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더러운 잠〉 논란:
패러디이고, 그 맥락을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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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잠〉을 둘러싼 논란이 뜨거웠다. 평범한 여성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눈곱만큼도 관심 없던 새누리당 여성 의원들이 여성 해방의 전사라도 된 양 표 의원을 비난하고 나선 것은 정말 역겨운 일이었다. 논란이 지속되는 와중에 민주당은 표창원 의원을 징계했다.
〈더러운 잠〉 논란은 박근혜와 우파 세력이 반격을 개시하는 맥락 속에서 불거졌다. 〈노동자 연대〉 신문 195-1호는 박근혜와 우파 세력이 이런 시도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말의 탄핵 기각 가능성을 붙잡으려 함과 동시에, 탄핵되더라도 특검과 헌재 판결의 정당성을 인정 않고 정치적으로 불복해 지지층을 결집시켜 장차 우파의 재기를 위한 발판을 놓으려 [한다.]”(‘다시 거리로 – 박근혜·황교안 둘 다 물러나라’)
그래서 박근혜는 헌재 대리인단 사퇴설을 흘리며 탄핵 지연 작전을 펴 왔고, 언론과 검찰을 내놓고 비난하며 모든 사태를 정치적 음모로 몰아 왔다. “죽을 죄를 지었다”던 최순실도 태도를 180도 바꿔 특검을 공개 비난했다. 법원이 이재용과 전 이대 총장 최경희 구속영장을 기각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을 모욕한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표창원 의원에 대한 공격은 이런 우파적 반격의 연장선 상에 있었다. 박근혜 세력이 애초에 그림을 그린 사람이 아닌 표 의원과 문재인을 우선 겨눈 것은 이들의 정치적 목적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박근혜 일당의 제거를 원하지만 체제 안정과 세력균형의 회복을 원하는 지배자들도 여기에 힘을 보탰다. 조중동 같은 우파 언론들이 그들을 대변하면서 앞장섰다. 특히, 퇴진 운동 내부를 이간질한 것이다.
이처럼 〈더러운 잠〉 논란이 박근혜 세력의 의도된 정치적 공격이었음에도, 민주당은 결국 표 의원에 대한 징계(당직 정지 6개월)를 결정했다. 유력한 대선 주자로 떠오를수록 극도로 몸을 사리고 있는 문재인은 표 의원을 향해 “품격과 절제”를 운운했다. 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표창원 네 마누라도 벗겨 주마” 하며 극성을 피운 새누리당 여성 의원들에게나 쏘아 줘야 할 말이었다.
민주당 지도자들은 반격을 노리는 박근혜 세력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도마뱀 꼬리 자르기’식으로 대응해 오히려 우파의 기를 살려 준 것이다. 이로써 표 의원 공격은, 박근혜 세력이 꺼내든 여러 반격 카드 중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카드가 된 듯하다.
〈더러운 잠〉이 여성차별적인가
새누리당 여성 의원들은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을 운운하며 ‘세월호 7시간’을 은폐하려 해 왔다. 그러더니 이번에도 박근혜가 “여성 대통령”이라는 점을 앞세웠다.
그런데 여성 운동과 좌파 진영 내에도,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의 이런 행태가 위선적이라고 여기면서도, 〈더러운 잠〉 자체는 여성 비하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박근혜를 나체로 묘사한 것이 “성적 대상화”일 뿐 아니라, “여성(성)”을 부각함으로써 여성 전체를 비하했다는 것이다.
여성의 몸을 눈요깃거리로 만드는 성적 대상화가 사회에 만연한 게 사실이다. 그리고 부패한 권력자의 문제를 ‘여성’의 약점으로 돌리는 오해나 곡해가 운동 안에서도 가끔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현상에 정당한 반감을 가진 사람들 중 일부가 이 그림도 이런 잘못들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더러운 잠〉은 “미술 교과서에도 나오는” 마네의 〈올랭피아〉(1863)와 지오르지오네의 〈잠자는 비너스〉(1502)에 박근혜와 최순실의 얼굴을 넣어 패러디한 것이다. 시중 드는 최순실의 모습은 〈올랭피아〉에서, 자고 있는 박근혜의 모습은 〈잠자는 비너스〉에서 따 왔다.
그리고 맥락을 봐야 한다. 권력자를 조롱하는 것인가, 평범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인가를 분별해야 한다. 물론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지 않아 작품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더러운 잠〉은 메시지가 매우 직접적이고 단순하게 표현돼 있어서 해석의 여지가 크지 않다. 그 그림 자체가 박근혜 정권의 부패와 그에 대한 항의라는 정치적 맥락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술인 블랙리스트 정책에 대한 항의 성격도 있다. 그러므로 그림이 세상에 나오게 된 맥락을 간과한 채 해석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고 부당하다.
나체화라는 형식이 아니라 그림을 낳은 정치·사회적 맥락, 나체 그림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그러면, 〈더러운 잠〉은 여성으로서의 박근혜가 아니라 세월호 구조에 무관심했던 ‘권력자로서의 박근혜’를 유명 그림에 빗댄 패러디일 뿐이다.(여기서 예술적 성취도는 쟁점이 아니다.). 또한 여러 장치들을 통해, 최순실과의 관계, 독재 정권의 그늘, 사드 배치 등 박근혜 정부 전체를 풍자하고자 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그림을 그린 이구영 작가도 “이 그림의 핵심은 금기에 대한 도전이며 권력자들의 추한 ‘민낯’을 드러낸다는 ‘누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2월 10일 이구영 작가는 “‘여성 혐오’ 논란에 대한 항의 표시이기도 하다”며 박근혜를 검은색으로 표현한 〈더러운 잠 2탄〉 그림을 발표했다.)
민족미술인협회도 이 그림이 “’세월호 7시간’ 참사 당일, 구조를 못한 통수권자로서의 무능을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했다.
한편, 앉은 자세로 관객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는 〈올랭피아〉의 여성이 아니라 비너스를 사용한 점을 근거로, “수동적 여성의 모습을 재현”해 차별적이라는 주장도 뜬금없다. 세월호 침몰 시간에 알고도 사생활이나 즐기고 있던 박근혜를 비유적으로 풍자하고자 했던 것인데, 박근혜를 ‘능동적 행위자’로 그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결국 이 다양한 맥락이 제거된 채, 모욕당한 ‘여성’ 박근혜와 ‘여성’을 모욕한 ‘남성’ 작가·’남성’ 의원만이 부각되는 것은, 맥락 없이 모든 것에 ‘젠더 프레임’부터 적용하는 여성 운동 일각의 환원론을 돌아봐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차별에 반대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모든 것을 ‘젠더 프레임’으로 보면 얄궂게도 이번처럼 가장 여성차별적인 우파에 속아 넘어가는 길로 빠질 수 있는 것이다.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그림과 표 의원이 아니라 위선적이기 짝이 없는 박근혜와 그 일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