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통치 ─ “미국이나 소련의 감독은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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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올해는 ‘해방 60주년’이 되는 해다. 그 동안 한국 현대사에 대한 해석은 미국과 소련에 대한 태도, 남한 정권 지지인가 북한 정권 지지인가 하는 점을 기준으로 나뉘어 왔다. 이것은 서로 거울 이미지일 뿐이다. 이런 역사관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분노, 저항이 부차적이거나 왜곡된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바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입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다함께〉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쟁점들을 연재할 계획이다. 이번이 그 세번째다.
1945년 12월 미국·영국·소련이 모스크바에서 회담한 결과는 조선인들에게는 날벼락과 같은 소식이었다. 즉각적인 독립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조선인들에게 외국의 간섭을 최소 5년 동안 더 받아야 한다는 것은 충격과 분노로 다가왔다. 박명림의 지적처럼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계기로서의 해방의 순간은” 한국인들에게 “너무 빨리 종식되었던 것이다.”
신탁통치안은 식민지에 대한 미국의 전통적인 정책이었다. 커밍스에 따르면 이것의 “진수는 전후의 미국 안전 보장에 부응하고, 식민지들을 미국의 통상 및 후견으로 개방하고, 공산주의 및 반식민지 혁명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신탁통치는 세계경제에 중요할지도 모르는 한국의 자원을 어느 한 나라가 독점하는 것을 방지할 것이다.”(미 국무성 영토소위원회 보튼의 메모)
소련은 신탁통치보다는 한국의 즉각적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했지만, 모스크바 회담에서는 미국과 타협했다.
이런 타협에 대해 윌리엄 스톡은 “(당시 회담에서) 미·소 양국이 동구·일본·중국 문제와 핵 문제와 같은 핵심 쟁점에 치우쳐 있어서 한국 문제와 같은 주변적인 문제로 모험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소련에게 극동에서 보다 중요한 안건은 일본 문제였고, 소련은 미국의 양보를 얻어 일본 점령에 참여할 수 있는 보장을 얻어냈다. 그리고 미국의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대한 소련의 수용은 이에 대한 유화 제스처였다.
모스크바 회담에서 한국에 대한 결정문은 문제의 해결이라기보다는 분할 점령의 현상유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결정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회담이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스탈린주의자들이나 민족주의적인 포퓰리스트들, 그리고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모스크바 결정이 “미·소 두 강대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 통일 독립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이라고 강변한다.
예를 들어 박세길 씨는 그의 책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에서 모스크바 결정이 “임시정부를 통하여 조선 민중의 주권 행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미국과 소련의 합의가 없으면 한국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할 수가 없다. 최종 결정권자는 미국과 소련으로 명시돼 있다. 비록 한국인과 협의하고 중국과 영국의 심사에 부친다는 언급이 있지만, 신탁협정문안의 작성이나 결정 등 최종 결정권은 미국과 소련에게 있다.
이런 의미에서 소련이 한국의 독립을 고려했으며 한국인의 참여를 보장했다는 스탈린주의자들의 선전은 자기기만이다.
다음으로, 분할 점령 상태가 미국과 소련의 협상에 의해 해소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몽상적 현실론’이다.
먼저, 미국과 소련은 삼상회담의 결정과 무관하게, 혹은 그 이전부터 점령지에 자신의 체제를 강화시키고 있었다. 애초 분할 점령의 목적 자체가 한국의 통일된 독립 국가 수립이 아니라 자국에 우호적인 체제를 심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소 간의 협상에 의존하는 전략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았다.
소련은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모스크바 회담에서의 결정이 있자마자 1월 2일 북한에 토지 개혁을 위한 토지 조사 사업을 지령했다. 그리고 1946년 2월 8일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었다. 조선민주청년동맹과 여성동맹의 2월 9일자 전단에서는 “인민의 정권 북조선인민위원회 성립 만세!”,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우리의 정부”라고 축하하고 있다. 이미 분단된 정권은 만들어지고 있었다.
남한에서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커밍스가 “단독정부 수립 과정이 남한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었을 만큼, 이 과정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과 북에서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미 군정은 남한의 경제를 ‘자유시장주의’에 맞게 개편하려 했다. 게다가 랭던의 보고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은 여차하면 신탁통치안을 버리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할 구상도 가지고 있었다. 남한 정권의 맹아로 볼 수 있는 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도 만들어졌다. 민주의원이 한 일이라곤 삼일절을 국경일로 만든 것과 차량통행을 좌에서 우로 바꾼 것 정도이지만, 이승만은 자신을 “새 정부의 지도자”로 자처하며 막대한 정치자금을 끌어 모았다.
게다가 미·소공위가 열려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할 시점인 1946년 3월이면 이미 냉전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정부 수립을 둘러싸고 미·소 간의 타협의 여지는 거의 없었다.
박세길 씨는 당시 반탁 운동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극단적인 날조 행위와 함께 이승만, 김성수 등 일단의 친일파들은 미 군정의 보호와 지원 아래, 있지도 않은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허울을 쓰고 실질적으로는 모스크바 협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작했다.”
물론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우익 계열의 신문은 모스크바 회담에 대해 “소련은 신탁통치,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운운하며 악의적인 왜곡 보도를 한 것이 사실이다. 미 군정도 신탁통치에 대한 대중적 분노가 자신에게 맞춰질 것을 두려워해 이런 왜곡을 방조했다.
하지만 반탁 운동에 참여한 민중들이 왜곡 보도에 부화뇌동한 것처럼 묘사하는 평가는 매우 일면적이다.
여운형을 존경한 미 군정 관리 리차드 로빈슨이 “어떠한 해명도 온 나라를 휩쓸고 있는 저항의 천둥소리를 잠재울 수 없었다”고 말했듯이, 신탁통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발은 자생적이고 즉각적이었다.
김규식 계열의 강원용 목사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반탁운동은 누가 계획하고 주도해서 일어난 게 절대 아닙니다. 좌도 없고 우도 없고 완전히 자연발생적이었습니다.”
공산당원이었던 고준석의 증언도 대체로 비슷하다. “서울의 거리에는 ‘신탁통치 반대’, ‘탁치반대’ 등의 슬로건을 내건 군중의 데모가 자연발생적으로 벌어졌고, 그 참가 인원은 점점 더 불어났다. 군중의 얼굴은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히려 가장 큰 문제는 좌파의 오류였다. 모스크바 결정이 알려졌을 때 공산당은 혼란과 마비에 빠져 있었다. “소련의 스탈린 동지가 지도한 삼상회의 결정이 조선 민중의 이익에 반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최대 일간지였던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는 삼상회담 결과를 아예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좌파는 “태도 결정을 늦게 하면 봉기한 민중으로부터 고립된다”는 위기 의식으로 부랴부랴 12월 30일 별도로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를 조직해 신탁통치 철폐 요구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행동지침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초기 반탁 정국의 주도권을 우익이 가져갈 수 있었다.
설령 당시 우익 언론들이 왜곡을 자행했다 해도 좌파가 분명한 반탁 입장을 가지고 있고 미국과 소련 점령군 모두로부터 독립적이었더라면 왜곡 보도 자체가 커다란 파급력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언론은 좌익 계열이 우세했다. 예를 들어 해방 초기 좌익 계열의 신문은 하루 발행 부수를 기준으로 22만 3백 부였지만, 우익은 14만 4천 부에 그쳤다. 1945년 10월 23일에 작성된 미 군정의 보고서에서도 “대부분의 신문 경향은 분명히 좌로 기울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고준석의 말대로 “이 시점에서 한국 민중의 감정은 미국인이든 소련인이든 간에 한국의 독립을 간섭하지 말라는 생각이 압도적이었다”는 점이다.
재앙적으로 공산당은 1월 3일 “모스크바 삼상회담 지지”로 입장을 바꾸었다. 이것은 우익들이 반탁 논리를 반소·반공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에 결정적 힘을 줬다.
그리고 좌파는 대중적 정서로부터 고립됐다. 서중석의 지적처럼 반탁운동의 논리였던 반소·반공은 “갖가지 방법으로 좌파를 공격하는 여의봉 같은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우익들의 반탁 운동은 위선적이게도 “자주독립”을 뜻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민중들의 반탁정서에 올라타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이용했고 분단 정권 수립에 활용했다.
친일파의 집결지인 한민당은 반탁 운동을 반소·반공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통해 기적적으로 회생했다. 이들의 반탁은 위선 그 자체다. 왜냐하면, 애초에 이들은 미국의 후견을 지지했었기 때문이다. 미 군정의 베닝호프는 1945년 10월 10일 서신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나라가 후견 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으며, 자신들은 소련의 지도를 받는 것보다 미국의 후견을 바란다고 진술한 바 있다.”
박명림이 적절하게 지적하듯이 “이승만의 반탁은 그가 식민 시기 동안의 독립운동 시에 탁치와 유사한 위임통치를 주장해 왔다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탁치 자체에 대한 반대라기 보다는 소련의 한국 문제 개입에 대한 반대, 즉 반소·반공 관점에서의 반대였다.”
“이승만의 반탁이 반공과 연결된 것이었다면 김구의 반탁은 임정의 헤게모니 장악과 직결된 것이었다. 즉, 그것은 임정 추대 운동이었다 … 당시의 자료들이 말하는 바를 따를 때 김구는 임정 법통을 인정받았다면 탁치 결사 반대를 거둬들였을 것이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진행되는 동안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신의 반대파를 본격적으로 탄압했다. 북한에서 조만식은 연금당했고, 남한에서도 미 군정은 좌파를 마녀사냥했다.
남한에서 공산당은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나서야 뒤늦은 “정당방위의 역공세”로 나서 미 군정에 저항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미·소 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요구하는 것을 뛰어넘지 못했다. 좌파는 1947년 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무산될 때까지도 여전히 미·소 간의 협상에 의존하는 전략을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분단이 최종 확정되고 나서야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격렬한 저항을 벌였지만, 제주도 4.3의 재앙을 남기며 붕괴했다.
‘모스크바 삼상회담으로 표현되는 국제 질서의 규정력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비관론은 사실 그림의 한쪽 면만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그림과 가능성도 동시에 존재한 것이 사실이다. 다음에는 이 문제를 다루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