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미국 대선:
트럼프의 승리라기보다는 클린턴의 패배 ─ 미국 주류 정치도 시궁창임을 보여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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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8일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이 확실시된다(한국 시간 9일 16시 현재). 공화당은 상·하원 양원에서도 다수당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는 역대 가장 인기 없는 후보들 사이의 경쟁이었다. 〈ABC〉가 시행한 출구조사에서 60퍼센트 이상이 힐러리 클린턴과 트럼프가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 투표에서도 투표 가능 인구 2억 1천만 명 중 7천만~1억 명 가까이가 투표에 불참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양대 주요 정당 후보들이 각각 득표한 것보다 많은 숫자다.
특히 청년층에서 투표율이 격감한 것으로 보인다. 선거 전 여론조사에 따르면, 18세에서 35세 사이의 청년 중 25퍼센트 이상이 클린턴과 트럼프 중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지보다 유성이 지구에 충돌할 것인지에 더 관심이 많다고 답변했다.
이는 경제 위기와 미국 사회에 만연한 기성 정치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관련 기사: 본지 182호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 클린턴과 트럼프 둘 다 미국 권력층을 대변한다’)
경제 위기로 미국의 실질임금 평균값은 1973년보다도 낮아진 반면, 부유층은 더 부유해져 2015년 상위 1퍼센트가 전체 국민소득의 22퍼센트를 차지했다.
2008년 오바마는 대중의 기대감을 업고 당선했지만, 8년 임기 동안 빈부격차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더한층 심해졌다. 오바마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는 점 때문에 사람들은 인종차별 문제도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경찰의 흑인 살해는 여전히 심각했으며 사회·경제적 천대도 완화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경찰의 흑인 살해와 이에 대한 오바마 정부의 대응에 항의하는 ‘흑인들의 목숨도 소중하다’라는 대중적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은 오바마 정부에 크게 실망하고 기성 정치가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하게 됐고, 오바마를 찍었던 사람들 중 적잖은 수가 이번 선거에서 클린턴을 지지하지 않았다. 클린턴 지지 표는 (한국 시간으로 9일 16시 현재) 5천5백만 표 수준으로 2008년에 오바마가 득표한 6천9백만 표에 크게 못 미친다.
특히 오랫동안 민주당에 투표했던 오대호 연안과 동부 지역의 제조업·광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민주당 지지가 크게 줄었는데, 이는 구조조정으로 복지가 삭감되고 실업률이 크게 높아지면서 노동자 서민들의 삶이 파괴된 것과 관련 있다. 수십 년 동안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굳건한 대변자였던 클린턴은 이런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반면 트럼프는 온갖 추잡한 성차별적·인종차별적 발언을 일삼았지만 전통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했던 보수적 투표층을 그럭저럭 유지했다. (한국 시간으로 9일 16시 현재) 트럼프 지지 표는 5천6백만 표 수준으로, 2008년 대선 때 공화당 후보 존 매케인이 득표한 5천9백만 표를 어느 정도 유지한 모양새다.
이주자와 여성을 희생양 삼아 백인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되찾아 주겠다는 트럼프의 공약에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품었지만, 수사만 조금 다를 뿐 구조조정을 밀어붙이고 경찰력을 강화해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적 공격을 계속하겠다는 점에서 트럼프와 별반 다르지 않은 클린턴을 찍지는 않은 것이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며 1천3백만 명 이상의 지지를 얻은 버니 샌더스가 경선 후 클린턴을 지지한 것이 큰 잘못이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샌더스가 민주당 경선에서 확인된 지지를 살려 독립적인 대안 구축에 나섰다면 기성 정치에 대한 좌파적 대안을 염원하는 미국의 노동자 서민들을 결집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 대선 결과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트럼프가 당선하면서 인종차별적 우파들이 환호하는 것에 속이 쓰릴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의 앞날에는 커다란 불안정 또한 잠재해 있다.
트럼프의 허황된 공약들은 실현되기도 어려울 뿐더러 미국 경제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할 것이다. 트럼프가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이용해 노동계급의 삶을 파괴하려 들면 들수록 노동자 서민들의 반감과 분노도 커질 것이며, 그 속도는 매우 빠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대중 운동이 촉발될 수 있다. 이미 지난 몇 년 동안 ‘점거하라’ 운동, 인종차별 반대 운동, 노동자 운동이 커지면서 몇 차례 중요한 항의 시위와 파업이 벌어진 바 있다.
또한, 억만장자인 트럼프 역시 미국 지배계급의 분명한 일부로서 이미 선거 기간 중에 자신의 주장을 미국 지배층의 구미에 맞춰 조정해 왔다. 트럼프는 대선 과정에서 “힘을 통한 평화”를 얘기했는데, 특히 동맹국의 방위비 분담 증대, MD 체제의 철저한 구축(트럼프는 공화당 후보로 확정된 후 “최첨단 미사일방어시스템을 개발하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군비 증강 등 트럼프가 표방한 대외 정책은 세계 패권을 지키고자 하는 미국 지배자들의 바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클린턴이 당선됐다면 그랬을 것과 꼭 마찬가지로) 트럼프는 지배자들의 이 같은 바람에 따라 미국 제국주의의 헤게모니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고, 동아시아에서도 경쟁 제국주의 국가(중국)를 제압하려 애쓸 것이다. 그로 인해 제국주의 간 갈등이 더 악화될 것이다. (관련 기사: 본지 177호 ‘클린턴과 트럼프: 누가 당선돼도 세계를 더 위험하게 만들 제국주의자들’)
이처럼 미국 지배자들을 대변할 트럼프 정부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노동자 민중의 삶을 더한층 불안하게 할 것이다. 사람들의 반감과 분노는 더한층 심화될 것이다. 미국 좌파들이 선거 전부터 분명히 드러난 노동자 민중의 불만과 분노를 토양 삼아 좌파적 대안을 건설하기를 기대한다.
김준효(〈노동자 연대〉 신문 편집팀을 대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