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 외교’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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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파도는 반목으로 가득했던 국제사회에 공조와 화합의 씨앗을 뿌리고 간 듯하다.”
〈조선일보〉는 쓰나미 재해에 대한 각국 정부의 대응을 칭찬하며 이렇게 평가했다. 과연 그러한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도주의적 구호 활동”이라는 부시의 자화자찬과 달리 대다수 선진국들 ― 특히 미국 ― 의 초기 지원은 보잘 것 없었다. 세계 최대 부국인 미국은 처음에 고작 1천5백만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인색하다”는 비난이 일자 부시는 지원액을 3천5백만 달러로 늘렸다. 하지만 “미국은 이라크에서 매일 아침 식사를 하기도 전에 3천5백만 달러를 쓴다.”
된통 망신을 당하고 나서야 지원액은 3억 5천만 달러로 늘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부시는 이라크를 파괴하는 데 1주일에 10억 달러를 쓴다.
두 가지 요인이 선진국들의 뒤늦은 지원 경쟁에 불을 지폈다. 하나는 전 세계의 평범한(그리고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 보여 준 경이로운 관대함과 연민이었다.
지진해일이 낳은 참상은 평범한 사람들이 주도한 거의 전례 없는 수준의 구호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세계 곳곳에서 단 며칠 만에 엄청난 액수의 모금과 기부 ― 때로 정부가 발표한 지원액보다 더 많은 ― 가 이루어졌다. 체면을 구긴 선진국 정부들은 지원액을 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강대국 정부들이 경쟁적 지원에 나선 것이 그저 체면 유지 차원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각국 정부들은 쓰나미 구호 활동이 정치적으로도 매우 쓸모가 있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처음에 미국은 일부 국가를 선택해 재난 지원을 위한 “핵심 그룹” ― 미국, 일본, 호주, 인도를 포함하는 ― 을 형성하려 했다.
그것은 이라크 전쟁 때 만든 “의지의 동맹”과 꼭 마찬가지로 유엔을 따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부시 재선 뒤 공화당 우파가 주도한 일련의 반(反)유엔 ― 특히 사무총장인 코피 아난을 겨냥하는 ― 공세가 이러한 시도의 배경이었다. 코피 아난이 미국이 원하는 만큼 충분히 고분고분한 하수인이 아니었다는 것이 진정한 문제였다. 특히 그가 이라크 전쟁이 불법적이라고 비난한 일이 그랬다.
그러나 지난 6일 자카르타에서 열린 재건 공여국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핵심 그룹”을 해체한다고 발표해야 했고, 유엔이 재건 지원 활동의 책임을 맡기로 결정됐다. 부시의 일방주의는 다시금 좌절을 경험했다.
부시 행정부는 미국의 실추된 국제적 이미지를 복구하는데 쓰나미를 한껏 이용하고 싶어한다. 부시의 동생 젭과 함께 재난 지역에 파견된 콜린 파월은 “무슬림과 세계의 나머지는 미국의 관대함, 행동하는 미국의 소중함을 확인할 기회를 갖게 됐다”며 으스댔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미국은 지진 지역에서 ‘다른 나라들을 돌보는 초강대국 이미지’를 심으려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기회에 자신을 유능하고 자비로운 구원자로 부각하려 애쓰기는 다른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다. 일본과 독일은 이번 재난 지원 활동을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
인도네시아 등 쓰나미 피해 지역은 풍부한 자원과 상품 시장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미국을 포함한 일본·중국·인도·호주 등의 경쟁적 지원은 이 지역에 걸린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강대국 간의 경쟁을 반영한다. 일본과 중국은 최근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주도권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군사적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지금 동남아시아 인근에는 베트남 전쟁 이후 가장 많은 외국 군대가 몰려 있다. 미국은 이 지역에 1만 3천여 명의 군대와 수십 척의 군함을 파견했다. 일본·호주·인도 등도 앞다투어 군대를 파견하고 있다.
이것은 그저 인도주의적 목적 때문이 아니다. 예컨대, 미국은 “인도주의적 지원 활동”을 내세우며 타이만(灣)에 위치한 ‘유토파오 왕립 해군 전투기 기지’에 복귀했다.
공식 명분은 긴급 구호 활동을 위한 “지휘 센터” 설치다. 그러나 실제 목적이 미군 주둔의 강화인 것은 분명하다. 유토파오 기지는 베트남 전쟁 동안 B-52 폭격기의 주요 발진 기지로 쓰였다.
스리랑카에도 쓰나미 이후 1천5백 명의 미군이 들어왔다. 많은 스리랑카인들은 미군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한다.
피해 당사국 정부들조차 나름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이번 재난에 대응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아체 지역에서 정부군은 군용 창고에 쌓인 긴급 구호물자들을 방치한 채 이 지역의 독립을 요구해 온 반군 공격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스리랑카 동북부의 타밀 반군은 스리랑카 정부가 구호물자 배분 과정에서 자신들을 차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스리랑카 정부는 이 지역의 사망자 수를 공개하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다.
인도는 안다만과 니코바르 제도에 거주하는 원시 부족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이 지역에 대한 접근과 지원 활동을 차단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이유는 이 지역에 인도의 주요 군사 시설 ― 중국을 감시하는 정보 기지 ― 이 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의 한 정치학자가 말한 것처럼 “인도적 지원의 정치학은 결코 순결하지 않다.” 참혹한 재앙 속에서 생명을 구하는 일조차 이윤과 경쟁이라는 이 체제의 냉혹한 본성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평범한 사람들이 보여준 사심 없는 우애와 연대만이 이 비정한 세계를 바꿀 유일한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