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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⑨:
볼셰비키는 어떤 당이었고 왜 여전히 혁명적 조직의 귀감인가

백 년 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낳았다. 본지는 올 한 해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한 기사를 꾸준히 번역 연재하려고 한다.

올해는 좌우 가리지 않고 모든 평론가들이 볼셰비키 당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볼셰비키 당이 진정으로 어떤 정당이었으며 어떻게 러시아 혁명을 이끌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을 것이다.

1917년 2월에 혁명이 시작됐을 때, 볼셰비키 당원은 1만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해 11월에 볼셰비키 당원 수는 25만 명이 됐다. 볼셰비키의 지도로 권력을 잡게 된 노동계급의 다수가 볼셰비키 당을 지지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1920년).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볼셰비키는 혁명이 성공하려면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봤다. 또한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이 필수 불가결하다고도 봤다.

바로 이 점에서 볼셰비키는 다른 두 주요 좌파 정당, 즉 사회혁명당이나 멘셰비키와 달랐다.

혁명이 시작됐을 때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모두 혁명에 동참했지만,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자본주의적 의회 민주주의를 세우는 것이 혁명으로 가능한 최대치라고 여겼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혁명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세운 노동자평의회, 즉 소비에트가 노동자 정부의 기초를 놓았다고 주장했다. 이 차이는 볼셰비키가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보다 훨씬 더 분명한 입장을 취했음을 의미한다.

2월 혁명으로 차르 전제정이 전복되고 나서도[임시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당은 러시아의 제1차세계대전 참전을 지지했다. 자신들의 새로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며 말이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즉각적인 전쟁 종식을 요구했다. 볼셰비키는 러시아에 새 임시정부가 들어섰어도 제국주의적 대학살이라는 전쟁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임시정부는 무너져 내리던 사회를 유지하려 했으며, 소비에트는 임시정부의 권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소비에트에 맞서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임시정부를 도왔다. 노동자들은 임시정부를 넘어선 대안을 보기 시작했는데 말이다.

권력

그러나 볼셰비키는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임시정부에 신물을 내고 있을 때, 이 노동자들의 편에 섰다. 그랬기 때문에 볼셰비키는 성장하는 급진적 정서와 관계 맺을 수 있었고 결국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볼셰비키의 성공은 단지 그들이 적절한 주장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평론가들은 볼셰비키가 기회주의적으로 지도부 자리를 꿰찼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볼셰비키를 노동자들의 분노를 이용해 쿠데타를 벌인 아웃사이더로 묘사하고 싶어 한다.

물론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에게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보다도 볼셰비키가 노동계급의 일부였던 덕분이었다.

볼셰비키 당원은 대부분 노동자였다. 그들은 공장과 소비에트 안에서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싸웠다. 그 과정에서 투쟁을 전진시킬 방법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논쟁했다.

볼셰비키가 노동자들의 신뢰를 얻고 지도력을 인정받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투쟁 속에서 자신들의 올바름을 입증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1917년 내내 노동자들은 급진화했으며, 그에 따라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볼셰비키당에 가입했다.

혁명 과정에서 볼셰비키는 노동계급 대중 사이에 더 뿌리내린 정당, 더 강력한 연계를 구축한 정당이 됐다.

이것은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이 20세기 초에 상상했던 혁명 조직의 모습이었다. 당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은 창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러시아 혁명가들은 여전히 조직 문제를 둘러싸고 고심하고 있었다.

레닌은 “언제든 모든 저항과 반란을 지지하고, 이를 통해 미래의 결정적 투쟁에서 실력을 발휘할 전투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레닌의 이 주장은, 오직 임금 같은 협소한 “경제적” 요구를 둘러싼 투쟁으로만 노동자들을 조직하려 한 혁명가들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이 작은 성취를 얻기 위해 투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체제에 맞서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닌은 혁명가들이 단지 작업장 투쟁을 조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정치 투쟁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또한 모든 형태의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함을 의미했다. “억압이 어디에서 벌어지든, 어떤 사회 계급과 계층의 사람들이 영향을 받든지 간에 말이다”

핵심은 이러한 모든 저항들을 하나로 모아 내고, 그런 억압들을 낳는 체제 자체를 겨냥하도록 이끌어서 더 커다란 투쟁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려면, 혁명 조직은 투쟁의 모든 부문과 관계를 맺어야 할 뿐 아니라 “중앙집중적”이어야 한다.

지역 조직들은 선출된 중앙 지도부에게 자신들의 경험을 보고하고 지도부는 결정을 내린다.

이런 구조는 조직이 투쟁에서 벌어지는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고, 전체 조직이 함께 행동하도록 해 준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혁명 조직에 대한 레닌의 이런 제안을 놓고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그룹으로 분열을 겪었다.

레닌은 당원 자격을 혁명 활동에 전념하는 혁명가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멘셰비키는 좀 더 느슨한 형태의 조직을 원했다.

유연성

그러나 동시에 볼셰비키가 취한 조직 형태는 놀랄 만큼 유연하기도 했다.

1905년 혁명 동안 레닌은 급진화하는 새로운 노동자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당의 문호를 개방하라”고 주장했다.

1905년 혁명이 패배하고 나서 볼셰비키는 엄청난 탄압에 직면했다. 이 때문에 지도부는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당은 비밀리에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1917년 혁명 전까지는 멘셰비키 조직이 볼셰비키보다 클 때가 더 많았다.

그러나 혁명이 벌어지자, 볼셰비키는 급속하게 전개되는 상황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볼셰비키는 혁명의 선두로 나섰다. 반면 멘셰비키는 옥신각신하고 사분오열했다. 그렇다고 해서 볼셰비키 내에는 이견이 없었다거나 그들이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심지어 혁명이 한창일 때도 볼셰비키는 끊임없이 논쟁했고, 때때로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노동자 투쟁에 뿌리를 둔 중앙집중적인 조직이었기 때문에 잘못을 인지하고, 논쟁을 통해 바로잡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혁명 초반에 볼셰비키는 임시정부를 지지했고 전쟁을 지속하는 것을 지지했다.(당시 지도부는 스탈린과 카메네프였다.) 레닌은 이 지도부에 맞선 논쟁을 주도해 4월경 결국 승리했다.

그러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레닌이 논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볼셰비키 활동가들에게는 계속해서 투쟁을 앞으로 밀어붙이는 게 몸에 배어 있었던 덕분이다. 트로츠키는 그들이 “언제나 비타협적인 혁명가로서 행동하려고 고심했고, 지도부 때문에 혼란을 겪더라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하고 썼다.

제1차세계대전 발발 당시, 볼셰비키의 기층 조직들은 지도부보다 먼저 전쟁을 반대하고 나섰다.

결정적으로, 노동자들의 권력 장악 필요성을 이해했던 것은 기층에서 투쟁을 벌이던 볼셰비키 노동자 당원들이었다.

볼셰비키는 투쟁에 깊숙이 동참하고 있었던 덕분에 혁명의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적 구실을 할 수 있었다.

1917년 7월 무장한 병사와 노동자들이 수도 페트로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로 몰려나와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을 때 볼셰비키는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또한 수도를 제외한 지역의 노동자들은 아직 임시정부 전복에 나설 준비가 돼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페트로그라드에서 노동자들과 나란히 투쟁하면서도 당시에 권력을 잡는 것에는 반대해 논쟁했다.

임시정부는 7월 봉기를 구실삼아 볼셰비키를 박살 내려 했지만, 볼셰비키는 이를 견뎌 냈다.

8월에 우익 쿠데타가 벌어졌을 때, 임시정부는 이를 물리치려면 볼셰비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볼셰비키가 노동계급 내에 구축한 기반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볼셰비키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노동자들로부터 빠르게 신망을 얻었다. 미국 사회주의자 언론인 존 리드는 볼셰비키가 “노동자들의 단순한 바람을 포착하고 그것에 기반해 자신들의 즉각적인 실천 계획을 세웠다”고 묘사했다.

“7월에 볼셰비키는 쫓겨나고 경멸당했다. 그런데 9월이 되면 도시의 노동자들, 발틱 함대의 수병들, 병사들이 거의 모두 볼셰비키의 주장에 지지를 보냈다.

“전국적으로 지역 소비에트들이 하나씩 하나씩 볼셰비키 지지로 바뀌었다.”

10월에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에서 충분한 지지를 얻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봉기를 호소했다. 결국 노동자들은 봉기에 나서 임시정부를 전복했다.

볼셰비키는 가장 강경한 입장을 취할 만큼 정치적으로 분명했고, 노동계급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효과적으로 겨룰 수 있을 만큼 강력하게 조직돼 있었다. 그런 조직의 존재가 노동자들의 투쟁이 성공한 비결이었다.


멘셰비키는 어떤 정당이었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1903년 당대회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나뉘었다. 볼셰비키(다수파)든 멘셰비키(소수파)든, 당시 당대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이런저런 혁명가들이었다. 그러나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두 가지 핵심 쟁점을 두고 의견이 달랐다.

첫째는 차르에 맞선 혁명을 이끌 주체가 누구냐는 문제였다.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을 지도해 혁명을 이끌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규모가 작았지만 그 규모를 뛰어넘는 사회적 힘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반면 멘셰비키는 [부르주아] 혁명으로 우선은 현대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러시아를 세운 다음에야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것은 노동계급이 고용주들과 동맹을 맺어야 하며 고용주들에게 지도권을 넘겨줘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많은 자본가들은 차르를 증오하면서도, 성장하는 노동계급의 힘을 더 두려워하고 있었다.

더 느슨한

둘째로 멘셰비키는 더 느슨한 형태의 당 조직을 선호했다.

이런 차이점들이 당시 1903년에는 사소해 보였을 수 있지만, 결국 투쟁을 어떻게 전진시킬 것이냐 하는 사활적 문제로 발전했다.

그러나 멘셰비키와 볼셰비키가 1903년 당대회 이후 완전히 별개의 조직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통합 시도가 있었고 공동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는 계속 커져 갔다.

멘셰비키의 상당수 그룹들은 훨씬 더 광범한 당이 필요하다며 혁명가들이 아닌 사람들을 당으로 끌어들였다.

1905년 혁명이 패배하고 혁명가들이 탄압에 직면하고 후퇴해야 할 상황이 되자, 그처럼 광범한 조직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더 커졌다.

광범한 당을 추구한다는 것은 원칙을 포기하는 것을 뜻했다.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은 1911년에 “자유주의적 노동자 정당”을 원하는 사람들이 혁명 조직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고 썼다.

멘셰비키들이 모두 “청산주의자”였던 것은 아니지만, 청산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나머지 멘셰비키들과 결별하지는 않았다.

1912년 볼셰비키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지도부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공식 결별했다.

이런 모든 분열과 투쟁이 필요한 일이었을까?

그렇다. 첫째, 1914년 멘셰비키의 어느 그룹이 제1차세계대전에 대해 취한 입장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자본가들을 좇아서 전쟁에서 러시아 국가를 지지했다.

죽음

둘째, 1917년 혁명의 생사가 그 둘 사이의 차이에 걸려 있었다. 노동계급은 권력을 장악해야 할까, 단순히 자유주의 자본가들을 응원해야 할까?

현실에서 멘셰비키의 입장은 급진적 세력을 억누르거나 반혁명적 군장성들에게 추파를 던지던 자들과의 동맹을 뜻했다.

1917년 내내 멘셰비키는 자본가들에게 혁명적으로 행동하라고 촉구했다. 자본가들이 완전히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에 말이다.

임시정부에 대한 노동계급의 불만이 커질수록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는 치솟았고 멘셰비키에 대한 지지는 추락했다.

국제주의 그룹으로 알려진 일부 멘셰비키 좌파는 볼셰비키와 가까워졌다. 반면 다른 멘셰비키들은 10월 혁명으로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자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멘셰비키는 러시아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멘셰비키의 정치적 동맹들은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좌파를 좌지우지했다. 그 때문에 혁명적 기회가 여러 차례 유실됐고, 그 결과는 몹시 재앙적이었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25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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