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18:
극빈하고 궁핍한 노동자들만이 투쟁에 나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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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굶주림이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촉발했다. 그런데 혁명은 그런 절망적 조건에서만 벌어지는 일일까?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은 그런 격변이 발생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하층계급'이 기존 방식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고 '상층계급'도 기존 방식으로 통치할 수 없을 때에야 혁명이 터질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제1차세계대전이라는 맥락이 이런 조건을 만들어 냈다.
전방에서는 병사들이 수없이 목숨을 잃는 상황, 후방에서는 대중의 삶이 곤궁해지는 상황이 결합되며 지배계급은 정치 위기에 부딪혔다.
1916년 식량 폭동 당시 한 여성 노동자의 말이 이러한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 줬다. "저들은 우리 남편과 아들을 전쟁터에서 살육하고 있고, 여기 남아 있는 우리는 굶어 죽기를 바랍니다.”
이런 상황은 민주주의의 완전한 결핍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격화시켰다.
수병들
반란이 군대를 뒤흔들었다. 2월 혁명 때 크론시타트 해군기지 수병들은 장교들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러시아 병사들은 주로 농민 출신자였는데, 2월 혁명 후 러시아군에서는 집단 탈영과 항명이 발생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노동자들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1차세계대전이 벌어지기 몇 해 전부터 거대한 투쟁들이 있었다.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썼듯이, "1914년 7월 외교관들이 유럽을 십자가에 매달아 마지막 못질을 하는 동안 페트로그라드는 혁명적 열기가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혁명적 운동의 발전은 전쟁 선언으로 중단됐다. 러시아가 참전하자 파업 횟수가 급격히 떨어졌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SA 스미스에 따르면, "1915년에 1천9백28건의 파업이 있었지만, 1917년 1월에서 2월 사이에는 7백18건의 파업이 있었고 노동자 54만 8천3백 명이 참가했다."
이러한 수치는 1905년에 견주면 보잘것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일시적이었다. 곧 1914년보다 규모가 더 크고 정치적 성격이 강한 파업이 다시 시작됐다.
전쟁과 굶주림, 정치적 변화 요구가 폭발적으로 뒤섞였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다수 노동자가 전쟁에 반대했다.
전쟁은 계급 관계의 실체를 가장 격렬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드러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혁명의 필수 조건이라는 뜻은 아니다.
2011년 이집트 혁명, 1979년 이란 혁명 등 여러 혁명은 전쟁의 직접적 결과로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이 더 많이 굶주리고 절박할수록 반란의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것도 참이 아니다.
가장 끔찍한 조건과 경험은 대중을 저항이 아니라 수동성과 체념으로 이끌 수도 있다.
전투적인
제1차세계대전 동안 가장 투쟁적이던 노동자들은 가장 숙련되고 더 나은 임금을 받던 노동자들인 경우가 많았다. 이 노동자들은 전방으로 끌려갈 가능성도 더 적었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전쟁 기간이나 그 이후에 일어난 가장 완강한 파업 중 일부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금속 노동자들이 이끈 파업이었다.
혁명이 일어나려면 그전에 충족돼야 할 특정한 조건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혁명가들에게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세상을 지나치게 단순하고 교조적 방식으로 보도록 하기 때문이다.
혁명가들이 할 일은 노동자들을 설득할 핵심 주장들을 제시하며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기 이익을 위해 투쟁에 나서도록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