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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을 초월한 정희진 씨의 〈더러운 잠〉 감상법

최근 정희진 씨는 〈더러운 잠〉 그림이 여성에 대한 폭력의 전형이라고 주장했다(〈경향신문〉 2월 19일치). 박근혜를 비판하는 데 여성의 벗은 몸을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나체는 남성에게 “쾌락”일 뿐이라고 한다. 〈더러운 잠〉은 남성의 여성 지배 역사의 반복이며, 결국 보수든 진보든 남성은 폭력의 주체라고도 한다.

이는 부패하고 오만한 정권에 대한 항의라는 정치적 맥락을 추상한 채 그 그림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 그림은 세월호 7시간 당시 구조에는 무관심한 채 사생활이나 즐겼을 부패한 권력자를 명화에 빗대어 풍자하고 있다. 박근혜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므로 여성의 몸이 사용된 것일 뿐, 작가가 전하고 한 메시지는 박근혜라는 이기적이고 무감각한 권력자를 조롱하는 것이지 ‘여성’의 몸이 아니다.(본지 196호 ‘계속되는 〈더러운 잠〉 논란 - 패러디이고, 그 맥락을 봐야 한다’를 보시오.)

정희진 씨는 〈더러운 잠〉의 원작인 〈올랭피아〉 패러디가 매우 흔하다는 점도 놓치고 있다. 한 미술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올랭피아는 모든 서양미술사 책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명화가 되었고, 현대미술을 태동시킨 중요 작품으로 인정된 지 오래다. 그리고 올랭피아를 통한 풍자와 패러디는 흔해 빠졌다. 더러운 잠과 같은 유형의 작품은 전 세계에서 무수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을 두고 성폭력, 여성혐오, 국격을 훼손한 작품이라는 등의 궤변으로 폄하하는 이들의 미술에 대한 인식에 놀랐[다.]”(〈경향신문〉,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흔하디 흔한 <올랭피아> 패러디 박근혜가 여자라는 이유로 누드 풍자에 제한을 둬야 할 이유는 없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

무엇보다, 박근혜의 나체 묘사에서 “쾌락”이나 욕망을 느끼는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박근혜 반대자들에게는 박근혜에 대한 역겨움을 더한층 느끼게끔 하고, 박사모와 같은 자들에게는 커다란 분노와 모욕감을 줘, 감정적 양극화를 의도한 것이 작가의 모티브였을 법하다.

요컨대 나체 묘사나 성적 코드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됐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가령, 같은 나체 합성 그림이어도 표창원 의원의 아내를 합성한 그림은 그저 저질의 인격모독일 뿐이다. 여성 연예인의 나체 합성 사진도 관음증을 이용해 돈을 벌거나 아니면 모욕을 주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런 것들과 〈더러운 잠〉은 형식만 같지, 그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정희진 씨는 그림을 둘러싼 구체적인 사회·정치적 맥락을 보지 않은 채 그저 ‘남 대 녀’의 문제로 환원한다. 그러나 박정희의 압제에 맞서 여성 노동자들이 싸운 이유가 박정희가 남성이어서가 아니고, 박근혜를 옥죄여 들여가는 특검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이유가 남성성에 있지 않듯이, 노동자·민중이 박근혜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가 여성이어서가 아니다. “연약한 여성” 따위 운운하며 박근혜의 ‘여성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새누리당 여성 의원들과 박사모이지, 평범한 여성들이 아니다.

남녀 대립 구도로 환원해서 세상을 보면, 현실을 왜곡하기가 쉽다. 미국의 대외 정책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던 2002년 미선이·효순이 촛불 시위에서 나온 “fucking USA”(퍼킹 유에스에이) 구호가 “미국 여성을 강간하자”는 의미였다는 정희진 씨의 주장은 억지스럽게 꿰맞추려는 주장이다. 그 경우에 ‘fucking’은 ‘damn’ 등과 동의어로, ‘고약한’, ‘빌어먹을’, ‘망할 놈의’ 등을 뜻할 뿐이다.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는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려면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차별에 맞서 분투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맥락 없이 모든 문제를 남녀 대립 구도로 환원하는 접근법은 지양해야 한다.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분리주의적 환원론이 다수 여성의 삶을 악화시켜 온 박근혜 정부와 우파들에게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적 보수주의 문제는 없는가?

정희진 씨는 “남성에게 여성의 나체는 쾌락”이라면서 나체 묘사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고 말한다. 이 사회는 가부장제 사회이므로 여성의 몸은 남성을 위한 쾌락의 도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에 성적 대상화가 만연해 있고, 이에 분노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나체 묘사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이런 주장은 성적 보수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이런 사고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여성의 나체를 묘사한 것은 악행이 된다. 그러나 성 문제에 대한 부르주아 사회의 위선을 고려하면, 성적 보수주의는 남성들보다 오히려 여성들에게 해롭다. 여성의 성적 욕망과 주체성이 더 쉽게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비혼모나 이혼 여성, 그 자녀들에 대한 낙인을 떠올려 보라. 성적 보수주의가 지배적일 때 ‘순결’은 여성이 지켜야 할 최고의 덕목이 되고, 심지어 여성이 상대방에게 먼저 구애하는 일조차 비난거리가 된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도리어 ‘정조를 잃은 여성’이라고 비난받는다. 일본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 전쟁 범죄의 피해자인데도 수십 년간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던 것은 가장 비극적인 사례다.

배우 김민희와 영화감독 홍상수의 관계를 대하는 주류 사회의 태도에서 보듯이, 유부남과 젊은 미혼 여성의 연인관계가 드러났을 때도 더 많이 비난받는 쪽은 여성이다.(정희진 씨가 이 관계를 비난했던 것이 우연일까?)

한편, 성적 보수주의는 결혼과 이성애에 기초한 관계만을 ‘정상’으로 여기게 해, 성소수자들이 자신을 긍정하고 드러내기도 어렵게 만든다.

여성 몸의 상품화와 대상화에 대한 반감이 성적 코드 자체가 차별을 낳는다는 오해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성에 대한 개방적 토론과 표현은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이다. 문제는 성 해방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열망을 이윤 논리로 왜곡한 자본주의 체제이다. 정희진 씨는 지배자들의 부패와 탐욕, 위선과 거짓말에 대한 남녀 민중의 혐오와 증오를 올바른 과녁으로 돌리도록 도와 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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