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쳐 보낼 수 없는 박근혜 –황교안의 적폐:
사적연금은 활성화하고 공적연금은 약화시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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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9일 보건복지부는 ‘제1차 노후준비지원 5개년 기본계획’을 확정했다. 그런데 이 ‘기본계획’에는 정작 노후준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소득지원 대책이 하나도 없다. 노후 자금부족액이 얼마인지는 알려 주지만(가칭 ‘초록 봉투 사업’), 그 자금을 지원하지는 않는다. 한 달에 20만 원가량 지급하는 기초연금도 아까워 일부에게만 지급하는 정부니, 실효성 있는 대책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듯하다.
그럼에도 노후 빈곤 문제는 지배자들에게도 근심거리인 것은 사실이다. 통계청·금융감독원·한국은행이 12월 20일 발표한 ‘2016년 가계금융·복지조사’를 보면, 전체 노인의 절반이 빈곤에 시달린다. 노후 준비가 ‘잘 된 가구’는 8.8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노후 빈곤은 그 자녀들에게 직접적인 부담이 되는 동시에 심각한 사회 문제로도 부각되고 있다. 한국의 노인 자살률은 OECD 1위이고 평균보다 다섯 곱절이나 높다. 생색내기 수준이라도 노후 ‘대책’을 내놓는 이유다.
다만 정부는 복지 부담을 최대한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려 한다. 자본주의 국가의 우선순위가 기업의 이윤 증대에 있기 때문이다. 재정 적자를 줄여야 한다며 공무원연금을 삭감하고 민영화를 추진하면서도, 정작 법인세 증세 등 기업 부담을 늘리는 세수 증대에는 반대하는 까닭이다. 법인세 부담이 제자리에 머문 것과는 대조적으로 노동자들의 세금 부담은 꾸준히 늘었다. GDP 대비 소득세 비중은 2009년 1.7퍼센트에서 2014년 2.48퍼센트로 무려 46퍼센트나 늘었다.
특히 압축적 경제 성장 속에서 시작된 우리 나라의 복지제도는 소득 보장보다는 자본 축적에 유리하게 설계됐고, 노동자들의 부담은 큰 반면 혜택은 미미하다. 연금은 물론 의료·산재·실업 급여도 정부가 책임지고 세금으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로 보험료를 거둬 운영하는 ‘사회보험’ 방식이다. 우리 나라 기업주들의 사회보장기여금 비중은 OECD 나라들 중 가장 낮다.
기초연금도 ‘먹튀’하고, 공무원연금 등 공적연금도 삭감한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노후 대책이란 게 바로 사적연금 활성화 대책이다. 박근혜 정부는 2014년 8월 ‘사적연금 활성화’ 대책을 내놓은 뒤 퇴직연금을 의무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퇴직연금은 기존에 받던 퇴직금을 연금처럼 나눠 받도록 한 제도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물론 기업주들도 이 정책을 외면하고 있다. 먼저 퇴직연금에 가입한 노동자들이 대부분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받아 간다. 퇴직연금은 그 운용과 지급을 민간 금융회사가 맡고 있는데, 국민연금처럼 죽을 때까지 주는 것도 아니고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지도 않으므로 불안한 것이다. 은행이나 보험사가 파산할 경우 대책이 없고 갈수록 실질연금액도 줄어든다. 2014년 상반기에는 퇴직연금 수급자 중 97.1퍼센트가 일시금 수령을 선택했는데, 대책 발표 2년 뒤인 2016년 6월에는 이보다 늘어난 98.4퍼센트가 일시금 수령을 선택했다.
퇴직연금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한 기업 비율도 2년 동안 15.4퍼센트에서 16.8퍼센트로 1.4퍼센트포인트 느는 데 그쳤다. 퇴직연금 보험료를 부담해야 하는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이 반기지도 않는 제도를 ‘의무화’할 경우 따르게 될 각종 규제 때문에 시큰둥한 반응이다.
운용 수익을 기대하던 금융사들도 실적이 낮아 볼멘 소리를 하고 있다. 그나마 비과세 혜택을 늘려야 가입률이 오를 텐데 정부의 노동자 증세 정책 때문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애당초 퇴직연금은 기업 내에 적립하던 퇴직금을 금융사들이 운용해 ‘파이를 키우겠다’는 발상에 기초한 것이다. 그리되면 노동자들도 퇴직금보다 많은 돈을 연금으로 받을 수 있고 금융사들도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경제 전체의 이윤율이 떨어지고 침체가 장기화하는 상황에서는 이런 생각이 실현되기 어렵다. 지난 10여 년 동안 퇴직연금 운용 수익률은 물가인상률보다도 낮았다. 오히려 노동자들이 퇴직금으로 금융사들을 먹여 살리는 꼴이었다.
금융사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험연구원은 12월 3일 보고서를 발표해 “공적연금을 낮추는 과정에서 사적연금 활성화 전략을 추진”하라고 주문했다. 보고서는 고령화가 빨라지며 이제 공적연금으로 노후를 보장하려는 방식은 효과적이지 않고, 한국의 공적연금의 규모와 소득대체율이 OECD 평균 수준에 이르렀으니 사적연금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사적연금을 키우려는 시도는 결국 노동자들의 노후를 희생시켜 금융사의 이윤을 보장하는 것 이상이 되기 어렵다. 금융사들의 이윤도 보장하고 최소한의 연금도 보장하려면 보험료를 대폭 인상해야 할 텐데 이는 보험료를 부담해야 하는 기업주들이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 혹은 임금 삭감으로 또다시 노동자들에 부담을 떠넘기려 할 것이다.
한국의 공적연금이 OECD 평균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조차 사실이 아니다. 한국 정부가 OECD에 보고하는 수치는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퇴직 전 소득에 대한 연금의 비율)을 합산한 총표준소득대체율인데 제도상으로는 50퍼센트다. 이는 OECD 국가의 공적연금 평균소득대체율(41.3퍼센트)보다도 높다.
그러나 2014년 12월 한국의 실질대체율은 25.6퍼센트밖에 안 된다. 고용 불안정과 광범한 사각지대 때문이다. 2060년이 되도 평균 납입 기간은 21.3년이어서 실질소득대체율은 26.9퍼센트에 머물 전망이다. 2010년 EU 27개국의 평균 ‘실질대체율’은 48퍼센트인데, 이조차 지난 수십 년 동안 주요 선진국 정부들이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연금 삭감 정책으로 크게 낮아진 것이다.
공적연금의 소득대체율을 끌어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2016년 10월 말 기준으로 올해 연금을 모두 지급하고도 적립돼 있는 기금이 5백46조 원이나 된다. 노인 6백만 명에게 앞으로 5년 동안 매달 1백50만 원씩 지급하기에 충분한 액수다.(박근혜 정부는 이재용이 삼성그룹을 상속받을 수 있게 도우려고 이 돈을 썼고, 이 과정에서 국민연금 기금 수천억 원이 날아갔다.) 기업주들의 세금을 인상하고 사회보험료를 인상하고, 고용기간을 늘리면 이보다 더 ‘지속 가능’해진다.
출산율 저하 등 고령화 때문에 연금의 ‘지속 가능성’이 의심받기도 하지만 고령화는 결코 자연 현상처럼 불가피한 게 아니다. 노후·양육 부담이 줄어들고 대중의 삶이 나아지면 고령화 추세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정부가 발표하는 고령화 예측은 자본가들의 우려를 반영하느라 실제보다 과장된 측면이 있다. 예컨대 국민연금을 대폭 삭감했던 2006년 통계청은 2050년 무렵 인구가 4천2백30만 명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2011년에는 4천8백10만 명, 2016년에는 4천9백30만 명으로 줄 거라고 달리 예측했다. 그동안 출산율이 크게 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엇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세계 인구 전체를 부양하고도 남는 부를 생산하고 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가진 한국이 노인들과 아이들을 부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엄살일 뿐이다. 평생 부를 생산하느라 혹사당한 노동자들의 노후를 정부가 온전히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