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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24:
혁명은 어떻게 러시아 제국 전체로 확대됐나

1917년에 러시아는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세 제국 중 하나였다. 경쟁하는 다른 두 제국인 영국과 프랑스와는 달리, 러시아의 영토는 지리적으로 연결돼 하나의 거대한 블록을 이뤘다.

제국은 서쪽으로 핀란드에서 동쪽의 사할린까지 뻗어 있었다. 1914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는 1억 7천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중에서 러시아인은 절반이 채 안 됐다.

차르를 몰아내고 임시정부를 세운 2월 혁명은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혁명은 러시아 제국 전체를 뒤흔들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 모스크바의 무장해서 행진하는 노동자들

농촌에서는 지주에 맞선 농민(러시아 인구의 절대 다수)의 투쟁이 들끓었다. 식민지에서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과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이 서로 얼기설기 엮였다.

무엇보다도 혁명의 중추를 형성한 노동계급이 페트로그라드 일대를 넘어서 혁명에 동참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7백 킬로미터 떨어진] 모스크바도 대단히 산업화된 도시였고, 노동계급 지구들이 있는 작은 도시들이 러시아 전역에 걸쳐 있었다. 이 도시들은 철도와 전신망으로 서로 연결돼 있었다.

군대도 혁명의 확산에 핵심적인 영향을 끼쳤다.

병사들은 방대한 제국 곳곳으로 파견되거나 곳곳에서 징용됐는데, 이들은 전선으로 끌려가는 것에 반감이 있었다.

그래서 페트로그라드에서 노동자와 병사들이 소비에트(평의회)를 만들자 즉시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이미 1917년 4월에 러시아 전체에서 소비에트는 7백 개에 이르렀다. 10월에는 소비에트가 1천4백 29개로 늘어났는데, 이는 러시아 제국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이 중 거의 절반인 7백6개가 노동자와 병사 대표들로 이뤄진 소비에트였다.

6월에 열린 제1차 전 러시아소비에트대회에서는 이처럼 방대한 지역을 포괄하면서 생긴 일부 모순이 드러났다.

제국 전체 노동자들 중에서 2월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노동자들은 일부에 그쳤다. 초창기에는 혁명정당인 볼셰비키가 작은 마을들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1917년 혁명의 초기 단계에 러시아의 지방들은 운동에서 가장 후진적인 곳이었다.

그런데 혁명의 발전을 억누르려 한 개혁주의적 사회주의자들도 수도와 큰 도시에 집중돼 있었다. 그 때문에 지방에서는 급진화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거의 없기도 했다.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1917년 여름 “소비에트가 정치적 혁신”을 겪었다고 쓰면서 그 과정이 “아래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설명했는데, 여기서 아래란 페트로그라드의 지구들 그리고 그 외 지방들을 뜻했다.

모스크바 시(市) 소비에트보다 “훨씬 더 선진적”이었던 모스크바 주(州) 소비에트가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을 주장하고 나섰다.

페트로그라드에서 4천6백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는 병사들이 1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이끌고 시위를 벌였다.

소비에트 선거가 다시 치러지자 가장 혁명적인 분파였던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가 러시아 전체에서 다수파를 차지하게 됐다.

8월 18일에 우랄 지역 소비에트지역대회에 참여한 대의원 중 절반을 훨씬 넘는 사람이 볼셰비키였다.

러시아 남부에 속하며 오늘날 볼고그라드에 해당하는 차리친[페트로그라드에서 1천7백 킬로미터 남쪽]에서는 볼셰비키가 소비에트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시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직물 도시인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의 소비에트는 7월에 임시정부가 주도한 볼셰비키 마녀사냥을 “경멸한 것으로 명성을 날렸다”.

러시아 혁명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10월 혁명이 단지 볼셰비키 쿠데타에 불과했다고 주장하려고 페트로그라드의 고립을 과장한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임시정부 타도를 이끌 때, 볼셰비키는 러시아 대륙 거의 전체에서 벌어진 대중운동을 대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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