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 보유 선언 - 쩔쩔매는 미국의 처지를 드러내다
〈노동자 연대〉 구독
북한의 핵 보유 선언 - 쩔쩔매는 미국의 처지를 드러내다
김하영 《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책벌레)의 저자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발표 자체는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북한이 2002년부터 여러 차례 핵무기 보유를 암시해 온 터라, 나처럼 그 전부터 북한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을 주장해 온 사람이 아니라도 꽤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이 소식에 면역돼 있었다.
나는 시민·사회운동 진영이 특히 주목하고 있지 않은 중요한 관전 포인트를 하나 제시하고 싶다. 사실, 이 점이 북한 핵무기 보유 발언의 파장 중에서 가장 재미있고 가장 고소한 대목이다.
그것은 “유일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이 얼마나 무참히 체면을 잃고 있고, 얼마나 처참히 위신 실추를 맛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미국의 초강대국 이미지에 비춰보면 적어도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선언에 불호령을 내리고, 경제적 제재를 가하고, 심지어 군사 위협도 할 법했다. 부시 재선 직후 시민·민중운동 진영을 휩쓴 과장된 한반도 위기설에 비춰보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와 정반대로 백악관은 “오래 전부터 들어온 레토릭(수사)”일 뿐이라며 “위기는 없다”고 오히려 사태를 축소하려 들었다.
미국 제국주의의 힘을 막강하게 그리려는 언론들 덕분에 미국의 군색한 처지는 ‘북한의 책략에 놀아나지 않으려는 의도되고 계산된 고도의 무시 전략’인 양 포장됐다. 하지만 이 얄팍한 솜씨를 한꺼풀만 들춰내면 우리는 궁지에 몰린 고양이 톰처럼 쩔쩔매는 미국 지배자들과 마주치게 된다.
핵무기가 없다고 이라크가 말했을 때 거짓말 말라며 융단 폭격을 퍼부었던 국방장관 럼스펠드는 지금 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고 미국의 핵확산금지 정책에 정면 대들고 있는데도 도리어 “북한이 핵을 가졌는지 안 가졌는지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때 그때 달라요” 하는 코미디 대사처럼 이제 미국의 대량살상무기 ‘응징’ 정책은 누구의 눈에도 원칙도 대의도 없어 보인다. 이것은 최근 북한과 이란 핵 문제의 대조에서 다시 한번 선명하게 드러났다.
국무장관 라이스는 “이란 핵 문제가 북한 핵보유 선언보다 더 큰 위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핵무기를 만들지 않았다”며 평화적 핵 이용을 주장하는 이란에 대해서는 위협을 퍼붓고,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호전적’으로 선언한 북한에 대해서는 대화를 촉구하는 미국의 어처구니없는 모순을 지켜보고 있다.
물론 미국은 자신의 체면을 사정없이 구겨놓은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 북한에 폭격이라도 쏟아붓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라크 점령과 (이란을 포함한) 중동 질서의 재편을 위한 개입만으로도 힘이 부친 터라 북한에 대해 군사적 개입을 확대할 수 없는 처지다. 정확히 말해, 부시 정부 1기 4년 내내, 특히 이라크 침공 이래 이런 상황이었다.
시민·사회운동 단체들은 북한의 핵 보유 선언이 무력 사용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대북 위협, 날로 증대하는 전쟁 위협이 낳은 결과라는 데 대체로 입을 모은다.
하지만 북한이 핵 보유 선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현 시점에서 미국이 북한에 대해 전쟁 등 무력 수단을 동원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북한이 매우 잘 알고 있”(리둔추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기 때문이었다.
북한 외무성 성명이 발표된 다음 날인 2월 11일 〈노동신문〉 논평에서도 이런 인식이 얼핏 엿보인다. “미국이 큰소리를 치면서 으르렁대지만 공화국의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한치의 땅도 다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중동에 발이 묶인 미국의 취약한 처지를 이용해 핵 보유 선언을 함으로써 시간끌기만 하는 미국의 대북 협상 태도에 압박을 가하고 북미간 대화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든 그것은 미국과 북한이라는 두 국가간 세력 관계에 의해서만 결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의 핵 보유 선언 전후 과정이 보여 준 것처럼 전 세계에 대한 미국 제국주의의 지배력은 주로 이라크와 중동에서 결판날 것이다.
북한의 핵 보유를 어떻게 볼 것인가
북한의 핵무장을 지지할 수는 없다. 북한은 지금 아주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미국의 위협이 북한의 핵무장을 부추겨 왔음도 알아야 한다. 미국은 세계 최대 전략전술핵 보유국이고, 핵무기를 실전에서 사용한 적이 있는 유일한 국가이며,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 핵무기 사용을 위협해 왔다.
브루스 커밍스는 지난해 12월 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동북아시아 공군력과 핵전략이 북한의 국가안보전략 수립에서 핵심적 요소로 작용해 왔다고 지적했다.
또, 최근에 〈뉴욕 타임스〉는 “미국 과학자들이 차세대 핵무기 디자인 개발에 착수해 탄두를 개발하고 있다”고 폭로하며 “중소 규모 나라들이 스스로 핵무기를 만들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려도 놀랄 게 없다”고 미국의 위선을 꼬집은 바 있다.
참여연대처럼 북한과 미국을 똑같은 강도로 비난(양비론)하는 것은 핵무기 1만 개나 1개나 똑같이 위험하다는 식의 추상적 접근이다.
한편, 통일운동 단체들은 대체로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은 당연한 대응”(통일연대)이라며 북한에 대한 무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핵무기 보유를 통해 제국주의로부터 평화와 체제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소련은 핵무기를 수천 기나 가지고 있었지만 무기 경쟁이 오히려 소련 붕괴를 재촉했고 수많은 민중을 궁핍 속에 밀어넣었다.
더구나 핵무기는 다른 나라의 평범한 노동자·민중을 위협한다. 서로 다른 나라의 노동자·민중을 겨냥하고 있는 핵탄두가 아니라 전 세계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통해서만 제국주의를 패배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