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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26:
새로운 사회를 표현하고자 한 새로운 예술 양식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사회를 구석구석 뒤흔들었고 예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차르 정권을 경멸했고, 제1차세계대전을 무의미한 살육이라 봤던 작가, 화가, 건축가들이 영감을 표출할 공간이 혁명으로 마침내 열렸다.

이들은 예술이 더는 권력자들의 노리개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그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수단이자, 갓 태어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예찬이었다.

이들의 예술은 단지 정치 선전 수단이 아니었다. 이들은 새로운 청중에 부합하는 새로운 형식을 발명하길 바랐다. 이런 전위예술은 앞선 예술 양식을 비판하는 데서 몹시 혹독했다.

화가들은 “(예술 매체로서) 회화는 죽었다”고 선언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현실을 재현하려는 예술을 거부하고 “추상적 진실”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 ‘스포츠맨’

알렉산더 로드첸코와 같은 사람들은 갓 등장한 사진술을 이용하면 찰나에 담긴 본질을 포착할 수 있다고 봤다.

로드첸코는 포토몽타주 기법(사진합성법)이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하고, 이전의 사진들과 완전히 종류가 다르고, 삶을 드러내는 데서 아주 사실적이어서 사진 그 자체가 삶인 그런 사진을 나는 만들고 싶다.

“나는 내 사진이 단순하면서 동시에 복잡하고, 보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그런 사진이길 바란다.”

알렉산더 로드첸코, ‘트럼펫을 부는 선구자’ ⓒ사진 출처 아트스페이스J

전통적인 조각도 “구성된다”는 개념으로 바뀌었고 건축술에 적용됐다.

디자이너 엘 리시츠키(대표작 ‘붉은 쐐기로 백군을 강타하라’)가 혁명 후 만든 작품들은 유럽 전역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는 이내 혁명 러시아의 문화 외교관으로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 건너 갔고 그곳에서 태동하던 바우하우스 운동[독일의 조형예술학교 바우하우스를 중심으로 예술 창작과 공학적 기술의 통합을 추구한 예술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엘 리시츠키, 붉은 쐐기로 백군을 강타하라

당시 많은 예술가들은 다양한 매체를 실험했는데 구스타프 클루치스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길모퉁이에 가판을 설치해 예술과 정치 선전을 결합한 영화, 음악, 연설을 틀었고 포스터를 전시했다.

그러나 “구성주의” 흐름을 따른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클루치스도 추상적 표현에 강하게 사로잡혔다. 그래서 클루치스가 만든 많은 정치 선전 작품은 서방 평론가들에게 “조야하다”고 비판받았다.

하지만 그런 작품만 했던 것은 아니다. 다른 작품들에서 클루치스는 그 이상을 시도했고, 예컨대 중력과 힘의 지배에 따라 우주를 누비는 행성들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런 작품들을 단지 정치 선전 수단이라고 여긴 사람은 없었다. 이런 구성주의자들의 시도는 몹시 성공적이었고 그 결과 [추상미술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을 뿐 아니라] “대중 예술”과 “고급 예술”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예술은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과정의 일부였지만, 바로 그 때문에 새로운 사회를 낳은 혁명과 한배를 탄 운명이었다.

수년에 걸친 전쟁과 뒤이은 내전 때문에 1920년대 말이 되면 러시아 혁명은 기진맥진해진다. 1917년에 권력을 장악한 노동계급은 크게 약화됐고, 10월 혁명의 유산이라고 할 만한 것은 국가를 운영하는 관료들뿐이었다.

혁명적 예술은 노동과 놀이 사이의 구분을 끝내고자 했다. 이런 예술은 ‘5개년 경제 계획’이나 노동수용소 따위와 공존할 수 없었다.

대신에 스탈린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자애로운 기계의 일부라고 생각하도록 해 줄 예술을 원했다.

대부분의 혁명적 예술가들은 자신의 과거 작품을 감췄다. 활동을 중단한 예술가들도 있었고 어떤 이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미명이 붙은 새로운 사조에 몸담았다.

혁명적 예술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25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