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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인민민주주의 개혁’의 본질

[편집자 주] 올해는 ‘해방 60주년’이 되는 해다. 그 동안 한국 현대사에 대한 해석은 미국과 소련에 대한 태도, 남한 정권 지지인가 북한 정권 지지인가 하는 점을 기준으로 나뉘어 왔다. 이것은 서로 거울 이미지일 뿐이다. 이런 역사관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분노, 저항이 부차적이거나 왜곡된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바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입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다함께>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쟁점들을 연재할 계획이다. 이번이 그 여섯번째다.

많은 좌파들이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개혁이 소련의 간섭과는 무관하고 북한 민중의 요구에 부합하는 진보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변화가 농민들의 투쟁 수준에 따라 결정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국제정세의 변화, 즉 소련의 이해관계라는 측면이 더 큰 규정력을 갖고 있었다.

해방되자마자 북한에서도 농민조직들이 급속하게 조직됐다. 공산주의자들은 농민들의 오랜 바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해방 직후의 공산주의자들과 농민들의 자생적 토지개혁 요구는 매우 급진적이었다. 예를 들어 함경도에서는 “토지문제에 있어서 친일파, 민족반역자”뿐만 아니라 “기타 인민민주주의 수립에 협력할 수 있는 지주 등을 가리지 않고” 모든 토착 지주의 토지 몰수와 소작료 폐지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조선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권력의 수립’을 지시한 후 급진적 토지개혁 요구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9월 25일 공산당 평안남도당 확대위원회에서 채택된 〈정치노선에 관하야〉에서는 과거의 ‘오류’를 비판하면서 “대지주의 토지의 제한 몰수란 것을 취소”했다.

소련은 농민의 토지개혁 요구를 통제했는데, 당시 소련은 전후 세력권 분할을 둘러싸고 미국과 ‘협상’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1945년 11월 들어서는 이런 기조가 바뀐다. 소련주둔군 민정관 로마넨코는 11월 30일 북한 지역에서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토지개혁안을 본국에 제출했다.

이것은 모스크바 삼상회담의 결과를 염두에 둔 것인데, 신탁통치안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경우 자신이 통제하고 있는 지역에서라도 친소적인 정권의 기반을 닦아야 한다는 점을 의식한 것이다. 랭던이 추진했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안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 점은 1945년 12월 25일 소련군 최고사령부 대장 쉬킨이 소련 외무인민위원부 부위원장 로조프스키에 보고한 〈조회 ― 북조선에서의 정치정세에 대한 보고〉에도 반영돼 있다.

여기서 그는 “한국에서 (소련)군대철수 후에도 국가 이익을 보장해 줄 항구적인 경제적·정치적 지위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고 불안감을 나타내며, “대지주의 토지지배가 현존하고 있음은 인민민주주의 투쟁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 하고 말하고 있다.

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보국이 1946년 1월 1일자로 발간한 《공보》에 수록된 〈일본 항복 후 조선의 상황〉에서는 이미 “한국에는 두 점령지역에 사실상 두 개의 제도가 정해졌”다며 변화될 상황을 암시했다.

1946년 3월에 실시된 토지개혁은 이런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다. 북한에서는 5정보 이상의 면적을 기준으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이 시행됐다.

북한 전역에서 몰수한 토지 면적은 총 1백만 8천1백78정보로 북한 토지 면적의 약 55.4퍼센트에 해당했다.

그러나 많은 관찰자들이 지적하듯이, 북한의 토지개혁은 ‘계급 투쟁 없는’, ‘평화로운 혁명’이었다. 이럴 수 있었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애초 북한이 남한보다 지주의 세력이 약했다. 몰수한 토지를 분석한 결과는 북한에 대지주보다는 영세지주가 압도적으로 많았음을 보여 준다.

소련군의 존재는 지주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적 반대파를 물리적으로 억누르는 효과를 냈다.

게다가 지주들에게는 월남한다는 대안이 있었고, 소련과 북한 정부는 이들의 남하를 의도적으로 조장했다. 박명림은 이런 태도를 ‘반혁명 수출전략’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농민들의 토지개혁 청원운동이 있기는 했지만, 이것은 공산당이 위로부터 조직한 것이었다. 상당수의 농민들이 토지개혁을 지지했지만, 개혁의 주체는 소련군과 북조선공산당이었다.

북한의 토지개혁이 1949년에 시행된 남한의 그것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했는지도 논란거리다.

북한의 토지개혁 결과 대지주의 물적 기반이 붕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남한 역시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방식을 통해 기생적 지주층을 소멸시키고 있었다. 이 점에서 토지개혁은 진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반자본주의적 맥락이 아니라, 바로 급속한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만들 토대를 놓았다는 점에서 말이다.

또한 북한의 농민들은 수확량의 25퍼센트를 현물세로 부담해야 했다. 현물세는 실제 수확량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수확예상량을 기준으로 한 ‘평뜨기’ 방식이었기 때문에 징수량을 과다하게 책정할 수 있었다.

여기에 각종 잡세를 포함하면 적어도 수확량의 30퍼센트 정도를 세금으로 납부해야 했다. 이것은 남한 농민들의 세부담과 별 차이가 없는 규모였다.

게다가 북한에서는 자작 농지에 대한 상한제가 적용되지 않았는데, 따라서 3정보를 상한선으로 하는 남한의 토지개혁보다 오히려 부농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컸다.

주요산업에 대한 국유화 조치는 토지개혁보다 늦은 1946년 8월에 시행됐다. 당시 공업부문 자산의 90퍼센트를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고, 특히 주요 기간산업은 거의 일본인 소유였다.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이들은 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산업의 국유화는 토지개혁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 조치는 토지개혁보다 늦게 실시됐다. 왜냐하면 소련은 북한에 있던 주요 산업시설들을 “적의 재산”으로 규정했고, 대일본 전쟁의 배상물로 여겼다. 소련은 주요산업 설비들을 반출했고 재가동된 공장의 생산물들을 가져가야 했기 때문에, 주요 산업시설을 임시인민위원회로 이양하는 것과 국유화를 늦춘 것이다.

사실 당시 북한의 국유화 조치 자체가 급진적인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는 김구의 한국독립당 강령도 “토지의 국유화”와 “중요 산업시설의 국유화”를 말하고 있었다. 당시 좌익과 우익을 막론하고 급속한 자본축적을 위해 상당 부분의 국유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상식으로 통하고 있었다.

국유화 과정은 노동자들의 통제력을 제거하는 방향에서 취해졌다. 노동자들의 자주적 행동은 체계적으로 부정됐다. 김일성은 노동자들의 자주관리를 억압한 후에도 계속해서 노동자들이 “동맹파업 비슷한 것을 조직”해 “임금향상을 강요”한다고 비난했다.

전평은 직업동맹(직맹)으로 재편됐다. 직맹은 노동자들의 자주적 조직과는 거리가 멀었다. 직맹의 강령은 “로동규율과 국가법률의 준수, 실천에 모범이 되어 … 건국증산운동을 계획적으로 수행할 것을 임무로 한다.”

그러나 북한 노동자들은 일제 하에서 강력한 노동운동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 등 다른 부문에 비해 통제가 쉬운 편이 아니었다. 실제로 북한 전평을 서울 중앙과 분리하는 것이나 국가기구로 재편하는 것은 다른 대중조직들보다 늦어졌다.

북한 정권과 노동자들의 적대는 폭발하지는 않았지만 잠재해 있었다. 예를 들어 북조선노동당 2차 당 대회에서 당 선전부장 박창옥은 직업동맹 간부들이 단체계약을 체결할 때 잘못을 범하고 있다며 “일부 락후한 로동자들의 꼬리를 따라서 … 운영 측에 대하여 쓸데없는 간섭과 과중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노동규율에 대한 저항도 존재했다. 예를 들어 황해제철소의 경우, 1949년 8월 공장에 들어간 노동자는 7백 명인데, 주택이나 식사조건 미비로 불과 2∼3일 안에 4백 명이 공장을 떠났다. 이런 현상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방어할 수 있는 조직이 없는 상황에서 흔히 취하는 ‘저항’의 일종이다.

과거 일제시대 때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당의 지도적 지위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됐다. 이들을 대신해 생산에 많은 실적을 올린 ‘모범노동자’가 그 자리를 메웠다. 게다가 이미 북로당 2차 당 대회의 대표들은 소위 카드르(관료)에 해당하는 층이 50퍼센트를 넘어서고 있다.

북한 인민민주주의 개혁의 성격은 김두봉이 〈건국사상총동원운동과 그 대상〉에서 진술한 것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북조선인민은 가혹한 유혈적 투쟁이 없이 붉은 군대의 방조로 말미암아” 해방됐고, “불과 1년 동안에” 여러 민주개혁이 거대한 “성과를 달성”했기 때문에 이러한 성과의 의의를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노동자들이 이런 ‘성과’를 인식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들의 자주적 행동은 철저히 분쇄됐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국가 주도의 자본축적을 강제하는 당 관료들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인민민주주의의 ‘부르주아적 성격’에 대해 강조하던 김일성은 인민위원회 정권형태에 대해 “낡은 부르죠아 사회의 소위 의회민주주주의 정권형태가 아니라”며 “인민민주주의는 곧 프롤레타리아 독재 형태”라고 말을 바꾸었다. 김일성의 말 한마디에 북한은 졸지에 ‘사회주의 사회’가 된 것이다.

인민민주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전환’은 사실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가 강화된 것을 뜻했다. 크리스 하먼이 지적하듯이, “냉전 체제의 격화된 경쟁이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축적을 위한 자원을 획득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 이후 북한 정권은 농민에게 분배한 토지를 다시 빼앗았고(강제집산화), 노동자들에 대한 처벌과 강제를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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