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 집회를 놓고 변혁당이 제기한 문제들에 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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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집회 소식을 다룬 본지 기사에 대해 유성범대위(노조파괴 범죄자 유성기업, 현대차 자본 처벌! 한광호 열사 투쟁 승리! 범시민대책위원회) 집행위원회의 일부 주도적 활동가들이 비판을 제기했다.
그 핵심은 첫째, 당일 행진 때 유성범대위가 오체투지를 고수해야만 했느냐 하고 묻는 것 자체가 유성 투쟁을 업신여기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둘째, 행진 뒤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진행된 집회에서도 유성범대위를 무시하고 다른 단체들이 제멋대로 집회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노동자연대가 그 집회에 회원 60여 명을 참가시켰고, 집회 기획 논의에 (부분적으로) 참여했으므로, 책임감 있게 이런 이의제기에 답하고자 한다.
먼저 분명히 하자면, 내가 기사에서 주장한 바는 어디까지나 그날의 구체적 조건에서 어떤 전술이 더 효과적일지에 관한 것이다. 왜 그날 박근혜 퇴진 촛불 집회의 행진은 대열이 늘고 활력이 커지기보다 오히려 대열이 줄고 어수선했을까 하는 점이 고민이었다. 나는 “유성범대위가 오체투지라는 방식을 고수하면서 대열이 줄었다”고 생각했다.
이를 두고 유성범대위 내 일부 활동가들은 “현장 노동자들의 피눈물 나는 투쟁에는 관심이 없다”, “한광호 열사 투쟁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다”, “투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냐” 하는 엉뚱한 비판을 했다. 그날의 오체투지 전술을 비판하면 유성 투쟁을 반대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듯하다. 어떤 운동의 전술을 비판한다고 해서 그 운동의 대의명분과 원칙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기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나는 단 한 번도 유성 투쟁을 깎아내린 바가 없다. 그리고 노동자연대가 그동안 노동자 투쟁에 연대하는 활동을 중시해 온 것을 많은 동지들이 알고 있을 텐데, 유성범대위 집행위원장이자 좌파단체 사회변혁노동자당의 김태연 동지까지 이렇게 오해한 것은 특히 안타깝다.
지지하면 군말 말고 1백 퍼센트 지지나 하라는 식으로는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토론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진심으로 바라건대, 당일 집회의 효과적 전술은 무엇이었을지, 집회는 어떤 방식으로 운영돼야 했을지 등이 토론됐으면 한다.
박근혜 퇴진을 위한 공동 투쟁
이날의 전술을 논하려면, 일단 이날 집회 전체가 어떻게 기획됐는지를 짚어 봐야 한다.
11월 11일 집회는 크게 세 그룹의 공동 행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매일 저녁 오후 7시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촛불 집회를 진행하는 민중총궐기투쟁본부, 다른 하나는 박근혜와 현대차·유성기업에 맞서 오체투지로 청운동사무소까지 행진을 계획한 유성범대위, 또 다른 하나는 ‘총파업! 노동자대회, 박근혜 퇴진! 민중총궐기 전야대회’를 준비해 온 노동자전선·노동당·노동자연대·좌파노동자회·노사과연 등 좌파단체들의 전야제 준비위원회.
세 그룹은 구성과 요구 등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박근혜 퇴진이라는 공통의 요구로 함께 움직일 수 있었다. 일단 세 단위는 모두 7시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주최하는 촛불 집회에 함께하기로 했다. 그 후 행진은 민중총궐기투쟁본부와 유성범대위가 함께 진행하는 형식이었다. 특히 공동 행진은 유성범대위가 민중총궐기투쟁본부에 먼저 제안한 것이다. 이 요청에 따라, 민중총궐기투쟁본부는 자체 행진 코스를 포기하고 청운동사무소까지 함께 가기로 했다.
행진이 끝나면 뒤이어 전야제 준비위원회·유성범대위·광장캠핑촌이 공동 주최하는 집회를 하기로 했다. 사실 전야제 준비위원회는 유성범대위 측에 전야제로 함께하자고 제안했는데, 아쉽게도 거절을 당했다. 그 뒤 고심 끝에, ‘그럼에도 우리의 독자성을 고집하기보다 함께 행진한 이들과 공동으로 집회를 하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광고까지 다 나간 자체 집회를 취소하고 공동 집회를 하기로 했다.
즉, 민중총궐기투쟁본부나 전야제 준비위원회 모두 각자의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유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마음에서, 또 유성범대위가 청운동사무소까지 행진 신고도 내놨던 터라 더 효과적이고 활력 있는 집회와 행진을 위해 기꺼이 양보를 한 셈이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모두 박근혜 퇴진을 위해 함께하기로 한 만큼, 서로 각자의 행사를 하기보다 공동 집회와 행진을 성공시킨다는 미덕이 필요했다.
줄어든 행진 대열
7시 촛불 집회는 여느 때처럼 활력이 넘쳤다. 참가자들은 ‘박근혜 퇴진’뿐 아니라, 유성기업 사장 ‘유시영 구속’도 외쳤다. 행진이 시작되자 많은 시민들이 유성기업 노동자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오체투지 대열의 뒤를 따라 행진을 시작했다. 행진을 시작할 때 대열은 1천여 명이었다.
그러나 유성범대위가 낸 행진 신고의 내용이 ‘3백 명 규모의 오체투지’라는 것을 빌미로, 경찰이 동아일보사 앞에서 오체투지 대열과 촛불 대열을 분리시키며 행진을 가로막았다. 경찰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갈라진 대열은 그래도 함께 구호를 외치며 경찰에 항의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유성범대위가 뒤쪽에 잘린 대열을 그대로 둔 채 오체투지를 재개해 청운동사무소 방향으로 향했다.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삼삼오오 다시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모이자’고 공지했지만, 이미 대열이 나뉘어 남겨진 이들이 집단적으로 움직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구나 경찰이 그 자리에서 ‘행진은 오체투지 하는 3백 명만 허가한다’고 공표했으므로, 세종문화회관 앞에 가서도 행진은 또다시 가로막힐 것이 뻔했다.
실제로 세종문화회관 앞에 갔을 때 전체 대열은 4백 명 정도로 대폭 줄었다. 일부 노동자들, 좌파단체 회원들은 부랴부랴 길을 돌아 대열을 찾아갔지만, 6백여 명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얼마 못 가 다시 행진이 가로막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규모는 더 줄어 2백50명 정도가 됐다. 행진을 시작한 지 2시간이 훌쩍 지나 청운동사무소 앞에 갔을 때는 1백50여 명만 남았다.
이렇게 된 일차적 책임은 물론 박근혜 정부의 경찰에 있다. 경찰은 전체 행진 대열을 줄이려고 촛불과 오체투지 대열을 분리시키고, 거듭 행진을 막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측의 대응은 어때야 했을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유성범대위는 다른 대열에 상관없이 오체투지로 청운동사무소까지 가는 자신들의 목표를 고수했다. 유성범대위가 먼저 공동 행진을 제안해 놓고는, 다른 대열은 알아서 따라오라는 식이었다. 그래서 아쉽게도 이날 행진은 더 많은 사람들이 합류하는 대중 투쟁이 되지 못했다. 유성 노동자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며 나섰던 수백 명은 우왕좌왕하다 아쉬워하며 그냥 흩어져야만 했다.
대중적 운동 안에서 그 일부가 자신들만의 특수한 방식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자기 중심적이다. 특히, 이 날의 행진은 유성범대위만의 행진이 아니었으니만큼, 다 함께 할 수 있는 방향을 추구하는 게 옳았다. 경찰에 가로막혀 다 함께 행진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독자적인 오체투지를 고수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다른 대열과 함께 항의를 지속하는 게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유성 투쟁과 박근혜 퇴진 투쟁은 분리돼 있는 게 아니다. 그동안 유성 노동자들은 박근혜 정부의 노조 파괴 공격에 맞서 투쟁해 왔다. 한광호 열사를 죽음으로 내몬 것도 유성기업 사측의 극심한 노조파괴 공격과 이를 전방위적으로 뒷받침한 박근혜 정부다.
따라서 유성범대위가 촛불 집회 참가자들과 끝까지 함께하며 박근혜 정부의 반노조 공격을 폭로하고 투쟁에 지지와 연대를 모으려고 애쓰는 것이 유성 투쟁을 강화하는 데에도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철도 노동자들이 매일 열리는 촛불 집회의 중요한 일부로 참가하고, 그 속에서 성과연봉제 저지 파업에 대한 지지를 호소해 온 것은 좋은 사례다. 그 덕분에 이제 촛불 집회에서 철도 파업을 응원하는 대학생, 청소년, 주부 등의 발언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청운동사무소 앞 집회에서 진정 아쉬웠던 점
이제 행진 이후의 상황을 보자. 변혁당 김태연 동지는 내가 행진 이후 진행된 집회를 “좌파단체들의 전야제”로 둔갑시켰다고 비판했다. 즉, 전야제 준비위원회·유성범대위·광장캠핑촌이 공동 주최하는 집회를 전야제 준비위 측 집회인 것처럼 설명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정확히 말해, 나는 이 집회를 “전야대회”로 칭하고 여기서 “좌파적 노동자·활동가들이 결의를 다졌다”고 썼다.
내가 이렇게 쓴 이유는 이 집회의 성격을 멋대로 포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먼저, 이 집회 참가자들은 이제 대체로 좌파적인 노동자·활동가들이었다. 장기투쟁하고 있는 유성 노동자들을 포함해 그 자리에 참가한 노동자들 중에는 노동조합운동 내에서 전투적이고 좌파적인 활동가들이 많았다. 단체로 치면, 변혁당을 포함해 여러 좌파단체 회원들이 주를 이뤘다.
내가 집회를 “전야대회”라고 지칭한 게 더 큰 불만을 낳은 듯한데, 정확히 말하면 이날 집회 명칭은 불분명했다. 사실, 유성범대위 측의 추천으로 정해진 사회자가 공식적으로 이 집회를 “전야대회”라고 명명했다! 나는 사회자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뿐이다. 그럼에도 애초 일부 좌파단체들이 준비해 온 전야제와는 다른 행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총파업! 노동자대회, 박근혜 퇴진! 민중총궐기 전야대회’라는 이름과는 구분해서 사용했다.(그런데 전야제 준비위원회는 애초 집회 명칭을 정할 때 ‘총파업’과 ‘박근혜 퇴진’이라는 용어를 중시했다.)
김태연 동지는 이날 전야제 준비위 측의 발언이 왜 많았는지, 전야제 준비위 측에서 애초 하려 했던 행사 현수막을 왜 들었는지도 따졌다.
발언이 많았던 것은 전야제 준비위가 의도적으로 꼼수를 부린 게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유성범대위가 사회를 맡았고, 전야제 준비위는 우리가 할 발언을 사회자에게 넘겼을 뿐이다. 김태연 동지는 ‘각 단위 별로 한 명씩 발언하기로 했다’고 말했지만, 이렇게 정한 바도 없고 그랬다면 사회자도 알았을 것이다.
행사 현수막도 애초 우리가 준비했던 것이 있으니 대열 옆에 펼치겠다고 사전에 합의한 바 있다. 따라서 이것도 트집잡을 일은 아니다. 다만, 당일 장소가 비좁아 현수막을 펼칠 자리를 잡다가 사회자 뒤에 서면서 그것이 마치 공식 집회 현수막처럼 보이게 된 점이 사실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이는 명백히 전야제 준비위 측의 실수였다.
하지만 이 집회에 관해 내가 던지고 싶은 물음은, 전야제 준비위가 미리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고, 범대위에 함께하자고 제안도 했고, 변혁당이 초기 논의에도 함께했었는데, 왜 이를 존중해 주려 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함께 협력해 전야대회를 치를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아쉽게도, 심지어 집회를 1부와 2부로 나눠서 하더라도 우리가 애써 준비한(광고까지 한) 집회를 존중해 달라고 요청했는데도 유성범대위는 거절했다. 사실 전야제 준비위 단체들은 다들 유성범대위에 가입해 유성 동지들의 투쟁에 연대해 온 곳들이기도 한데 말이다.
무엇보다 유성범대위에서 주도적 구실을 하고 있는 변혁당 동지들의 연대정신이 못내 아쉽다. 박근혜 퇴진 운동에서 각 단체들의 견해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노동자들이 투쟁을 주도하고 민주노총이 총파업으로 투쟁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큰 틀의 대의에는 공감대가 있는 것 아니었는가?
김태연 동지가 전야제에 함께할 수 없다고 밝힌 까닭은 이렇다. “청계광장 촛불대오가 공식적으로 함께 행진하는 이상, 청와대 집회는 전야제 형식으로 할 수 없다.” 촛불대오를 배려한 이 말은 유성범대위가 정작 촛불집회 참가자들과 끝까지 함께 행동하지 않고 오체투지 행진을 고수했던 것과는 상충되는 주장 아닌가?
그런데 촛불 집회 참가자들이 좌파단체들의 전야제에는 왜 함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도 의문이다. 박근혜 퇴진 투쟁의 전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를 고민하는 이들은 얼마든지 좌파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고, 이런 대중에게 운동의 진정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다름아닌 좌파의 과제이기도 하다.
좌파가 광범한 계급운동 안에서는 그 속에 녹아 입을 다물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정치적 주장을 펼 때는 그 바깥에서 ‘우리끼리’ 주장하고 토론하는 것은 자기패배적인 일일 것이다. 좌파는 노동계급 대중과 함께 행동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의 주장을 내놓고 효과적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투쟁의 전진과 자기 자신의 성장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