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29:
“여성의 완전한 해방”으로 발을 내디뎠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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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 혁명은 수백만 여성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무엇보다 혁명을 통해 어떻게 여성차별을 끝장낼 수 있을지 힐끗 보여 줬다.
여성들은 변화를 요구하는 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여성들은 차르 체제에서 자신들이 경험한 끔찍한 지위를 더는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 국가와 교회는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생각을 조장했다. 여성은 남성의 말을 듣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고 조금이라도 잘못했다고 여겨지면 매를 맞는 존재였다.
여성들은 2월 혁명으로 많은 성과를 얻었다.
2월에서 5월 사이에 방직산업에서 벌어졌던 파업들이 성공하면서 미숙련 노동자들의 임금이 1백25퍼센트 인상됐는데, 이들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여성들은 혁명을 방어하려고 설립된 공장 민병대에도 참여했다.
물론 여성차별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혁명은 이제 첫 단계에 들어섰을 뿐이었고 사장과 지주를 몰아내는 것으로는 아직 나아가지 않았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의 절반이 여성이었지만 1917년 3월에 소비에트 대의원 4천7백53명 중 2백59명 만이 여성이었다.
그러나 10월 혁명이 벌어지면서 변화의 속도와 깊이가 어마어마하게 진전됐다.
10월 혁명 직후에 통과된 법령은 동일 임금과 직장에서의 평등, 출산 수당을 보장했다. 여성들은 완전한 투표권을 획득했는데, 당시에 그런 국가는 노르웨이와 덴마크밖에 없었다.
1920년에는 낙태가 합법화됐다. 당시 전세계 어느 곳에서도 낙태를 합법화한 나라는 없었다.
그러나 법률적 변화는 시작에 불과했다. 볼셰비키의 혁명적 지도자였던 블라디미르 레닌이 말한 것처럼 “여성을 해방시키는 모든 법률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여전히 가내노예다. 집안의 허드렛일이라는 사슬이 그녀를 부엌과 아이에게 묶어두기 때문이다. “
또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부엌을 결혼과 분리”하는 것은 교회를 국가와 분리하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여성을 “여성의 일”에서 자유롭게 하려는 목적으로 공동 시설들이 세워졌다. 공동 탁아소, 공동 세탁소, 공동 수선 시설 등이 생겨났다.
1919~20년에 페트로그라드 주민의 90퍼센트 정도가 공동식당을 이용했다. 모스크바 주민의 60퍼센트도 마찬가지였다.
볼셰비키는 당내 제노텔(여성국)이라는 부서를 설립해 여성들을 조직하고 여성 해방의 쟁점들이 부차화되지 않게 하려 했다. 볼셰비키가 1918년 11월에 개최한 여성 대회에는 여성 3백 명 정도 참여할 거라는 예상을 깨고 1천1백50명이 참여했다.
1919년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 2년 동안 가장 후진적인 나라에서 소비에트 정부가 여성을 해방하고자 한 일은, 지난 1백30년 동안 전 세계 ‘민주’ 공화국들이 이룬 것보다 많다.”
혁명은 여성의 삶에 물질적 변화를 낳는 동시에 여성차별에 맞서 날카로운 이데올로기 투쟁을 낳았다.
그러나 혁명이 후퇴하고 결국 패배하게 되자 혁명의 성과들은 폐기됐다.
1936년에 낙태를 합법화했던 법령은 폐지됐다. 이혼은 훨씬 더 어려워졌다. 스탈린 정권은 “결혼생활은 … 평생 유지되는 것이다 … 또한 아이들이 있어야만 결혼은 국가에게서 완전한 가치를 인정받는다”고 천명했다.
자유를 쟁취하고자 한 여성들의 패배는 러시아에서 새로운 관료계급(국가자본주의 체제를 운영하는)이 부상했음을 보여 주는 우울한 신호였다.
이는 볼셰비키 혁명가 이네사 아르망의 구호를 입증한 것이기도 했다: “사회주의 없는 여성해방을 생각할 수 없듯이, 여성의 완전한 해방 없는 사회주의도 생각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