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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30:
코르닐로프 쿠데타: 쿠데타를 저지한 노동자들의 단결은 어떻게 가능했나

1917년 9월 초 러시아군 총사령관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이 혁명을 깨부수러 나섰다.

이 쿠데타가 성공했더라면 러시아는 피바다가 됐을 것이다. 혁명적 전략 덕분에 쿠데타는 실패했고,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은 10월 혁명으로 가는 길이 닦였다.

전쟁 반대 연설을 하는 볼셰비키 당 소속 병사

2월에 수도 페트로그라드[현재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떨쳐 일어나 차르 압제를 무너뜨린 노동자와 병사들은 1차세계대전의 대학살에서, 부자들의 착취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러나 2월 혁명으로 들어선 임시정부는 사회혁명당 소속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끌고 대다수 좌파의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도 전쟁과 자본가 지배를 이어 갔다.

임시정부는 혁명 과정에서 세워져 자체 권력을 가지고 있던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와 아슬아슬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케렌스키에게 실망한 많은 노동자들은 볼셰비키에게 기대를 걸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는 전쟁을 끝내고, 지주에게서 토지를 몰수하고, 자본주의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한 유일한 정당이었다.

이에 대응해 케렌스키는 7월에 [7월의 무장시위를 이유로]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수감하고 지하로 숨을 수밖에 없도록 탄압했다. 볼셰비키가 독일의 첩자라는 중상모략을 펼치고 볼셰비키의 신문을 폐간시켰다.

그러나 러시아의 부유층과 그들의 제국주의 동맹국들은 케렌스키가 혁명을 배신했음도 전혀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러시아의 주적인 독일 황제(카이저) 빌헬름보다 러시아 노동자들을 더 두려워했다.

사회주의자 언론인 존 리드는 쿠데타가 나기 전에 참석한 한 저녁식사 자리를 이렇게 묘사했다. “차를 마시면서 나는 같은 테이블에 있던 11명에게 ‘빌헬름 황제와 볼셰비키’ 중 누가 낫다고 보냐고 물었다. … 한 명 빼고 모두 빌헬름 황제를 택했다.”

혁명에 겁을 먹은 그들은 혁명을 이끈 노동계급을 말 그대로 싹 쓸어 버리지 않는 한 만족하지 않을 태세다.

영국의 스파이 앨버트 스타포드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러시아가 자유화되려면 먼저 피바다가 휩쓸어야 할 것이다.”

케렌스키는 이런 반동 세력과의 협상에 목을 맸다. 그러나 저들은 조금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협상에 매달릴수록 케렌스키 자신의 운명이 그들에 의해 결정될 뿐이었다.

케렌스키는 6월에 코르닐로프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쿠데타가 일어나기 직전, 쿠데타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던 와중에도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에 동조적이라고 알려진 장군 한 명을 진급시켰다.

케렌스키가 뭘 몰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 자신이 쿠데타 음모의 일부였다.

케렌스키도 혁명 운동과 볼셰비키를 제거하고 싶어 했다. 그는 쿠데타를 획책하던 자들의 도움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 봤고 그들이 자신을 미래 정권의 지도자로 필요로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케렌스키는 심지어 쿠데타를 직접 이끌어 달라는 제안을 거절했다고 떠벌리면서 자신과 우익 장군들 간의 교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드러냈다.

러시아 혁명을 파괴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코르닐로프 장군

코르닐로프는 중대한 군사적 패배를 명분 삼아 행동에 나섰다. 9월 1일 독일군이 리가를 점령한 것이다.

코르닐로프는 부대를 퇴각시키는 척하며 자신에게 충성하는 장군들을 전방에서 떨어진 곳으로 “훈련”을 보내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다. 9월 8일 코르닐로프는 임시정부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처음에 임시정부는 코르닐로프에게 정부에 복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일은 정부의 허약함을 드러냈을 뿐이다. 정부 스스로 권위를 선언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코르닐로프는 정부에 협조할 이유가 없었고, 정부는 코르닐로프를 저지할 수단이 없었다.

소비에트와 소비에트로 조직된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권력이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들 사이에서 케렌스키의 신뢰는 바닥났기 때문에 케렌스키가 다른 좌파 정당들의 도움 없이 그들을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코르닐로프가 자신과 권력을 나누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케렌스키는 좌파 정당들에게 임시정부와 함께 코르닐로프에 맞서 싸우자고 호소했다.

볼셰비키는 다시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됐다.

공동전선

이때 레닌의 지도로 볼셰비키가 취한 전략은 오늘날 공동전선이라고 불리는 것의 초기 사례이다.

레닌은 9월 12일에 열린 중앙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코르닐코프에 맞서 싸울 것이고 싸우고 있다. 우리는 케렌스키의 군대와 똑같이 코르닐로프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케렌스키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케렌스키의 약점을 폭로해야 한다.”

코르닐로프에 맞서 볼셰비키는 케렌스키와 그에게 충성하는 자들과 동맹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들의 정치적 독립성과 케렌스키의 통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두 측면 모두 매우 중요했다.

한편으로, 볼셰비키는 케렌스키를 “차악”으로 보며 지지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자신들의 취약해진 적 케렌스키의 힘은 강해지고 쿠데타 이후 전쟁과 자본가들에 맞서 벌일 투쟁은 약화될 것이었다.

또한 볼셰비키에 대한 투쟁적 노동자들의 신뢰도 흔들렸을 것이었다. 투쟁적 노동자들은 볼셰비키가 케렌스키의 배신에 대항하는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에 볼셰비키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케렌스키가 형편없는 인간이긴 하지만 코르닐로프의 위협을 물리치지 못하고 쿠데타가 성공한다면 그것은 전체 노동계급에게 끔찍한 패배가 될 것이었다.

더구나 노동계급의 다수는 여전히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볼셰비키가 코르닐로프와 케렌스키 둘 모두에 반대해 함께 싸우자고 하면 가담하지 않을 것이었다. 아직은 말이다.

레닌은 공동전선을 조직함으로써 쿠데타를 패퇴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케렌스키의 신망을 떨어뜨려 노동계급 내에서 볼셰비키의 영향력을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당시 감옥에 있던 레온 트로츠키(지도적 사회주의자로서 당시 볼셰비키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정부를 체포해야 할 때가 온 거 아닐까요?” 트로츠키를 면회 온 수병들이 물었다.

“아니오. 아직은 아닙니다. 코르닐로프를 쏘는 총의 거치대로 케렌스키를 써야 합니다. 케렌스키는 그 다음에 처리하면 됩니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케렌스키에 맞선 투쟁의 형태를 바꾸고 있다.

“케렌스키에 대한 적대감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고, 그를 비판하는 말을 단 한 마디도 거둬들이지 않고, 그를 타도한다는 우리의 과제를 단념하지 않은 채로, 우리는 새로운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코르닐로프에 맞선 전쟁을 혁명적 방식으로 수행해야 한다. 대중을 끌어들이고, 대중이 일어서도록 하고, 대중이 분기탱천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볼셰비키를 정치적으로 반대한 좌파들조차 볼셰비키가 혁명 운동에서 핵심적 구실을 하고 그 때문에 노동자들 사이에서 존경을 얻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임시정부를 지지한 멘셰비키 당원 니콜라이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볼셰비키는 끈질기게 지치지 않고 활동한다. 그들은 대중 속에서, 공장에서 매일 쉼 없이 활동한다. 볼셰비키 수십 명이 페트로그라드 공장과 막사에 연설을 하러 다닌다. 날마다 다닌다.

“대중이 보기에 볼셰비키는 ‘내 사람’이다. 왜냐하면 볼셰비키는 늘 대중과 함께 있고, 공장과 막사의 중요한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아주 사소한 일에도 앞장서기 때문이다.

“대중은 볼셰비키와 함께 살고 함께 숨쉬었다. 대중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정당에 의탁했다.”

그랬기 때문에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에서 노동자들을 무장시키자고 호소한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트로츠키가 석방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만든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주도적 지위를 맡았다.

공장위원회는 페트로그라드 전역에서 노동자 4만 명 이상을 무장시키고 붉은 군대를 창설했다. 군수품 공장 노동자들은 혁명을 지키기 위한 용도로 수류탄과 대포를 생산했다.

트로츠키는 한 군수품 공장 노동자가 말한 것을 기록했다. 그 노동자는 “당시 하루에 열 여섯 시간을 일했”고 “대포를 거의 1백 개 만들었다.”

코르닐로프가 수도 페트로그라드를 향해 진격하자 철도 노동자들이 선로를 해체해서 열차를 엉뚱한 곳으로 보내 버렸다. 전신 노동자들은 붉은 군대에게 코르닐로프 부대의 움직임을 알렸다.

코르닐로프는 자신의 부대가 임시정부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 모두에게 적의를 품도록 하려 애썼다.

8월 27일 코르닐로프는 이렇게 선언했다. “소비에트를 지배하는 볼셰비키의 압력 때문에, 임시정부는 완전히 독일군 참모부의 계획에 맞춰 행동하고 있다.”

그러나 국경 지역 소비에트들이 이를 반박하는 증거를 제시했다.

코르닐로프 군대가 이동하는 길에는 그에게 부정적인 뉴스가 붙어져 있었다. 페트로그라드에 가까워질수록 병사들에게 장교들의 명령이 점점 더 먹히지 않게 됐다.

쿠데타는 총도 거의 쏘지 않고 저지됐다. 코르닐로프 부대 내에서 공공연한 반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한 장교의 설명에 따르면, “장교들에 대한 공격이 늘어났다. 사병들이 장교들에게 총을 쏘고 장교들이 모여 있는 곳의 창문으로 수류탄을 던지는 일 등이 벌어졌다.”

장교들을 린치하는 일이 어찌나 광범하게 벌어졌는지 멘셰비키가 주도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자제력을 발휘하십시오. 병사들이여! 린치를 멈추시오”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할 지경이었다.

“코르닐로프 사태”로 정부가 장군들과 관련돼 있다는 것이 폭로됐으며 그 결과 케렌스키의 명성은 누더기가 됐다. 반대로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강화되고, 10월로 가는 발판이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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