 살해는 “일상의 연결이자 수순”(정희진)이 아니라, 여성차별적 사회라는 토대 위에 각 개인 주체들의 특수한 경험과 인식 등이 매개돼야만 나타나는 극단적 현상이다.
이런 매개들을 무시한 채 여성 혐오만으로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야말로 환원론이다.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강남역 사건을 두고 ‘모든 정신질환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선 안 된다’고 옳게 주장했지만, 정작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치부한 것에서는 모순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은 의아하다.
혐오 개념 확장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우선, 혐오를 혐오이게 하는 특징들을 흐려버리고 진정한 혐오의 심각성을 오히려 희석시킨다(반대로, 상대적으로 경미한 일은 실제보다 더 부풀려 인식하게 만들 수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살해가 ‘가벼운 농담’과 같은 수준으로 취급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 점에서 혐오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은 혐오라는 말의 의미를 가볍게 만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개념의 확장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여러 현상을 ‘센’ 개념 하나로 환원하는 방법을 통해 여성차별적 인식에 “경종”을 울려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언어의 느슨한 사용은 자신들끼리 토론하는 데 익숙한 소집단 안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대중과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혐오 개념의 확장을 고집하면 그 언어세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낙인 찍어 괜시리 도덕주의적인 분위기를 강화할 수 있다.
특히, 혐오 개념의 확장은 모든 남성들을 모두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는 태도로 연결되기 십상이다. 여성 차별적 인식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만으로 곧 혐오이기 때문이다. 실제 강남역 사건을 둘러싼 논란에서 상당수의 페미니스트들(과 좌파들)은 공공연히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 또는 “공범”이라고 주장했고, 심지어 정희진 씨는 “잠재적”이라는 수식어조차 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점에서 “용어의 과잉은 불필요한 갈등과 대립을 만들어낼 수 있”다(정정훈 변호사, 〈한겨레〉 6월 7일자 칼럼). 이는 여성 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는 남성들과 ‘일베’같은 자들을 모두 같은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매우 불공정하고, 여성 차별 반대 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 수많은 남성들을 소원하게 만들어 차별 반대 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차별을 체계적으로 양산하는 사회 체제가 아니라, 남성 개개인에게 화살을 돌리게 만든다.
여성 혐오는 ‘남성 간 연대’를 유지하는 수단?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이 여성 차별의 원인이라는 남 대 여 분리주의적 주장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남성 대신 남성권력, 가부장제 등으로 바꿔 불러도 같은 의미다). 이런 주장은 ‘여성 혐오 사회’ 담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에노 치즈코 역시 ‘여성 혐오’를 ‘남성 간 연대’(우에노 치즈코의 표현으로는 ‘호모소셜’)를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 ‘여성 혐오’를 남성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지배전략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여성 혐오를 기반으로 조직된 사회를 가부장제라고 부른다”. 그는 퀴어 이론가 이브 세지윅이 1985년에 쓴 《Between Men》의 주장을 따라, 성적 주체로서 남성 집단은 ‘남성됨’이라는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 남성답지 못한 이들(남성 동성애자들)과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화한다고 본다. 가령 우에노 치즈코는 최근 내한 토크콘서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남자가 ‘남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아님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여성혐오’는 여기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부산물이다. ‘호모포비아’ 역시 남성들 간의 집단적인 사회 안에서 ‘여성스러운’ 혹은 ‘계집애스럽다’고 이야기되는 남성을 배제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 남자는 항상 자신이 남성스럽다는 것/여성스럽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여성혐오의 뿌리는 남자임을 증명하는 ‘남성됨’이라는 관념이라는 것인데, 이 남성됨을 증명하는 이유가 여성을 혐오/배제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에노 치즈코의 논리는 여성 혐오는 여성 혐오에서 비롯한다는 순환논리에 불과하다.
우에노 치즈코는 ‘성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푸코의 지지자답게 여성 차별이 남성의 생물학적 본성이라는 식의 설명에는 반대한다. 성애가 젠더 권력 관계와 연결된 것은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고 근대의 산물이라고도 주장한다. 하지만 그 변화가 어떤 조건에서 생겨났는지는 다루지 않기 때문에 역시나 관념론과 순환논리에 머물게 된다(결국 그가 찾은 답은 “신체화된 생활습관”이다). 결국 여성 차별과 동성애 차별의 물질적 뿌리가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 차별의 원인이 남성의 지배욕이나 권력욕 때문이라는 설명과 별반 다를 게 없게 된다.
또한, 이런 비유물론적 역사 서술은 근대 이후 자본주의의 역동적 변화 속에서 나타난 성에 대한 여성과 남성의 인식 변화도 설명하지 못한다. 가령, 우에노 치즈코가 분석의 기초로 삼은 이브 세지윅의 책은 19세기 영국 문학에서 나타난 여성 혐오를 다룬 것이다. 그런데 19세기와 21세기의 여성 차별은 양상이 매우 다르다. 19세기에는 여성의 참정권조차 보장되지 않았고, 기혼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에도 부정적인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이제 여성이 노동 인구의 절반 가량을 차지한다는 것은 주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오늘날 자본가들과 자본주의 국가들은 여성 차별을 체계적으로 유지할지언정, 여성들을 노동시장에서 배제하는 데 관심이 있지는 않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두드러지는 오늘날 이런 물질적 변화는 여성에 대한 남성 대중의 인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령, 올해 4월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인의 생활시간 변화상’을 보면 여전히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남성보다 훨씬 더 길지만, 그 가운데서도 변화는 있었다.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로 가사노동 시간은 평일과 주말 모두 줄어들고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늘어났다. 특히, 남성이 직장에 가지 않는 주말에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눈에 띄게 늘어났고 그만큼 여성의 주말 가사노동 시간이 줄어들었다. 여성 안에서도 취업 여부와 미취학 자녀 유무에 따라 가사노동 시간은 큰 차이가 있었다. 전통적 역할(‘남자는 일, 여자는 가정’)에 대한 반대는 남녀 모두에서 늘었다. 이것은 ‘일베’ 따위가 남성 전체의 의식과 삶의 태도를 대변하는 게 전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우에노 치즈코가 동성애 혐오를 자본주의와 떼어 내어, 남성집단의 유대감 형성을 위한 산물로 설명한 것도 동의하기 어렵다. 동성애자들을 특수한 하나의 집단으로 분류하고 체계적으로 차별하기 시작한 것은 자본주의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재생산하는 데 이성애적 가족 제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과 관련 있다.
남성은 동질적인가?
우에노 치즈코를 비롯한 ‘여성 혐오 사회’ 담론의 지지자들이 남성을 같은 이해관계나 유대감을 공유하는 동질한 집단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여성은 하나가 아니고 계급, 인종, 성지향 등에 따라 다르다는 주장은 오늘날 페미니즘 진영에서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들조차도 남성만큼은 동질하다고 전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다수 남성들이 여성차별 관념을 가지고 있을지언정(상당수 여성들도 이런 관념을 공유한다) 폭력·살인을 저지르진 않을 뿐 아니라, 여성차별 관념을 수용할 때조차 전폭적이고 일관된 방식으로 수용하는 남성은 비교적 소수이다. 다수는 모순된 방식으로 수용한다.
무엇보다 남성들 사이에는 계급에 따라 엄청난 격차가 존재한다. 자본가·국가관료와 노동계급 남성의 삶은 천양지차이고, 그들이 모두 동일한 권력(‘남성 권력’)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자본가 계급 남성은 남녀 노동자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실질적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노동계급 남성은 사회의 모든 중요한 결정권과 통제력에서 소외돼 있다. 이처럼 소외는 사회의 계급 분열에서 비롯하고, 소외의 효과도 계급에 따라 다르다. 노동계급 내 남녀 간 격차는 지배계급과 노동계급 간의 격차에 비하면 훨씬 적고, 오히려 노동계급 남녀는 대부분의 시기에 소외를 겪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때문에 성별, 인종, 민족, 성지향 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은 단결을 이룰 수 있다.
우에노 치즈코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출신이지만[2], 이 책에서는 자본주의의 ‘ㅈ’자도 등장하지 않고 계급 분석이 없다. 이것은 그가 가족을 자본주의와는 완전히 분리된 남성 지배의 장으로 본 강경한 이원론의 지지자였다는 점과 무관치 않은 듯하다. 우에노 치즈코는 프랑스 급진 페미니스트 크리스틴 델피의 ‘가내제 생산양식’ 이론을 수용해, 남성은 (계급과 무관하게) 여성의 가사노동과 성을 전유한다고 봤다. 즉, 노동계급 남성도 집안에서는 여성의 착취자로 군림한다는 것이다.
우에노 치즈코는 현재는 푸코와 같은 후기 구조주의에 친화적이다. 푸코의 권력 개념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권력은 통일체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스며든 다양한 관계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처럼 경제적 토대가 원인이고 나머지는 결과라고 보는 것은 틀렸다 … 권력은 반드시 저항을 부르기 마련이다. 비록 그 저항도 권력 관계와 마찬가지로 파편적이고 분산된 것이지만 말이다.”[3]
이런 관점은 자본가 계급의 남성이든 노동자 계급의 남성이든 남성은 여성을 억압하는 “권력”자이고 억압을 유지하는 데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는 급진 페미니즘 사상과 잘 융합된다. 이것은 결국 노동계급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자본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국가기구에 맞서 투쟁하기보다는, 모두 각자 개인의 삶 속에서 남성에 맞서 저항하라는 개인주의적 해결책밖에 제시할 수 없다.
대안의 문제
우에노 치즈코는 전반적으로 남성(과 여성)을 지배적 담론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을 수동적으로 반영할 뿐인 존재로 보는 듯하다. 이는 그가 지지하는 푸코의 후기 구조주의 철학의 출발점, 즉 인간 주체가 사회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또한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관련 있는 듯하다. (한편, 개인은 사회 구조를 수동적으로 반영할 뿐이라고 보면, 개인의 행동으로 곧 그 사회 전체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강남역 사건의 살해 피의자가 ‘여성이 나를 무시했다’고 말했다는 점과 여성이 살인 피해자라는 사실에서 곧바로 우리 사회 전체가 여성 혐오 사회라고 결론 내리는 것도 비슷한 접근법이다.)
이것은 ‘도대체 중력과도 같이 헤어날 수 없는 여성 혐오를 끝장낼 수는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한다. 우에노 치즈코는 이에 대해 “비폭력의 학습”이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방한 강연에서 그는 남성들이 늙어서 힘이 없어지는 약자가 되거나, 약자를 돌보며(“케어 노동”) ‘비폭력 학습’을 하면 여성 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우에노 치즈코는 남자들이 인생의 많은 시간을 약자로 지내야 하는 초고령사회에 기대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여성 억압은 남성 개개인이 젊고 힘 좋을 때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노년에 힘 빠지면 사라지는 그런 개인적인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 차별은 계급 사회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됐고, 오늘날의 여성 차별은 자본주의 체제가 작동하는 방식과 맞물려 있다. 자본주의는 여성 노동력을 값싸게 착취하면서도 안정적인 노동력 재생산의 주된 책임을 개별 가족의 여성에게 전가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하려 한다. 또한, 노동계급을 성별로 분열시켜 이간함으로써 단결을 가로막고 노동계급 남성과 여성이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헌신하길 바란다. 특정 집단이 그토록 체계적으로 차별 받아 온 데는 물질적 근원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여성 해방이 우에노 치즈코 스스로 ‘여성의 억압자’라고 지목한 남성들 스스로의 개별적 계몽과 각성에 달려 있다니, 이만큼 허망한 결론도 없을 듯하다. 무엇보다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을 약자와 피해자로 자리매김하고, 약자라는 특성에서 변화의 근거를 찾는다는 점에서 중요한 약점이 있다(남성이 여성 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거도 남성이 약자의 처지가 돼 보는 것이다). 여성을 약자와 피해자로만 여기는 관점은 오늘날 여성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성의 주체가 될 수 있고, 무엇보다 투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못하게 만든다.
두려움과 공포심, 약자와 피해자로서의 정체성만으로는 투쟁에 나서기 어렵다. 정반대로 자신감을 갖고 잠재력을 자각하는 것이 투쟁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과 힘이 오늘날 여성 노동자들에겐 있다. 그 힘은 오늘날 자본주의가 여성의 노동 없이는 굴러갈 수 없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여성 혐오 사회’라는 담론과 달리,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들을 배척해서 운영되는 게 아니라 여성들의 노동에 의존해서, 그들을 사회의 중요한 일부로 끌어들임으로써 굴러가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성과 남성 노동계급은 같은 이해관계와 같은 잠재력을 공유하면서 연대의식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사회의 상층부로 갈수록 여전히 여성의 진입이 제한적이지만, 이조차 여성이 점점 더 다양한 영역으로 진출하면서 변화가 생기고 있다. 무엇보다 이조차 여성을 사회 운영에서 배제하려는 남성들 전체의 지배전략에서 비롯했다고 보긴 어렵다.)
우에노 치즈코 식의 ‘여성 혐오 사회’ 담론보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유물론이 차별을 더 잘 설명할 뿐 아니라, 어떻게 그것에 맞서 싸울 것인지도 제시할 수 있다. 역사유물론은 여성 차별이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고, 계급의 탄생과 더불어 역사 발전의 특정 시기에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자본주의에서의 여성 차별도 자본주의에서 벌어지는 착취의 양상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여성 억압, 특히 자본주의에서 가족의 구실과 가족 안에서 여성이 수행하는 재생산이 여성 억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역사유물론은 스탈린주의의 기계적 유물론과는 달리, 결코 인간 주체의 구실을 무시하지 않는다. 즉,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자동적으로 사회주의가 도래하고 여성이 해방되므로 자본주의를 심화·발전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기계적 유물론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전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후기 구조주의 철학은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의 산물로 오해하고 스탈린주의에 대한 반발 때문에 사회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에 거리를 뒀지만, 파편화된 권력에 맞선 파편화된 저항이라는 대안은 차별 반대 운동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차별에 맞선 투쟁의 힘을 약화시켰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의 물질적 토대와 인간 주체의 상호 작용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자본주의 하의 소외 때문에 노동계급이 자신의 잠재력을 갉아먹고 온갖 차별적 사상을 수용하는 것에 의식적으로 도전해야 한다고 본다. 이 때문에 차별과 착취에 맞서 노동계급의 의식적인 단결을 추구하는 혁명적 조직의 구실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노동계급의 투쟁이 그 잠재력을 충분히 보여 주지 못하는 현재의 조건에서 여성 차별에 분개한 많은 여성들이 노동계급의 단결을 통한 체제 변혁 사상보다는 남 대 여의 분리주의적 정치에 심정적으로 이끌리기 쉬운 듯하다. 하지만 여성 차별을 끝장내고자 한다면 차별을 묘사하는 것에서 만족할 수 없고, 차별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로 나아가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은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다.
[1]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역자가 후기에 ‘보슬아치’(‘보지 달린 게 벼슬’이라는 뜻의 인터넷 은어)라는 단어에 대해 “진심으로 공감과 동정을 표한다”고 한 것은 부적절했다. 비록 그것이 “한국의 여성 혐오를 상징하는 단어”라며 비판적 코멘트를 했을지라도 말이다. 여러 여성 독자들이 이 역자 후기에 대해 출판사 측에 항의했다.
[2]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에서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모두 여성 억압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이 책의 역자는 우에노 치즈코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1994년 한국에서 출간된 우에노 치즈코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서 그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 소개됐다. 오늘날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가 칼같이 구분되지는 않는 듯하다.
[3] 알렉스 캘리니코스,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주의의 비판》, 책갈피, 2014, 151~1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