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놈 믿지 말고, 소련 놈에 속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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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서로 거울 이미지일 뿐이다. 이런 역사관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분노, 저항이 부차적이거나 왜곡된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바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입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다함께〉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쟁점들을 연재할 계획이다. 이번이 그 두번째다.
소련이 한반도에 막 진주했을 때 일화다. 민족주의 지도자 조만식이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에게
스탈린주의자들과 포퓰리스트들, 그리고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소련군을 모종의 해방군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당시 스탈린의 심복이었던 몰로토프는
미국과 소련은 모두 조선인들의 자생적인 자치기구를 허용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배제와 포섭의 과정이었다.
미국은 한민당으로 대표되는 친일
소련 역시 민족주의 세력이 강력했던 평양의 건국준비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건준을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서울의 인민공화국은 대중조직을 상당수 포괄하고 있었지만, 소련과 미국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다.
1945년 10월 10일 미군정은 인민공화국을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김일성의 비난은 완전히 불공정한데,왜냐면 김일성도 스탈린의 규정에 따라 당면 혁명의 과제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헌영이 주도한 조선공산당과 인민공화국의 잘못은 오히려 스탈린의 지침을 너무도 충실히 따른 데 있었다. 그들은 스탈린의 지침에 따라 미군정과 가망 없는 협력을 추진했고, 자본가들에게 양보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운동이 급진화하는 것을 억제하는 데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인민공화국이 졸지에
친북 좌파는 대체로 분단의 원인을 남한과 미군정에게만 돌리고 있지만, 사실
아이작 도이처는
하나는 서방과 협상하기 위해 자신의 체제를 남한으로 확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확보한 북한 지역에서 신속하게 자신의 체제를 심어 놓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공산당의
5도 행정10국은 소련군에 의해 소집됐을 뿐 아니라 명령계통 상으로도
강정구 교수는
그러나 소련 민정부는 소련군 제25군 소속 군사회의의 산하기구로서 사실상 군정과 다르지 않았다. 더욱이 지방 인민위원회는 민정부를 거치지 않고 25군 직속의 위수사령부 명령을 따라야 했다.
미국과 소련은 모두 점령지의 지배를 위해, 종전과 함께 와해된 폭압적 국가기구를 재건하고 강화했다.
1945년 10월 12일 〈북조선 주둔 소련25군사령관의 성명서〉에서는
미
이에 따라 남한에서는 좌파계열 무장조직인 조선국군준비대가 강제 해산당했다. 당시 조선국군준비대는
해방 당시 총독부의 조선인 경찰관 수는 8천 명 정도였는데, 해방 직후 이들 중 대부분이 도주해 출근율이 20퍼센트도 안 됐다. 미군정은 이들에게 복귀할 것을 명령했고, 경찰력은 3개월 만에 1만 5천 명으로 급격히 증강됐다.
북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 공산당이 주도하는 적위대까지 해산당했다. 무장력은 보안대로 집중됐고,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권력의 핵심부는 이런 경찰기구를 통해 지방까지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또한, 남북한 모두는 일찌감치 독자적인 정규군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는 1946년 군대간부 교육기관의 효시인 평양학원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즉, 남과 북 모두에서 미군과 소련군은 자신에게 유리한 분단 정권을 창조해 갔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일본인 자본가들이 남기고 간 공장과 작업장을 자신들의 공동 관리로 접수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남과 북의 점령군 모두는 노동자들의 급진적 진출도 탄압했다.
미군정청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스탈린은
남과 북 모두에서 점령 당국의 식량공출에 저항하는 농민 폭동이 일어났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군표가,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일본 총독부의 화폐 남발을 방조해 폭발적인 물가인상을 부추겼다.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종전보다 하락했다.
북한은 소련군 주둔비용의 상당 부분을 부담해야 했는데, 이는 북조선인민위원회 세출액의 거의 9퍼센트에 달했다.
이밖에도 소련은 북한에 있는 주요 공업설비들을 대일본전 배상금 명목으로 반출해 갔다. 북한 산업에 대한 국유화 조치는 소련의 반출이 마무리될 때까지 미뤄졌다.
역사가 노만 나이마크는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남한에서 미군정에 대한 민중 저항이 정당한 것처럼, 소련군에 대한 북한 민중의 저항도 정당하다.
신의주와 함흥에서 일어난 학생 시위는 점령군의 이런 만행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다. 물론 이들 시위에서 종종 지주와 우익들이 지도부 구실을 하곤 했다.
그래서 서독에 진주해 있던 미군 장군 클레이의 진술은 시사적이다.
소련 점령에 대한 반대를 종종 우익들이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군의 점령 정책과 그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했던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있다.
당시 조선의 민중들에게 널리 퍼졌던 유행어는 진정한 좌파적 대안이 무엇이 어야 했는지 알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