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가이드라인:
‘최소 비용’ 방침에 따른 처우 개선 미흡, 대상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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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가 지난달 20일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이하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데 이어, 오는 9월에는 종합적인 로드맵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각 기관별로 비정규직 규모와 정책 대상, 소요 예산 등을 책정하기 위한 실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정부가 “노사협의를 통한 추진”을 약속한 만큼 해당 부문 노조들도 대체로 기대를 갖고 뛰어드는 모양새다.
그러나 가이드라인은 적잖은 반발도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다. 정규직화에서 제외된 기간제 교사와 비정규직 강사들이 항의에 나섰고, 내년에 가서야 실태 조사 대상이 되는 지자체 청소 노동자들이 ‘연내 정규직화’를 요구했다. 공항공사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자회사가 아니라 직접고용 정규직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심지어 일부 지자체에서는 계약해지도 잇따르고 있다. 박근혜 정부 초기에 ‘공공부문 비정규직 무기계약직화’ 정책 시행을 앞두고 벌어진 줄 이은 해고 사태가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가이드라인은 노동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물론 파견·용역 등 간접고용을 정책 대상에 포함시키는 등 박근혜 정부 시절보다 나아진 측면이 있지만, 그것이 너무 꾀죄죄한 수준이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을 해결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비정규직 제로시대?
우선, 가이드라인은 정부의 “비정규직 제로시대” 선언이 무색하게도 비정규직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정책이 아니다. 가이드라인에 이름 붙여진 ‘정규직 전환’이라는 말과 달리, 무기계약직화나 자회사 고용처럼 상대적으로 ‘고용이 안정된 비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전향적”으로 내놓았다는 무기계약직의 처우 개선도 보잘것없는 수준이다. 무기계약직이라는 표현이 어감이 좋지 않으니 “공무직”, “상담직” 등으로 명칭을 바꾸기, 복리 후생에서의 일부 차별을 시정하기 등.
둘째, 정부는 무기계약직화 대상조차 예외를 둬서, 학교 비정규직인 기간제 교사나 강사들, 공공기관의 자회사에 고용된 비정규직을 제외해 버렸다. 기간제 교사가 4만 7천여 명으로 전체 교원의 10퍼센트나 된다는 점을 볼 때, 예외 대상자들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다. 영어회화전문강사, 스포츠강사 등도 수천 명에 이른다. (이들이 즉각 반발하자, 교육부는 ‘정규직 전환 심의 위원회’에서 기간제 교사들과 강사들이 정규직 전환 대상이 되는지 심의하겠다고 했다.)
게다가 정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규모를 31만 명(정규직의 16.9퍼센트)라고 규정했는데, 이는 기존의 무기계약직 노동자들과 수많은 민간위탁 노동자들이 빠진 수치다.
무엇보다 예외 규정은 노동자들 사이에 갈등과 반목을 키우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교총과 우파 학부모 단체가 학교비정규직 교·강사의 정규직화에 반대한다고 날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올바른 비판을 제기해야 할 전교조 집행부가 교원 임용 체계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며 비정규직 교·강사의 정규직화 요구를 지지하지 않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전교조 활동가들은 과거에 그 자신들도 반대했던 임용고시를 물신화해서는 안 된다. 임용고시 합격증이 계급의 단결보다 우선할 수 없다. 비정규직 교·강사의 정규직화는 교육의 공공성과 결코 떨어져 있는 문제가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단결을 추구해 나갈 때, 교육 노동자들의 임금·노동조건을 지키고 경쟁 심화 정책에 맞서는 데도 효과적일 것이다.
셋째, 가이드라인은 “정규직의 연대와 협조”를 촉구한다는 점에서도 고약하다. 문재인 정부가 말하는 “연대”는 정규직 노동자들도 임금·조건을 양보하라는 뜻이다. 정부는 민주노총 등의 반발을 의식해 초안에 들어간 “양보”를 “연대”로 표현만 바꿨을 뿐이다.
이는 양질의 일자리를 대폭 늘려야 할 정부와 사용자들의 부담을 덜려고 엉뚱한 데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다. 정부는 부자·기업주들을 향해서는 “국민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비정규직 정책이) 과도한 비용 증가로 연결되지 않도록” 하겠다면서, 정작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양보를 압박했다. 정부가 최근 직무성과급제 도입을 제기하고 나선 것, 금속·공공·보건노조 지도자들의 연대기금 제안을 환영하고 나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독일 ‘유연안전성’ 모델의 실체
문재인 정부의 정책 입안자들이 추구하는 방향은 ‘유연안정성’ 모델과 맞닿아 있다. 즉, 고용을 보장하되 임금·노동조건은 유연화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유연안정성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독일을 보면, 그것은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 모두에게 해로운 결과만 낳았다. 임금체계 개악과 임금 양보 등으로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이 크게 낮아졌고, 비정규직이 줄기는커녕 크게 늘어났다. 예컨대, 2004년에 파견법이 개악된 이후 한동안 파견 노동자 규모는 매년 두 자릿수 이상 증가세를 보였다. 이것이 한국 지배자들에게 어찌나 매력적이었던지, 현대차 불법파견 문제를 다투는 재판에서 사측은 바로 그 사례를 들먹이며 ‘한국도 합법 파견을 더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정책이 관철될 수 있었던 것은 독일 사민당 정부가 신자유주의를 적극 수용하고, 노조 지도자들이 그 사민당 정부와의 사회적 합의에 매달려 ‘노동자들도 고통을 감수하자’면서 거듭 타협한 결과다. 그리고 이런 타협은 노동조합의 투쟁 기능을 약화시켰다. 노조 지도자들이 임금 삭감을 수용하고 비정규직 확대에 문을 열어 주면서 노동자들 사이에서 회의감이 커진 것이다. 지난 십수 년간 독일, 네덜란드 등에서 노조 조직률이 빠르게 하락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노동자들끼리 나눔을 추구하기보다, 정부와 사용자들에게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대폭 투자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노동운동은 문재인 비정규직 정책의 약점을 폭로하며 아래로부터 투쟁 건설에 강조점을 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