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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를 옹호하는 변호론들

문재인의 초기 조처들은 전혀 흡족하지 않다. 이 점에서, 정의당이나 노동당이 문재인 정부의 일부 개혁 조처들을 지지하는 듯한 대변인 논평을 내놓은 것은 유감스럽다.

“문재인은 취임 초기부터 … 속 시원한 개혁 추진을 보여주고 있다”(‘문재인 정부에서 진보진영과 노동운동의 역할’ 〈미디어 오늘〉 5월 15일치)는 주장도 피상적이기 짝이 없다. 이 기사의 필자인 전지윤은 “[좌파가] 인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착각하지 마라. 이것은 기뻐할 일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옳지도 현명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좌파의 반응을 앞질러 비판한다. 그조차 반가운 노동자들의 어려운 처지에 공감한다는 이유로, 그런 처지를 악용해 기만하는 조처들을 환영하라고 말하는 게 좌파가 할 일인가? 이런 훈계는 비정규직에 공감하는 면보다는 오히려 문재인 지지자들에게 아첨하는 것으로 들린다.

실제로 전지윤은 이렇게 주장한다. “민주당은 이미 지난해 연말 여론조사에서 촛불 참가자들의 가장 큰 지지를 받고 있었고, … [촛불] 대열 속에서 수많은 민주당 깃발과 지지자들을 볼 수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렇게 문재인의 당선과 그의 개혁을 촛불의 연속으로 치장하려 한다. 그러나 현실을 왜곡해 가며 아부하기보다는 현실을 정직하게 보고 말하기를 택해야 한다.

촛불 초기에 민주당은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기는커녕 박근혜와의 뒷거래를 계속 시도했고, 국회 탄핵 추진 선언 뒤에도 좌고우면했다. 그래서 광장에서 민주당은 별 인기가 없었다. 박근혜 지지율이 추락하며 차기 정권의 대안으로 민주당 지지율이 올랐을 때도 문재인 지지율은 따라 오르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아래서 야당 구실을 제대로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박근혜 퇴진 염원에도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 광화문광장에만 1백90만 명이 모인 12월 3일, 곳곳의 자유발언에서 중고등학생들조차 민주당을 규탄했고, 큰 환호를 받았다. 이때만 해도 민주당은 촛불집회에 와도 청계천에서 집회를 하고 광화문광장 복판에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12월 하순경, 국회 탄핵과 철도 파업 중단 등으로 민주당의 헤게모니가 부분 회복되고 촛불의 기세가 초기보다 누그러지면서 문재인의 지지율이 1위로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권 교체가 촛불의 (부차적) 성과이기도 하지만, 문재인 당선을 촛불 염원의 온전한 구현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이유다. 민주당은 당시에 지배계급 다수의 여론이 박근혜를 포기하기를 기다린 것이고, 그 대체재로 자기가 부상하도록 태도를 조율한 것이다.(그러므로 그의 내각은 어정쩡한 협치 내각이 될 공산이 크다.) 이런 현실을 보지 않는 것은 전지윤이 기회주의적으로 온건 개혁파 다수에게 아첨하려 하기 때문이다.

적반하장

박근혜 퇴진 촛불 운동 덕분에 집권한 문재인 정부가 개혁(적폐 청산) 염원을 만족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오히려 친문(친노) 인사들이 더 잘 아는 듯하다. 유시민은 대선 직전 이렇게 말했다. “제가 정의당 평당원이기는 하지만, 범진보 정부의 어용 지식인이 되려 한다.”(당내 지도적 정치인의 이런 발언에 정의당 내부에서 징계 요구가 나오기는커녕 비판조차 눈에 안 띄는 게 유감이다.)

유시민은 노무현 정부 때 대중의 경험을 왜곡해 어용 지식인론을 정당화했다. “[선거 때] 편들어 줬던 여러 세력들이 … 10개의 사안에서 9개를 지지하더라도 1개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것 있으면 다 때린다 … 그 악몽이 또 되풀이 되면 거의 99% 망한다 … 참여정부에 있을 때, 또 여당에 있을 때 제일 힘들었던 것은 … 객관적으로 [평가]해 주는 지식인·언론인이 너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노무현 정부가 마치 진보·좌파와 노동운동의 무리한 비판 때문에 부당하게 곤경에 처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노무현 정부 말기부터 등장해 유시민·문재인 등이 자신들의 저서 등에서 반복한 주장이다. 좌파와 노동운동의 정부 비판과 행동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의도에서 개발된 적반하장 논리다.

노무현 정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도 최근 자기 저서에서, 마치 노무현이 모종의 좌우 합작으로 왕따를 당했다는 듯이 얘기한다. 그러나 그 근거를 그의 책에서 찾기는 힘들다. 노무현 비판이 나쁘고 노무현은 억울하다는 억지만 반복할 뿐이다. 가령 노무현 정부의 비정규직 악법 입법에 대한 비판에 조기숙은 (어떤 반박 근거도 없이) 이렇게 대꾸한다. “참여정부에서 통과시킨 건 ‘비정규직법’이 아니라 ‘비정규직보호법’[이다!]”

그 법으로 고통받은 노동자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단 말인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행태이다.

이런 변호론자들의 결론은 문재인이 왕따 처지에 놓이지 않도록 보위하자는 것이다. 앞뒤 안 가리고 일체의 비판으로부터 문재인 정부를 옹호하는 것이 노무현이 강조한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의 임무라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 전지윤이 아첨하고자 하는 대상은 이런 세력일 텐데, 아마도 그가 일체의 비판적 언급을 포기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친노 인사들의 억지와 달리, 노무현 정부가 집권 초에 겪은 곤경과 불안정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초기만 살펴보겠다.

탄핵 역풍으로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여당이 됐지만, 고(故) 김선일 씨 참사는 총선 후 지지층의 부푼 개혁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었다

노무현 정부가 처음 곤경을 겪은 것은 ‘김대중 정부의 대북송금’ 특검 때문이었다. 한나라당과 우파는 현대그룹의 비자금 일부가 북한으로 간 것을 찾아내어, 이를 김대중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고 보낸 돈이라며 주장하고 특검을 요구했다. 남북 화해 기조에 흠집을 내고 여권 내 분열을 노린 것이다.

신당 창당에 몰입하던 노무현이 이 요구를 수용해, 취임 직후 3월에 대북송금 특검을 실시하면서 당시 여권 내부가 첨예한 갈등에 빠졌다. 이 특검으로 권노갑과 박지원 등 DJ계 실세들이 구속됐다. 또한 김대중의 업적이 훼손된 것 때문에 전통적 야권 지지층에도 균열이 생겼다. 이 갈등은 결국 그 해 말, 노무현을 지지한 여권 내 신주류가 탈당해 열린우리당을 만들고, 잔류 민주당이 이듬해 초 한나라당과 함께 노무현 탄핵을 시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노무현이 추진한 대북송금 특검을 옹호하는 친노 인사들은 진보 언론들이 너무 결벽적이어서 오히려 개혁 정부의 운신의 폭을 좁게 만들고 궁지로 내몬다고 비판하는 것이 자가당착임을 알아야 한다.

노무현 정부는 아래로부터의 무리한 요구나 반발이 아니라 정국 주도권을 두고 여권 내 권력 투쟁을 벌이다가 시작부터 일이 꼬여 버린 것이다. 이 갈등은 지금 민주당과 국민의당의 대결로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당시 열린우리당으로 가지 않고 민주당에 남았던 이낙연을 문재인이 총리로 지명한 것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조처로 보인다.

지지층과의 충돌도 노무현 정부가 먼저 자초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 부시 정부의 이라크 침략 전쟁을 전쟁 개시 당일(3월 20일)에 지지하고 파병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비판적이고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한 노무현을 지지하던 많은 청년 지지자들이 실망한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당시 파병 반대 집회를 주도한 진보 단체들은 노무현을 규탄하기보다는, 장외 반대 집회가 노무현 정부의 파병 거부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다는 주장을 많이 폈다. 노무현이 미국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파병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파병 반대 운동 연합체에서는 노무현 비판이나 퇴진 구호를 하지 말라는 압력이 컸다. 그러니 부끄러운 얘기이지만, 진보·좌파가 노무현 정부를 초기부터 무리하게 비판하고 궁지에 몰았다는 것은 진실과 다른 얘기다.

노무현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던 전북 부안군에 핵폐기장을 설치하려고 저지른 폭력도 충격이었다. 핵 폐기장에 반대하는 주민 여론을 무시하고 민주당 소속 군수가 정부 방침에 따라 핵 폐기장 유치를 신청했다. 마치 성주군의 사드 배치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시위를 벌이자, 인구 2만 5천 명의 부안읍에 전경 8천 명을 투입해 준계엄 상태를 만들었다.

노무현 정부는 이도 모자라 부안의 저항을 핑계로 ‘폭력 시위’를 막을 집시법 개악을 주문해 한나라당과의 공조로 통과시켰다. 핵심 내용은 소음 규제 등 경찰의 집회 개입 권한을 늘린 것이었다. 여권 분열로 여당이 국회에서 더 소수로 전락하던 때였다. 임기 첫해 의석이 소수라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는 것이 핑계임을 보여 준 사례이자, 형식적인 민주적 권리를 늘리는 것에조차 진지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 사례였다.

추가 파병도 이어졌다. 예를 들어, 이듬해인 2004년 탄핵 역풍으로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의석을 얻고 지지층을 다시 결속시킨 듯한 때에도 노무현은 또다시 파병으로 지지층을 분노케 했다.

당시 청년 김선일 씨가 이라크 무장단체에게 납치되는 일이 생겼다. 납치 단체는 한국군 철수를 공개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김선일 씨를 처형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협상을 시도하기는커녕 파병 철회는 “테러에 굴복하는 것”이라며 철군을 거부하고 오히려 추가 파병 방침을 확정 발표해 결국 김선일 씨가 죽도록 만들었다. 당시 김선일 씨의 무사 귀환과 한국군 철군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는 평일 저녁에도 수천 명이 모였다.

거듭된 뒤통수치기

노동운동은 어땠을까? 2003년 상반기에 꽤 인상적인 투쟁을 벌인 노동자들은 화물연대, 조흥은행, 철도 노동자들이었다. 각각 노동자성 인정과 처우 개선, 구조조정을 동반한 강제 합병 반대, 철도 민영화 반대 등을 요구했다. 그들의 요구 자체는 방어적 성격이었고 고용 등 생존권 문제에 가까운 요구였다.

노무현 정부는 5월 화물연대 파업의 요구를 들어 줬다. 문재인은 자서전에서 그때 정부가 양보했는데도 노동자들이 2차 파업에 나선 것은 심한 처사였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정부의 양보로 화물 노동자들이 파업을 끝냈는데, 정부가 뒤통수를 치고 약속을 번복했다는 것이 진실이다. 오히려 탄압이 집중됐고 화물연대의 2차 파업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미리 대비한 정부는 혹독한 탄압으로 답했다. 화물연대 지도부는 조합원들의 바람과 다르게 파업을 일방으로 철회해 버렸다.

정부는 5월 조흥은행 파업에도 양보했지만, 파업이 끝난 이후 노조 집행부를 집중 탄압했고, 결국 합의안과 달리 조흥은행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후퇴되는 식으로 은행이 합병돼 버렸다.

철도노조의 6월 파업 때도 정부는 노동자들이 집결한 연세대에 대규모 경찰 병력을 투입했다. 강제 해산을 당했지만, 직장에 복귀하기는 거부하고 있던 철도노조 조합원들에게 복귀를 명령한 건 노조 지도부였다. 수천 명이 징계를 받았고, 정부는 노조에 손배 가압류를 걸었다.

2003년 상반기 투쟁들이 정부의 배신과 탄압 속에서 사그라지면서, 분위기가 돌변했다. 기대가 컸던 탓에 배신감도 커서 노무현 정부의 1년차 하반기는 노동자들의 자살 정국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항의의 형식으로 (분신) 자살을 택하는 것은 절망의 표현이다. 가령 박근혜 당선 직후 노동자들의 연쇄 자살이 안타깝게도 그런 사례다. 당시 한 노동자는 이명박 5년도 힘들었는데, 또다시 박근혜 5년을 버틸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배부른 노동자들이 이기적으로 정부를 곤혹스럽게 해서 개혁 동력을 약화시켰다는 것은 천인공노할 왜곡이다.

2003년 10월 노무현 개인과 연계가 컸던 한진중공업노조의 김주익 지회장은 파업 중 정부가 보인 태도와 사측의 손배 가압류에 절망해 자결했다. 이를 보며 괴로워한 같은 작업장의 곽재규 조합원도 투신 자살했다. 그 하루 뒤에는 근로복지공단의 비정규직 이용석 조합원이 서울 종묘공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대회를 앞두고 분신 자살했다. 세 명의 죽음이 모두 10월 한 달에 일어났다. 그리고 11월 17일 세원테크의 이해남 조합원도 정부와 사측의 탄압에 절망해 분신 자살했다.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과 곽재규 조합원

당시 노무현은 “이제는 죽음으로 싸우는 시기는 끝났다”며 냉소했다. 오히려 “노동귀족론”을 꺼내 들어 노동운동을 이간질하고 정규직 노조를 고립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용석 열사에 이어 2004년 2월에도 현대중공업 비정규직 박일수 열사가 자살했다.

학생들의 개인 정보를 빼돌리려 한 네이스 계획에 반대한 전교조의 투쟁도 정당했다. 다 막아 내진 못했지만, 연가 투쟁까지 불사한 투쟁으로 정부의 계획을 약화시켰다. 친노 인사들은 정보 인권을 지키려 했던 이 운동도 비난한다.

역대 가장 민주적인 정부라던 노무현 정부가 기본권인 파업권을 인정하지 않고, 학생들의 정보 인권을 무시한 것에 반대한 것이, 배부른 노동자들이 이기적으로 정부를 괴롭힌 일인가?

지속 불가능

선거 때는 “반미면 어떠냐?”,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던 노무현 정부가 정권의 안정을 위해 지배계급 주류와 손을 잡고 자본주의 국가의 수장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려고 취한 조처들이야말로 환멸과 분노를 낳았다. 노무현 정부 때 구속된 노동자들은 1천 명이 넘는다. 김영삼이나 김대중 정부 때보다 많은 수치다.

그러나 당시 조직 노동운동 상층 지도자들은 노조 운동과 오래 연계를 맺었던 노무현 정부에 기대를 갖고 사회적 합의로 친노동 개혁을 얻어 내려고 했는데, 그런 헛수고가 현장 노동자들의 전투성을 희석시켰다.

이런 온건함과 소심함 때문에 투쟁을 건설할 시간을 놓쳐 2004년부터 추진된 비정규직법 개악을 사실상 막지 못했다. 그 개악으로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들이 양산됐고, 그것이 2007년 7월 이랜드·뉴코아 파업의 배경이 됐다.

썩어빠진 박근혜 정부를 퇴진시키고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뒤를 이은 노무현 정부에 견줘 당장에는 유리한 면이 많다. 당연한 일만 실행해도 개혁적 조처로 보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상징적 제스처만으로 감격해 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노무현 정부 첫해의 경험은 개혁을 표방하는 민주당 정부가 결코 노동자의 벗이 아님을 보여 줬다. 언론에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라고 광고하면서, 정작 비정규직 당사자들에게는 기업 부담 운운하며 기다리라거나 고통 분담을 요구하는 것에서 이미 그 조짐을 볼 수 있다.

정권 초기에 친노 인사들뿐 아니라, 착시 효과로 인한 정부의 초기 인기에 편승해 노동자, 청년들의 절실한 요구를 삭감하는 쪽으로 유도하려는 기회주의적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 좌파는 이에 대항해 대중의 개혁 염원을 진정으로 대변하며 계급 정치를 굳건히 추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