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산재사망자 추모의 날을 맞아, 한국의 노동현실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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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두 청춘의 죽음
“우리 아이를 확인하라고 해서 들어갔는데... 시체가 누워 있었다. 20년을 키운 어미가 그 아들을 알아볼 수가 없다. 저 처참한 모습이 우리 아들이 아니다. 길을 가다가 뒤통수만 봐도 알아볼 수 있는 아이인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 수가 없다... 시체가 절대 우리가 아이가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믿고 싶은데, 짙은 눈썹과 옷가지가 있는데. 그날 입고 나간 옷이 맞다. 어느 부모가 아이를 잃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 아이가 죽는 날 나도 죽었다.”(구의역에서 사망한 김 씨 어머니의 기자회견문 중에서)
2016년 5월 28일 김 씨는 쫓기는 작업시간을 맞추기 위해,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려고 만든 스크린도어 안으로 자신의 생명을 밀어넣었다. 19살 어린 나이였지만, 사발면으로 끼니를 떼우면서 1백40만 원 남짓 월급에서 1백만 원을 적금에 붓던 성실한 청년이었다. “우리 나라는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 대접받고 살 수 있다”는 담임선생님의 말을 귀담아 듣고, 대학등록금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얼마 후 전주 LG유플러스 협력회사 콜센터 현장실습생이었던 홍 씨는 일한 지 5개월 만에 저수지에 몸을 던졌다.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 사회에 첫발을 미리 딛은 그가 맡은 업무는 욕을 들어가며 고객들의 계약해지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성과 측정 방식으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일한 부서의 명칭은 ‘SAVE’였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목숨은 ‘SAVE’하지 못했다. 홍 씨가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버텼던 이유 역시 돈을 벌어 야간대학에 가기 위해서였다.
두 사건은 우리에게 야간 고등학교라도 가고 싶어 구로의 온도계 공장에 취직해 수은중독으로 15살에 사망한 문송면 군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가 1988년이었다. 이처럼 3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회에서 “사람대접 받는” 학력이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바뀌었을 뿐, 자본과 국가가 노동자를 대하는 방식은 크게 변한 게 없다.
은폐된 산재가 산재해 있는 노동현장
한국은 10년 넘게 OECD 회원국 중 독보적인 산재사망률 1위를 지키고 있다. 하루에 5~6명씩, 매년 2천 명 가까운 노동자가 사망한다. 2016년 공식 통계로만 1천7백77명이 사망했다. 출근하고 집에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김 씨, 홍 씨와 같은 노동자가 매일 5명씩 생긴단 얘기다.(사실 홍 씨처럼 ‘자살’로 처리된 경우는 산재로 인정받기 어렵다. 실제 그는 회사로부터 1백만 원의 위로금밖에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고용노동부 발표 자료에 근거한 얘기다. 사망까지 이른 경우는 억울해서라도 산재 신청을 하지만, 일반 재해를 입은 노동자가 산재 신청을 하기란 쉽지 않다. 실제 업무상 사고 또는 직업성 손상률만 보면 OECD 평균의 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즉, 직장에서 발생한 사고의 비율은 OECD 평균보다 훨씬 낮은데, 일하다 사망한 사람의 비율은 1위인 불가사의한 일이 매년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오죽하면 국회입법조사처에서조차 "우리 나라는 OECD 국가 중 산재 사망 1위 국가이지만, 전체 산업재해 발생률은 OECD 국가 평균 이하인 기이한 통계를 갖고 있다"며 "이는 산업 재해의 80퍼센트 이상이 은폐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죽어라 일하다, 진짜 죽어야 그나마 산재신청이라도 해 볼 수 있단 얘기다.
다니엘 블레이크가 부러운 한국의 노동자들
“나는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주인공 다니엘이 죽기 전 남긴 메모 속 문장이다. 그러나 한국 노동자들은 죽기 전에 제대로 된 숫자나 점으로라도 남기 어렵다. 다니엘은 거절당하긴 했지만 질병급여(업무상 질병 외 일반적인 질병 및 부상으로 치료를 받는 동안 상실되는 소득 또는 임금을 현금수당으로 보전해 주는 급여)를 신청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한국은 그 질병급여조차 없다.
2016년 한국에서 벌어진, 〈다니엘 블레이크〉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를 소개할까 한다. 2015년 3월 광주광역시 남영전구 공장 철거 작업에 노동자 수십 명이 투입됐다. 이들은 어떠한 안전교육도 듣지 못했고 기본적인 안전장비도 지급받지 못했다. 어떤 노동자는 그곳에 굴러다니던 난생처음 보는 “은색 덩어리가 예뻐 보여 맨손으로” 구슬 모양을 만들기까지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기력, 오심, 구토, 두드러기 등 그들의 몸에는 원인 모를 증상들이 나타났고, 하나둘 현장을 떠났다. 그들은 각자 병원을 전전한 뒤에야 자신들이 수은에 중독됐음을 알았다.
일용노동자 박 씨도 바로 그중 한 명이었다. 2015년 3월 단 5일 작업하고 무기력증과 두통으로 일어설 수 없었다. 수개월 시름시름 앓던 박 씨는 2015년 10월 언론에 난 남영전구 기사를 보고 스스로 병원을 찾아가 검사를 받았다. 역시 수은중독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한 달 뒤인 2015년 11월 산재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박 씨에게 주어진 “혜택”은 딱 1년치였다. 근로복지공단은 재해발생일인 2015년 3월31일부터 2016년 3월까지만 ‘근로능력상실’을 인정했다. 박 씨에게 주어진 것은 총 2천2백만 원의 휴업급여였다. 2016년 3월 이후부터 9월까지는 한 달에 두 번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가는 날에만 휴업급여가 10만 5천 원씩 지급됐다. 수은중독으로 인한 후유증이 지속됐지만, 공단은 더는 인정하지 않았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결혼 준비도 해야 했던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박 씨가 받은 산재기록은 오히려 일자리를 구하는 데 걸림돌이 됐다. 결국 홀어머니와 결혼할 사람을 두고 경상도로 넘어갔다. 그렇게 어렵게 구한 일자리는 바로 구미 스타케미칼 공장의 철거 작업이었다. 5일 만에 그만둔 남영전구와는 달리 홀어머니와 결혼할 사람을 생각하며 몇 개월을 버텼다. 그러나 이번에는 영영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2016년 10월 19일 스타케미칼 공장에서 발생한 폭발사고로 그는 싸늘한 주검이 돼 가족 품에 안겼다.
촛불 이후의 과제
박근혜 정부는 ‘국정농단’ 세력과 재벌들을 위해 온갖 제도를 바꾸고 수많은 예산을 편성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재벌들은 미르-K스포츠 재단에만 8백억 원을 바쳤다. 삼성은 정유라의 승마지원금으로만 지원금 2백20억 원을 약속했다. 현재 삼성전자 반도체, LCD 공장에서 일하다 암과 같은 질병에 걸려 반올림에 제보한 사람만 2백24명이다. 이중 76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들 중 삼성 측이 1백20명을 설득해 산재신청 대신 보상금으로 합의를 했다. 그런데 이 보상금을 다 합쳐 봤자 정유라의 승마지원금에도 못 미친다.
박근혜 정권을 끌어내린 1천7백만 촛불에는 분명 한국 사회의 이러한 모순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이 촛불 덕에 판 벌린 유력 대선 후보들의 행보는 어떠한가? 노동자들의 생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가진 후보가 있는가? 벌써부터 우클릭하고 있는 진보인 양하는 후보들의 행보가 볼썽사납다. 노동자들의 생존 문제보다 중요한 정치 문제는 없다. 대선에서 누가 되든, 우리는 다니엘의 담벼락 선언보다 절절한 김 씨 어머니의 절규에 대한 답을 얻어내야 한다.
“우리 아이를 기르면서 책임감 있고 반듯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둘째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책임감 있고 반듯하게 키우지 않겠다. 책임자 지시를 잘 따르면 개죽음만 남는다. 산산조각난 아이에게 죄를 다 뒤집어 씌웠다. 둘째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첫째를 그렇게 키운 게 미칠 듯이, 미칠 듯이 후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