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①:
1917년 - 노동자들이 천지를 뒤흔들었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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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낳았다. 본지는 올 한 해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한 기사를 꾸준히 번역 연재하려고 한다.
그 시작으로 세계를 변화시킨 1917년 한 해를 살펴본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제1차세계대전을 종식시키고 세 제국을 무너뜨리며 인간 해방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 사회로 가는 문을 열어 젖혔다.
혁명은 전 세계 지배자들을 공포에 떨게 했고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었다. 너무 멍청하거나 이기적이라 스스로 뭔가를 결정할 수 없는 존재라고 당연시됐던 노동계급이 이제 사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사회를 운영했던 차르나 지주, 사장들은 필요 없었다.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혁명의 역사란, 그 무엇보다도 대중이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던 자들의 영역으로 강제로 밀고 들어가는 일에 관한 역사다.”
이런 이유로 모든 논평가들 ― 〈조선일보〉 같은 우파 언론에서 〈한겨레〉 같은 자유주의 언론에 이르기까지 ― 은 온갖 거짓말의 탑 아래 러시아 혁명을 묻어 두려 한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이 독재와 억압을 낳은 흔한 쿠데타였다고 주장하며, 노동자들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사상에 먹칠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1917년 10월*에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자 실제로 벌어진 일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사회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평화, 빵, 토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봉기에 나섰다. 노동자들은 수도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하고 단 몇 시간 만에, 이 요구들을 충족시키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돌려주기 위한 조처들을 취했다.
이때로부터 불과 3년 전에 러시아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주의 전쟁 중 하나인 제1차세계대전에 뛰어들었다. 그 피바다 속에서 러시아는 유럽 등지의 세계를 분할하려고 영국, 프랑스 편에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이제 러시아 혁명을 지도한 볼셰비키당은 모든 전선에서 벌어지던 전투의 즉각 중단을 선언했다. 제1차세계대전은 1918년 휴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혁명이 잇달아 벌어지고 그 결과 전쟁을 도발한 군주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면서 끝났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혁명의 물결이 유럽 전역을 휩쓸면서, 1918년 독일을 시작으로 1919년에는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에서도 혁명이 잇달아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고 거리로 몰려 나왔으며, 전장의 참호 속 병사들은 반란에 나섰다.
그 결과, 전쟁을 벌이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이 모두 붕괴했다. 볼셰비키는 러시아 제국에 속했던 식민지 민중들이 자신들의 독립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했다.
1917년 내내 옛 공장 관리자들을 제거하자는 요구가 커졌다. 단적으로, 3월에는 “밖으로 내쫓기” 운동이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대중적으로 벌어졌는데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괴롭혔던 관리자들을 수레에 실어, 말 그대로 공장 밖으로 쫓아 버렸다.
또한 ‘노동·피착취 인민의 권리선언’에 따라 작업장은 노동계급의 수중에 놓였다. 도시 밖에서는 지주들에게서 토지를 빼앗아 농민 대중에게 줬다.
혁명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수 세기 동안 반동적인 러시아정교회가 “성 도덕”을 지배해 온 러시아 사회에서, 이제 교회와 국가가 분리됐다.
여성에게는 이혼할 권리, 자신이 원하면 낙태할 권리와 함께 투표권이 보장됐다. 러시아는 전 세계에서 동성애를 합법화한 첫 번째 국가가 됐다. 많은 선진국에서 지배자들은 훨씬 후에 대중적 시위에 직면해서야 마지못해 이런 권리를 인정했는데 말이다. ― 영국에서 남성과 동일한 여성의 투표권은 1928년에 허용됐으며, 제한된 낙태권과 LGBT+ 권리는 1967년에, 온전한 이혼의 권리는 1968년에야 도입됐다.
이러한 중요한 성과들은 단지 위로부터 공표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혁명을 거치며 러시아 사회와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도 완전히 바뀌었다. 구체제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대중은 반동적이고 편협한 사상들, “오랜 시간 쌓여 온 오물 덩어리”들을 씻어 버리기 시작했다.
해방
혁명은 인간이 해방되는 훨씬 더 거대한 과정의 일부였다.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이 주장했듯이, 혁명이란 “억압 받고 착취 당하던 사람들의 축제”이다. 이전까지 그들은 억눌리고 쓸모 없는 인간으로 취급당했다.
사장이나 지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고자 투쟁하는 과정에서 대중의 창의력도 분출했다.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는 예술과 문학, 문화가 융성했다.
미국인 사회주의자 언론인이었으며 러시아 혁명을 취재한 존 리드는 자신의 책 《세계를 뒤흔든 열흘》에서 당시 러시아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모든 러시아 사람들은 끊임없이 읽고 배우고자 했다. 그들은 세상을 더 알기 위해 정치, 경제, 역사에 대한 책을 읽었다.
“우리가 리가 후방에 있는 제12군의 전선을 방문했을 때, 수척한 모습의 병사들은 신발도 없이, 참혹한 참호 속에서 병들고 있었다. … 병사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일어나, 야윈 얼굴에 누더기가 된 옷 사이로 창백한 살갗을 드러나면서도 마치 내놓으라는 듯 이렇게 물었다. ‘읽을 것 좀 가져왔소?’”
러시아에서 새로운 사회는 훨씬 더 심화한 형태의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건설됐고 “소비에트” 즉 노동자평의회가 기초를 이뤘다.
의회민주주의 국가에서는 5년에 한 번씩 투표를 하고 국회의원들을 선출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국가는 언제나 선출되지 않은 집단들, 즉 법관, 군 장성, 고위관료 들에 의해 운영된다. 또한 자본주의에서 진정한 힘은 최고위층 은행간부들과 기업주들에게 있다.
이와 달리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대중의 집단적 참여에 기반하며 노동자들이 모든 것을 스스로 운영했다. 공장과 작업장, 군대, 지역에서 만들어진 위원회들은 대중 집회를 열고 소비에트에 파견될 대표들을 선출했다. 선출된 사람은 자신을 뽑은 이들을 대변하는 사람이었지 대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따라서 만약 대표가 자신을 선출한 사람들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면 즉시 소환될 수 있었다.
존 리드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목격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껏 대중의 뜻에 이 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치조직은 없었다.”
소비에트는 앞서 1905년 혁명 과정에서 처음 등장했다. 소비에트는 차르와 사장들에 맞선 대중 파업들을 조직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층 노동자들이 고안한 기구였다. 소비에트는 1905년 혁명이 패배하고서 사라졌다가 1917년에 다시 등장하는데, 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빈곤한 러시아 사회가 전쟁으로 완전히 파탄 지경에 이르자 사회 곳곳에서 불만이 들끓었다. 그리고 1917년 2월이 되자 마침내 차르 체제에 대한 최후 결전이 시작됐다.
2월 혁명을 촉발한 것은, 빵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고 국제 여성의 날 시위에 참여한 여성 방직 노동자들이었다. 주류 역사학자들은 이들의 영웅적 투쟁을 “빵 폭동”이라 깎아내린다. 푸틸로프 금속 공장의 전투적 노동자들도 부당한 처우에 맞선 파업을 벌이며 가세했다.
2월 23일에 대규모 시위대와 병사들이 충돌하자, 되레 군 병력의 상당 부분이 이탈해 시위대 편으로 넘어왔다. 그로부터 닷새도 지나지 않아 차르가 물러 나고 임시정부로 알려진 새로운 권력이 들어섰다.
개혁주의
임시정부를 이끈 것은 자유주의자들과 개혁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러시아를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과 같은 의회민주주의 국가로 바꾸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소비에트 내 노동자들도 이러한 목표를 지지했다. 어쨌거나 차르 독재에 비하면 의회민주주의가 수십 배는 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러시아가 제국주의 전쟁을 계속하는 한, 변화를 바라는 노동자·농민의 요구는 결코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임시정부는 전쟁에서 발을 빼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구체제 질서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러시아에서는, 자본주의 발전이 이미 시작된 대도시를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규모는 작지만 강력한 노동계급이 존재했다. 한편 군인의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농민들은 유력한 지주들에게서 토지를 가져와 자신들이 통제하기를 원했다.
민중은 의회민주주의를 약속한 정당들이 개혁을 가져다주기를 원했지만 그 정당들은 그러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2월 혁명 이후 노동계급은 급진화하기 시작했고, 그중 상당 부분이 볼셰비키의 혁명적인 사회주의 대안에 눈을 돌리게 됐다. 공장위원회들이 소비에트 대표로 볼셰비키들을 선출하기 시작했으며, 볼셰비키 당원 규모만 보더라도 2월에 1만 명이던 것이 11월에는 25만 명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급진화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 사이에서 가장 두드러졌는데 그곳 노동자들은 7월에 먼저 봉기에 나선 바 있다. 당시 볼셰비키는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하면서도 두 번째 혁명을 위한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을 주장했다. 페트로그라드가 아닌 지역의 노동자들은 아직 함께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정세가 소용돌이치자 우익 장군 코르닐로프가 [8월에] 군사 쿠데타를 시도했다. 임시정부가 대응을 주저하는 동안 볼셰비키가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한 저항을 주도하면서 노동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획득했다.
10월 혁명 즈음에 대중은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의회 민주주의를 지지했던 정당들은 신뢰를 잃었고, 구 세력은 필사적으로 반동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평화, 빵, 토지라는 요구를 대중화했다. 그러나 오직 노동계급이 정치 권력을 장악함으로써만 이 요구들을 실현할 수 있다고도 주장하며 다음 슬로건을 내 걸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존 리드의 말을 인용하자면 무엇보다도 1917년은 다음 사실을 입증했다. “노동자들은 위대한 꿈을 꿀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꿈을 실현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