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34:
혁명은 사회뿐 아니라 노동자들 자신도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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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2월, 노동자와 농민들이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들은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속한 로마노프 왕조 수립 300년을 축하하는 행렬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4년 후인 1917년 2월, 바로 그 여성과 남성들이 차르를 타도했다. 반란이 계속됨에 따라, 인간 해방과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며 장애물을 하나씩 걷어내기 시작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 혁명이 단지 사회 상층부를 갈아치우는 데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혁명으로 사람들의 삶 자체가 변하고 있었다. 지배계급에 맞서 싸우게 되면서 평범한 노동계급 사람들은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결정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혁명가 카를 마르크스가 “수 세기에 걸쳐 쌓인 오물 덩어리” 라고 불렀던 낡은 생각들
사회가 뒤집어지고 있었다. 역사가 SA 스미스는 어떻게 노동자들이 사장들에게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이 푸자노프 공장의 흑색단
“노동자들은 그 자를 외바퀴 수레 안에 처넣은 다음, 머리 위에 붉은색 물감을 들이부었다. 그 자는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수레에 실려 공장에서 쫓겨나 길거리에 버려졌다.”
공장 관리자이기도 했던 이 자는 “노동자들을 무례하게 대우하고 … 초과근무를 강요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이런 “외바퀴 수레 형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를 만들어 자신의 공장을 스스로 운영했다. 그리고 규모가 더 큰 노동자 평의회
잠재력
그토록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해방의 잠재력이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혁명을 직접 목격한
“우리는 리가 시
1917년 10월, 소비에트는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았다. 새로운 노동자 정부가 법령들을 통과시키자 이미 진행 중이던 변화는 속도가 더 붙었다.
혁명은 기존 사회 관계를 뿌리째 흔들기 시작했다. 교회 권력은 흔들리고 있었다.
여성을 가사 노동에서 해방시키고자 공공 식당, 세탁소, 보육원 등을 설립하면서 여성차별의 토대에도 도전하기 시작했다.
1919년에는 페트로그라드 인구의 거의 90퍼센트, 모스크바 인구의 60퍼센트가 공공 식당을 정기적으로 이용했다.
러시아가 여기서 더 나아가려면 혁명이 확산하는 것이 필요했다. 혁명이 독일과 영국 같은 더 발전한 나라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느냐가 중요했다.
그러나 혁명은 확산되지 않았고, 고립됐다. 또한 내전과 반혁명을 거치며 혁명의 성과는 잠식됐다.
그러나 초기 몇 년 동안 혁명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소위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완전히 뒤집힐 수 있음을 똑똑히 보여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