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⑩:
1917년 2월 – 노동자들이 역사를 새로 쓰다
〈노동자 연대〉 구독
백 년 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낳았다. 본지는 올 한 해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한 기사를 꾸준히 번역 연재하려고 한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노동계급은 역사의 중앙 무대에 올랐다. 노동계급은 차르 니콜라이 2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3백 년 넘게 지속된 로마노프 가문의 지배를 단 며칠 만에 끝장냈다.
이후 노동자들은 역사상 최초로 사회를 통제하게 되는데, 이를 향한 과정도 이때 시작됐다.
혁명의 막이 오른 날은 2월 23일(신력으로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이날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여성 방직 노동자 수만 명이 파업에 나섰다.
하루 만에 페트로그라드 산업 노동자의 거의 절반이 일손을 놓고 “빵”과 “차르 타도”, “전쟁 중단”을 요구했다.
당시 수도 밖에 있던 차르를 안심시키며 그의 아내인 황후가 보낸 편지는 이렇다. “소란이 좀 있었어요 … 으레 곧 사그라질 것이에요.”
하지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틀도 지나지 않아 노동자들은 스스로 무장했고, 병사들은 시위대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혁명에 가담했다. 여러 연대들이 군을 등졌다. 3월 3일 차르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2월 혁명은 수십 년 동안 러시아 사회에 누적된 불만과 저항이 터져 나온 것이었다.
그보다 12년 전 1905년 혁명 때 노동자들은 저항을 효과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수단으로 “소비에트”라는 노동자평의회를 처음 건설했다. 이 노동자평의회는 2월 혁명 과정에서 다시 등장했다.
당시 차르는 가까스로 통제권을 되찾았지만, 1905년 혁명은 대중에게 그들 자신의 민주적 조직을 건설해 본 경험을 남겼다. 혹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저항은 그 후 여러 해 동안 계속됐다.
가마솥
금속노동자이자 노동조합 지도자였으며 볼셰비키 당원이었던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는 1914년 4월의 러시아를 “혁명의 기운이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에 비유했다.
제1차세계대전의 끔찍한 경험 때문에 대중의 비통함이 날로 강렬해졌다. 그러자 러시아 지배자들은 아래로부터의 반란을 대비했다.
실랴프니코프에 따르면 정부는 “1917년에 뜨거운 총탄 세례를 퍼붓기로 결심했”지만 사람들을 막지 못했다. 1917년 2월 11일 시위 군중은 상점 창문을 깨고 전쟁 중단 구호를 외치며 페트로그라드를 가로질러 행진했다.
2월 14일이 되면 공장 58곳에서 노동자 약 9만 8천 명이 파업 중이었다.
혁명 발발 하루 전에는 푸틸로프 철강 공장 경영진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던 노동자 2만 명을 쫓아 내고 공장을 폐쇄했다. 볼셰비키 활동가들의 개입으로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2월 25일에는 여성 방직 노동자들이 철강 공장 노동자 대열에 합류했으며 볼셰비키 노동자들은 경찰서를 습격하고 관청으로 통하는 전화선을 잘라 버렸다. 이에 다음 날 경찰이 대대적인 혁명 지도부 체포에 착수했다.
일부 병사들은 파업 노동자에게 발포하라는 차르의 명령에 따랐다. 1백69명이 죽고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쳤다. 그러자 같은 연대에 소속된 다른 병사들이 격분하며 거리의 시위대에 합류했다.
2월 27일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가 약 20만 명에 달했으며 페트로그라드 주둔군 소속의 병사 대략 6만 6천 명이 혁명에 가세했다.
역사학자 쉴라 피츠패트릭은 이렇게 썼다. “2월 28일 저녁 때쯤 페트로그라드 군 사령관은 혁명 군중이 모든 철도역과 모든 포병 군수물자를 장악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아는 한, 도시 전체가 장악당했다고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휘하에 있는, 믿을 만한 군대는 거의 남지 않았고, 심지어 그는 전화마저 먹통인 상황이었다.”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큰 집단은 농민이었지만, 혁명을 앞으로 전진시킨 것은 노동자였다. 노동계급은 빠르게 성장해, 일부 추정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15퍼센트에 이르렀다.
반란은 노동계급 조직이 가장 강력했던 수도에서 영향력이 가장 컸지만 러시아 전역으로 빠르게확산됐다.
혁명은 러시아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친 깊은 위기에서 비롯했다. 기업주들은 러시아가 현대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체제로 발전하기를 바랐다. 노동자들은 가난과 전쟁, 전제정에 신물이 났고 농민들은 토지를 원했다.
아무도 구체제를 방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이 구체제를 대체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충돌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목표한 것 이상으로 반란이 나아갈까 봐 두려웠다. 반란이 차르를 제거한 것에서 멈추지 않고 자본주의와 맞설지도 모를 일이었다.
따라서 최상층의 사람들은 혁명을 제한하려 했다. 러시아 의회인 “두마” 의장이었던 미하일 로지안코는 2월 26일 차르에게 전보를 보내 새 내각을 임명할 것을 제안했다. 차르는 응답하지 않았다.
3월 1일 군장성 알렉셰예프는 “임박한 위험”을 경고하며 두마가 책임지는 새 정부 구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재무장관 피터 바크의 묘사에 따르면 로지안코는 “더는 혁명운동을 억누를 수 없을 거라며 두려움에 떨었다.”
반란이 고조되던 3월 2일에 두마는 자신을 임시정부로 선언했다. 임시정부는 정치범 즉각적 사면과 “보통, 직접, 평등, 비밀 투표를 기본으로 하는” 선거를 약속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전쟁 중단을 거부했으며 임무 중인 병사들에게는 여전히 “엄격한 군율”이 적용된다고 경고했다.
일각에서는 임시정부가 반란에 나선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권위를 가지기를 바랐지만 임시정부의 권위는 처음부터 제한적이었다.
임시정부 구성이 선포되던 바로 그 순간에 이미 재조직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회의를 열고 있었다.
3월 1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명령 제1호를 발표하며 군에 대한 정부의 모든 명령은 소비에트의 승인 없이는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새 정부는 “이중 권력” 상태를 받아들이는 것 말고 달리 대안이 없었다. 전쟁장관 알렉산더 구치코프가 말한 것처럼 “임시정부에게는 실질적 힘이 없었다. 임시정부가 내리는 명령은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허용하는 선까지만 집행됐다.”
2월 28일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구체제는 완전히 분쇄돼야 한다. 혁명이 승리하려면 민중이 자신의 정부 기관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는 수도 주민 전체가 각 지역위원회를 꾸리고 지역 사안을 스스로 관리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자 사람들은 실제로 그랬다.
새로운 노동자 조직이 러시아 산업 중심지들에서 생겨났다. 도시와 자치주에서 소비에트가 만들어지고 노동조합이 새로 건설됐다. 피츠패트릭은 노동자들이 “경영진 문제를 다루려고” 공장위원회를 만들었다고 썼다. 일부 공장위원회는 공장 폐쇄를 막으려고 경영 기능을 떠맡았다.
노동자 민병대가 경찰을 대체했다. 병사들은 위원회를 선출하고 부대 내 장교의 통제권에 도전했다. 혁명 후 몇 개월이 지나 군대는 붕괴됐다.
농촌 마을은 2월 혁명 기간에 조용했다. 많은 농민이 집을 떠나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시골이 혼란에 빠져 들었다.” 농민들이 지주의 집에 불을 지르고 토지를 장악했다.
자발성
2월에는 대체로 자발적인 행동이 차르를 끌어내렸다. 그러나 투쟁이 더 나아가 반(反)혁명 시도를 막고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려면, 단호한 혁명조직과 그 지도가 필요했다. [관련 연재 기사: '⑧ 2월혁명은 순전히 자발적이었나?']
대다수 지도적 볼셰비키들은 혁명 당시에 망명 중이거나 유형지에 있었지만 그 당은 혁명에서 핵심 구실을 했다. 혁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노동자와 병사들이 볼셰비키로 몰려들어 1917년 혁명 당시 볼셰비키는 대중정당이었다.
피츠제럴드는 어떻게 볼셰비키가 지지를 획득했는지 썼다.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 그룹들이 임시정부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자리를 두고 다투었던 것과 달리 볼셰비키는 거기에 말려들기를 거부했다.”
“이전에 급진적이었던 다른 정치인들이 자제하라고 호소할 때, 볼셰비키는 거리에 남아 혁명적 대중이 물불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움직이는 데 함께했다. “
2월 혁명 후 몇 개월 동안 계급과 정치적 분열 문제가 점점 더 표면화됐다. 자유주의자들은 “재산과 법질서를 지키려 안절부절못하는 보수적 입장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들은 더 급진화했다. 마침내 2월 혁명 8개월 후 노동자, 병사들은 또 다른 혁명으로 권력을 잡았다.
세계 여성의 날에 점화된 파업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비보르그 지역 방직 공장 여성들은 저임금에 비숙련 노동자로 혹사당했고 무시당했다. 여성들은 12시간 교대근무를 마친 후에도 청소와 요리를 하고 아이를 돌봐야 했다.
그러나 1917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여성 방직 노동자들이 빵 공급량 감소에 항의해 전투적 파업에 돌입했다. 주류 역사가들은 2월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이 투쟁을 단순히 “빵 폭동”으로 평가절하한다.
노동조합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2만 8천 명에 이르는 여성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빵 배급줄까지 행진을 벌였다. 혁명 가요를 부르며 빵 가게와 식료품 가게를 뒤지고 남아 있던 것들을 다시 나눴다.
이 노동자들은 이러한 행동을 확대하려 애썼고 혁명정당인 볼셰비키도 그들과 함께했다. 이들은 다른 공장들로 행진해 창문에 눈뭉치를 던지며 남성 노동자들에게 연장을 내려놓고 함께하자고 호소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요구에 호응하는 붉은 배너가 도시 곳곳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미 노동자 약 9만 명이 파업을 벌이고 있었던 데다가 바로 전날에는 인근에 있는 푸틸로프 공장의 금속 노동자들이 경영진의 직장 폐쇄로 쫓겨났다. 다음 날이 되면 페트로그라드 산업 노동자의 거의 절반이 파업을 벌이면서 파업 규모가 두 배로 커졌다.
급진적
노동자들의 요구는 빵뿐만 아니라 전제정과 제1차세계대전에 반대하는 것으로 급진화됐다.
혁명 발발 3일째에 노동자 24만 명이 거리로 나섰지만 차르가 군대를 동원할 것으로 예상됐다. 혁명이 승리하려면 노동자들은 이제 병사들을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다시금 여성들이 앞장섰다.
여성들은 보병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소총을 움켜 잡고는, 총을 내려놓고 노동자들과 함께하라고 명령했다. 군대가 차르의 지시를 거부하기 시작하면서 차르의 시대는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2월 혁명 후에 여성 노동자들은 더 조직화했다. 여름에는 파업위원회를 건설하고 전투적 행동을 벌여 큰 폭의 임금 인상과 하루 8시간 노동을 쟁취했다.
비보르그 지역 방적공장 여성 노동자들은 사장을 붙잡아서 수레에 태운 다음 공장 밖으로 데리고 나간 뒤 그대로 수로에 빠뜨려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제방 끄트머리에서 사장은 결국 벌벌 떨며 임금 인상에 서명했다.
여성들은 또한 구체제에 맞서 혁명을 방어한 공장 민병대에 참여하기도 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가장 억압당하고 저임금을 받던 집단에 속했다.
그러나 혁명 과정에서 여성들은 자신감을 갖게 됐고 인간 해방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투쟁의 선두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