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⑪:
폭발 직전의 페트로그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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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낳았다. 본지는 올 한 해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한 기사를 꾸준히 번역 연재하려고 한다.
1917년 당시 러시아 노동계급은 구성이나 세계 자본주의에서 처한 위치로 볼 때 독특했다.
러시아에서 자본주의는 매우 급속도로 발전했고 가난한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 점이 노동계급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노동자들은 페트로그라드 같은 산업 중심지들로 집중됐는데 이 지역들은 전 세계에서 산업이 가장 발전한 곳에 속했다.
동시에 노동계급은 빈농에서 충원돼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토지와 관련이 깊었다.
1908년에는 독신 노동자 중 절반이 여전히 땅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노동자였고, 이런 사실은 오히려 새롭게 형성되고 있던 계급에 깊은 모순이 내재해 있음을 의미했다.
1918년에는 토지 보유 노동자의 비율이 12.5퍼센트로 떨어졌다.
서유럽 나라들, 예컨대 영국이나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곳에서는 자본주의가 수백 년 과정을 거쳐 발전했다. 반면 러시아에서는 이 과정이 압축적으로 빠르게 진행됐다.
역사학자 SA 스미스에 따르면 1917년에 “러시아 제국을 통틀어 적어도 노동자가 1천8백50만 명 있었으며 이는 전체 인구의 10퍼센트 정도였다.”
이 중에서 3분의 2 정도는 산업 노동자가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었다.
페트로그라드 산업 노동자는 41만 7천 명에 이르렀는데 이 중 70퍼센트가 넘는 노동자들은 “1천 명 이상을 고용한 사업체”에서 일했다.
노동계급이 빠르게 늘고 집중된 것은 노동자들의 사상에도 즉각적인 영향을 끼쳤다.
선진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의 일부 층에 존재하는 보수성이, 러시아에서는 그만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도시에서의 삶은 처절했고 공장에서 겪는 노동조건은 끔찍했다. 오흐타 지역 폭약 공장에서 폭발 사고로 노동자 다섯 명이 사망하자, 최고 경영자 소모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사고는 늘 있는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거다.”
“나로 말하자면, 공장에 들어가기 전에 언제나 빠짐없이 기도부터 한다.”
조건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은 혁명의 필요 조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반드시 지배계급이 정치적 위기에 빠져야 하고 “피지배 계급의 고통과 결핍”이 “보통 때보다 더 극심”해야 한다.
당시 러시아 상황이 그랬다.
수백만 명이 제1차세계대전의 전쟁터로 징집될 때, 많은 산업 노동자들은 이 사형 선고와 같은 징집을 모면했다.
가장 전투적인 노동자들이 제일 숙련된 노동자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이 전선으로 보내질 가능성 역시 적었다.
그런데도 페트로그라드에서 금속 노동자 6천 명이 징집됐다. 공장주들이 전투적 노동자들에 대한 보복 수단으로 이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훨씬 더 나쁜 조건에 시달렸다. 여성들은 끔찍한 공장 노동에 더해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 방직 노동자들은 2월 혁명의 주역으로 나서며, 차르 독재를 무너뜨린 파업 운동을 이끌었다. 1917년에 여성은 페트로그라드 전체 노동력의 거의 정확히 3분의 1을 차지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산업 근거지에서 겪은 현실 때문에 이들은 차르에 맞선 투쟁, 그리고 차르를 대체한 임시정부와의 싸움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잘 알았다.
혁명 기간에 노동자들의 평의회(“소비에트”)가 각 마을과 구, 시에서 생겨나 혁명을 이끌고 사회를 운영했다.
노동자들은 또한 빈농을 혁명에 끌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빈농을 혁명 편으로 이끌기 위해 6만 5천 루블을 모금해 인쇄물을 발행하고 선동가 3천 명가량을 농촌으로 파견했다.
이런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 과정이 1917년 10월에 일어난 두 번째 반란의 기초를 놓았고 노동계급은 바로 이를 통해 권력을 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