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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안 가결은 민중의 투쟁이 낳은 성과
즉각 퇴진 투쟁은 계속돼야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2백34표로 가결됐다. 국회 재적 대비 78퍼센트 찬성이고, 새누리당 의원의 절반 가까이가 탄핵소추에 찬성했다. 무기명 투표의 효과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집권당도 거의 절반이 등을 돌려 박근혜의 대통령 직무가 정지됐다. 즉각 퇴진을 요구하며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외쳐 온 민중의 투쟁에 국회가 압박당한 결과다.

지은 죄로 말하자면, 박근혜는 세월호 참사 때 이미 두 번 세 번 탄핵됐어야 할 자다. 퇴진 운동은 여기서 멈추거나 조기 대선 준비로 휩쓸리기보다 고삐를 더 당겨야 한다.

지도자의 추락에 전전긍긍한 공범 새누리당은 물론이고 주류 야당들도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바랐던 것은 아니다. 주류 야당들은 즉각 퇴진이 압도적이었던 거리의 운동과 처음에 거리를 뒀다. 박근혜 ‘2선 후퇴’, ‘거국 내각 구성’ 따위로 거래하려 하면서 말이다. 그 뒤 운동에 발을 걸치며 박근혜 퇴진 당론을 정하고 탄핵소추 추진을 선언해 놓고도 새누리당 일부와 밀실 거래를 하는 등 기회주의적 처신을 거듭했다.

이런 틈새를 노려 지난 주 박근혜는 검찰 수사도, 자진 사임도 거부한다는 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즉각 퇴진" "구속 수사" 박근혜에 대한 노동계급 대중의 증오가 상징하는 것은 정경유착 특권층 사회와 불평등 구조에 대한 반감이다. ⓒ이미진

박근혜의 몸부림에 크게 한 방 먹인 것은 성난 민중이었다. 역대 최대 시위로 답했다. 주최 측 추산으로 전국 2백30만 명, 최초로 청와대 담벼락 1백 미터 앞까지 진격한 서울에서는 1백60만 명이 넘게 나왔다. 이날은 ‘단 하루도 꼴 보기 싫다’는 분노가 더 두드러졌다. 여전히 뻔뻔하게 버티는 박근혜의 모습에 민중은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강력한 거리 운동이 의회 정치인들로 하여금 자칫하다가는 자신들에게도 분노의 불길이 옮겨 붙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을 것이다. 사회 안정을 위해서라도 성난 여론을 국회 탄핵으로 제도권 안으로 수렴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는 여전히 버티고 있다.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 국무위원 간담회에서 그는 ‘헌재 심판에 담담히 대비하겠다’며 “정부가 추진해 온 국정과제만큼은 마지막까지 추진해 [달라]”고 밝혔다. 그리고는 민정수석 최재경의 사표를 수리하고 세월호특조위를 내파하려 한 조대환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아마 특검 수사와 헌재 탄핵심판 심리 대비일 텐데, 이미 박근혜는 변호사들을 선임해 그 준비를 시작했다. 검찰과 헌재 재판연구관 등 고위직 출신들로 알려져 있다. 총리 황교안도 2004년 고건 직무대행 당시의 자료를 검토하며 탄핵소추 가결 상황에 대비해 왔다.

황교안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면 청와대 비서진은 총리실로 출근하며 박근혜에게는 비공식적 보고를 계속할 것 같다. 박근혜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막판 뒤집기를 획책할 것이다. 황교안은 복지 축소와 민주적 권리 침해 등 온갖 개악에 앞장서 온 박근혜 ‘내각 원년 멤버’다. 노동개악, 각종 민영화 등 악행에 앞장선 장관들도 자리를 그대로 지킨다.

박근혜가 임명한 황교안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있고, 박근혜가 아직 대통령 권좌에 앉아 있는 것은 박근혜 퇴진 운동을 통해 사람들이 바꾸길 바라는 많은 적폐들이 청산되지 않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회에서 탄핵소추가 압도적으로 가결하게끔 만든 그 힘, 박근혜 즉각 퇴진 대중 투쟁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한다.

박근혜 내각 '원년 멤버' 황교안 이 자도 쫓아내야 한다.

4년 동안 누적된 반감과 저항이 박근혜를 코너로 몰다

여론조사는 변하는 사람들의 정서의 단면을 잘라 보는 것이고, 설문 문항의 구성에 따라 같은 시기에도 다른 답변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여론조사는 간접적으로, 서로 다른 조사들의 비교를 거쳐 시간 변화에 따른 추이 등을 봐야 한다.

이 점에서 최근 폭발적인 반박근혜 여론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물론 박근혜의 국정수행에 대한 지지도는 긍정 평가와 부정 평가를 동시에 봐야 한다.

이렇게 보면 반박근혜 여론이 갑자기 최순실 등 몇몇 폭로로만 폭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박근혜가 당선한 18대 대선에서 문재인이 얻은 1천5백만여 표는 비우파 후보가 얻은 최대치였다. 이는 인구 증가나 문재인의 인기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과거 반성 없는 독재자의 딸이 구 세력과 함께 돌아오는 것에 반감을 표한 반박근혜 투표였던 것이다. 박근혜의 초기 내각 구성이 대중의 반발 덕에 한 달 이상이나 걸린 것을 떠올려 보자.

이후 상황은 〈한국갤럽〉이 집권 1년차부터 조사한 추이를 바탕으로 살펴 보자.(다른 조사들도 추이가 대강 비슷하다.) 박근혜 국정 수행 긍정 평가는 대체로 낮을 때도 40퍼센트 수준에서 안정되게 유지돼 왔다. 그래서 콘크리트 지지율이란 말도 나왔다. 그러나 임기 첫해, 국회의 법안 통과율이 ‘0’에 가까웠음도 봐야 한다. 즉, 경제 위기 고통전가를 위한 박근혜의 악행이 본격화하지 못해서 지지율이 유지된 것이다.

철도 민영화를 본격화하려다가 이에 반대하는 철도노조 파업이 2013년 12월에 3주가량 진행되자 부정 평가도 30퍼센트를 넘기며 결집하기 시작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부정 평가가 40퍼센트 후반에서 50퍼센트 중반대를 유지해 왔다.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박근혜 정부의 무책임하고 냉소적인 대응 때문에 2014년 3분기 이후 지금까지 긍정 평가가 부정 평가를 앞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측근 부패의 실상이 알려지기 시작하고,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이 격한 반대 여론 속에서도 관철된 2015년 상반기에는 부정평가가 긍정평가를 당시까지 가장 큰 격차로 앞섰다. 그 때는 바로 민주노총이 한상균 팀 하에서 노동개악 반대 파업을 벌이며 저항을 재개한 때이기도 하다.

결국 온갖 반감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경제 실패도 확연해지자, 올해 총선에서 박근혜는 참패했다. 그 뒤로 정권의 불안정은 본격화됐다. 노동개악 반대 공공·금융 파업이 시작된 가을에 마침내 지지율이 30퍼센트 밑으로 떨어졌다. 정권이 가장 취약해진 순간, 그토록 꽁꽁 싸매왔던 해괴망측한 부패상이 줄줄이 폭로됐다. 부정 평가도 늘었다.

분수령

결국 10월 29일 박근혜 퇴진 집회가 시작됐다. 참가 규모는 주최 측 예상보다 거의 열 배나 됐고, 사람들은 너나 없이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청와대를 향해 종로, 광화문을 행진했다. 이 시위는 일종의 분수령이었고, 퇴진 운동이 커지는 속도만큼 박근혜 지지율은 급속히 추락했다.

11월 12일 민중총궐기 때, 사상 최대의 반박근혜 시위가 벌어진 뒤로 모든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지지율은 최저치로 떨어졌고 부정평가는 최대치로 올랐다. 결국, 파죽지세로 성장한 퇴진 운동이 청와대 1백 미터 앞까지 이르자, 박근혜는 온갖 몸부림도 소용 없이 대통령 직무를 정지당하는 탄핵소추 상태에 처하고 만 것이다.

이런 상황은 박근혜 퇴진 운동이 단지 몇몇 부패 추문 때문에 일어난 운동이 아님을 보여 준다.(물론 그런 추문은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박탈감을 한층 더 자극했다.) 운동 과정에서 새누리당 지지율이 폭락하고 주류 야당들과 그 당들의 대선주자들이 수혜자가 됐지만, 이 운동은 단지 야당으로의 정권 교체만을 위한 운동이 아닌 것이다.

박근혜 퇴진 운동의 중심에는 시작부터 좌파와 조직 노동자들이 있었다. 여기에 대부분 미조직 노동자들로 보이는 30~40대들이 가족과 함께 대거 참가했고, 청소년들의 참가도 비교적 초기부터 두드러졌다.

즉, 거리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반박근혜 여론이 강력하게 조성되고 있었고, 노동자 투쟁이 이 여론을 이끌고 있었으며, 퇴진 운동의 사회적 구성도 노동계급 중심의 민중인 것이다.

따라서 이 운동은 빈부격차와 불평등이 심화되는데도 대기업과 특권층의 이익을 더 중시하는 사회, 평범한 민중보다 강대국 지배자들과의 협력을 더 중시하는 정부, 무고한 아이들의 생명보다 대통령 개인의 심기 경호가 더 중시되는 정치 등에 대한 불만들이 결합한 것이다.

게다가 이 정부는 더러운 공작 정치를 일삼아 왔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방해와 모욕, 노동운동 와해 시도 등이 모두 정권의 공작과 관계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런 더러운 일들이 재벌과의 끈끈한 유착 속에서 이뤄졌음도 드러났다.

친특권층, 친기업, 반노동, 반민주, 반생명 정책들에 맞선 여러 투쟁과 경험 속에서 박근혜 정권에 대한 반감은 총체적 증오로 성장했다. 물론 권력자들과 기업 성장을 위해 노동자·민중을 옭아매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박정희 신화’에 대한 거부도 연관돼 있다.

그러나 대통령 박근혜와 그 체제는 아직은 죽지 않았다. 탄핵소추 가결 선포 후 “더 이상의 혼란은 없어야 한다”는 국회의장 정세균의 말과 달리, 거리의 민중은 할 일이 남아 있다. 파죽지세로 성장한 이 운동이 여기서 멈출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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