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38:
10월 혁명 - 노동자들이 봉기를 일으켜 권력을 접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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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낳았다. 특히 1917년 11월 7~8일(구력 10월 25~26일)에는 20세기 유일하게 노동자 국가를 수립한 10월 혁명이 벌어졌다. 본지는 연말까지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한 기사를 꾸준히 번역 연재하려고 한다.
1917년 10월 25일
다음날 새벽 2시 노동자들이 들이닥쳐 동궁을 단박에 접수했다. 이 노동자들에 의해 ‘확실하게 숙청돼 재기 불능’케 된 것은 바로 지배자들
노동자들이 동궁을 접수한 것은 1917년 10월 혁명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미국인 사회주의 언론인 존 리드는 《세계를 뒤흔든 열흘》
“거리를 가득 메운 행렬은 검은색 강을 연상시켰다. 군가나 환호도 없이 우리는 붉은 아치로 쏟아져 내려갔다.”
이때는 이미 동궁을 지키던 병력 다수가 임시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잃은 뒤였기 때문에 저항이 거의 없었다. 노동자들이 동궁에 접근함에 따라 임시정부의 정예 기병대인 코사크는 자취를 감췄다. 존 리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앞장서고 있던 200~300명이 모두 적위병
노동자들의 봉기는 단지 동궁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비록 상징적 성격이 강했지만 말이다.
무장한 노동자들은 기차역, 전신국 등 교통과 통신의 주요 거점들을 장악했다. 이런 행동을 통해 러시아 전역의 노동자들에게 봉기에 동참하라는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진지한 생각을 하기엔 너무 무식하다’고 천대받던 노동자들이 이제 권력의 아성을 글자 그대로 거닐었다.
임시정부가 1917년 2월 차르 독재를 대신해서 들어섰지만 노동자들의 기대를 완전히, 거듭 저버리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봉기가 벌어지기 수일 전부터 이미
존 리드는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전한다.
“한쪽에서는 왕당파 신문들이 유혈탄압을 촉구했고, 다른 쪽에서는 레닌이 ‘봉기하라! ……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빠르게 지지를 잃고 있었고, 반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빠르게 지지를 얻고 있었다.
노동자들
케렌스키와 그가 이끄는 임시정부는 코사크를 내세워 노동자들을 막으려 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페트로그라드 전역에서 대중집회를 소집하자, 코사크는 같은 날에,
소비에트는 코사크 사병들에게 직접 호소하며 그들의 장군을 거역하라고 촉구했다. “채권자들과 부자들, 왕족과 귀족, 코사크 장교들을 포함한 모든 장교들이 우리를 경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 순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파괴하려 하며, 혁명을 질식시키려고 합니다.”
코사크 장교들은 병사들의 압력에 떠밀려 행진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볼셰비키의 지도부인 중앙위원회는 10월 23일 회의를 열어 무장봉기 계획을 10 대 2로 통과시켰다. 당시 회의는 “무장봉기를 피할 수 없고”, “봉기를 위한 때가 완전히 무르익었다”고 결의했다.
공장에서, 병영에서, 지역사회에서 볼셰비키 당은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내걸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봉기를 설득해 낸 것은 볼셰비키였다. 그러나 실제 봉기를 호소한 세력은
10월 혁명에는 노동자들이 대중적으로 참여했다.
봉기를 지지하라는 명령은 다른 소비에트들로 전달됐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그날 밤 헬싱키, 스밀가, 지역 소비에트 위원회 대표에게 ‘규제 세력을 보내시오’ 하고 전보를 보냈다. … 그 뜻은 완전무장한 발틱 수병 1500명을
순양함 아브라로 호가 동궁을 향해 공포탄을 쏠 무렵
동궁 접수는 상징적 의미가 더 컸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단지 동궁 하나를 뒤흔든 것이 아니었다. 그날 노동자들은 천지를 뒤흔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