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35:
반란에 나선 노동자들에게는 전혀 다른 신문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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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낳았다. 본지는 연말까지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한 기사를 꾸준히 번역 연재하려고 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가열차게 지속되는 동안 노동자들과 혁명가들에게는 자신의 소식과 주장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2월혁명으로 등장한 소비에트(노동자·병사 평의회) 역시 신속하게 자신들의 신문을 내기 시작했다.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인쇄소 하나를 혁명가들과 노동자들이 점거하고 운영했다. 이들은 이곳을 이용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일간지 〈이즈베스티야〉(러시아어로 “뉴스” 또는 “보도”라는 뜻)를 발행했다.
다른 도시에서도 〈이즈베스티야〉와 같은 신문이 생겨났고 이를 통해 소비에트와 공장위원회 내부에서 진행되는 격렬한 논쟁을 알리고 그 결정 사항을 실었다.
이런 신문은 러시아 전역의 소비에트들이 매일 매일 변화되는 상황에 발맞추도록 기여했다. 덕분에 평범한 사람들이 소비에트의 일상에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소비에트 신문은 자본가 신문들에 대당하는 구실에서도 핵심적이었다.
혁명적 볼셰비키 당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망명에서 돌아왔을 때, 자본가 신문들은 레닌을 비방하고 헐뜯는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자] 당시 페트로그라드의 〈이즈베스티야〉는 레닌을 “노동계급의 편에서, 모욕 받고 억압 받는 사람들 편에서 평생을 바쳐온 사람”이라며 그를 방어했다.
〈이즈베스티야〉가 내세우는 주장은 종종 소비에트 내 가장 영향력 있는 정당의 견해를 반영했다.
당시 페트로그라드 〈이즈베스티야〉의 편집자는 멘세비키 당의 지도자였던 표도르 단이었다.
〈이즈베스티야〉는 자본가들의 언론에 맞서 레닌을 방어하면서도, 임시정부에 맞서 반란을 선동한다며 볼셰비키를 비난했다. 멘셰비키가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것이 반영된 것이다.
대부분의 정당이나 분파는 자신들의 신문이 있었다. 멘셰비키는 1917년에 두 개의 신문을 발행했다. 노바야 지즌(“새로운 삶”)과 라보체예 델로(“노동자들의 대의”)가 그것이었다.
볼셰비키는 〈프라우다〉(“진실”)를 발행했다. 자본가들의 언론과는 달리, 〈프라우다〉는 평범한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에 대해 이야기했다.
볼셰비키였던 그리고리 지노비에프는 〈프라우다〉의 지면 절반은 노동자들이 보내는 편지와 소식 보고로 채워졌다고 말했다.
“이 편지들은 공장과 작업장, 막사, 공장 지대에서 노동자들이 나날이 겪는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단순한 언어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궁핍과 억압을 세세하게 전했다 … 저항이 자라나고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을 이 편지들만큼 잘 보여주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나중에 이러한 저항들이 바로 위대한 혁명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프라우다〉는 노동자들의 삶을 단순히 반영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프라우다〉는 또한 노동자들의 삶을 더 커다란 정치적 문제들과 연결시키고 노동자들이 혁명이라는 대안으로 향하도록 했다.
〈프라우다〉는 노동자들이 볼셰비키 주변으로 조직되고 함께 투쟁하도록 도왔다. 1903년에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혁명적 신문은) 건축 중인 건물 둘레에 세워진 비계에 비유될 수 있다 … 이런 신문을 중심으로 형성된 조직은 훗날 그 어떤 과제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1917년] 10월에 자본가 정부를 타도하자 〈이즈베스티야〉는 소비에트 정부의 신문이 됐다. 〈프라우다〉는 공산당(볼셰비키 당의 새 이름)의 신문이 됐다.
[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을 중심으로 성장하던 관료집단이 1920년대에 반혁명을 일으켰다. 〈이즈베스티야〉와 〈프라우다〉는 이제 스탈린주의 국가와 공산당을 옹호하는 선전물로 전락했다.
〈이즈베스티야〉와 〈프라우다〉의 이름을 물려 받은 신문은 지금까지도 러시아에 존재한다. 그 신문들이 1917년의 혁명적 신문들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노동자 투쟁을 중심에 두는 혁명적 신문이라는 전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배울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