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21: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 전쟁에 충실하고 혁명을 배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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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혁명의 파도 맨 꼭대기에 오르려다 고꾸라진 인물이다. 그는 1917년에 노동자들에게 쫓겨나기 전까지 4개월 남짓 러시아의 총리였다.
러시아에서는 2월 혁명으로 구 지배체제인 차르가 타도됐다. 뒤이어 기회를 잡은 자본가 정치인들이 “임시정부”를 세우고 정부를 운영했다.
그러나 그 정부는 계속해서 위기를 겪고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 상태였다.
전투적인 혁명 운동, 그리고 정부와 나란히 존재한 소비에트(평범한 노동자와 병사, 농민으로 이루어진 평의회)라는 권력이 임시정부의 권위를 위협했다. 이런 상황에서 케렌스키는 임시정부를 구하려 헛된 노력을 쏟았다.
그는 변호사였지만, 대체로 농민으로 이뤄진 사회혁명당(SR)의 당원이었다.
토지소유권
사회혁명당은 지주의 토지소유권을 농민에게 줄 것을 주장하며 투쟁했으며, 혁명이 시작되자 동참했다. 그러나 그 당의 지도자들은 혁명이 자본주의 의회를 세우는 것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차르 정부가 무너지자 케렌스키와 그 당의 지도자들은 서둘러 권력을 자본가 정치인들에게 넘겨줬다.
대지주들과 공장 소유주들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케렌스키를 법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정부각료이면서 동시에 강력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부의장이기도 했던 케렌스키는 노동자들을 임시정부에 협조하도록 이끌 최고의 인물로 보였다.
케렌스키는 혁명 후 처음으로 열린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한 회의에서, 자본가 정부 안에서 노동자들을 대변하려고 장관직을 수락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자본가 각료들은 자신들의 정부에 빨간 칠을 하는 데 케렌스키를 활용했다.
임시정부는 곧 첫 번째 위기에 봉착했다. 노동자들의 급진적인 요구는 멈출 줄 몰랐고, 무엇보다 러시아가 제1차세계대전에서 발을 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가 전쟁을 계속할 거라고 영국과 프랑스에 약속하자, 성난 병사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임시정부 타도를 외쳤다.
이 위기[4월 위기로 알려진]를 통해 소비에트의 강력함과 임시정부의 허약함이 드러났다.
자본가들은 정부가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고 케렌스키 같은 사회주의자들을 더 많이 끌어들여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권력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정부에 참여해 소비에트가 가진 권력을 정부로 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케렌스키는 심지어 “소비에트는 자연사할 것이다” 하고 말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이런 생각을 지지했고 정부에 들어간 사회주의자들이 전쟁을 종식시킬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장관들은 전쟁을 끝내기는커녕 전쟁을 정당화하고 질질 끌었다. 이제 국방장관이 된 케렌스키는 더 나아가 전쟁에서 공세를 조직하기도 했다.
정부는 7월에 또다시 붕괴했고 이번에는 케렌스키를 총리로 하는 새로운 연립정부가 꾸려졌다. 케렌스키는 이제 모든 권력을 정부의 최상층에 집중시키려 했다.
그러나 [8월에] 군장성 리브르 코르닐로프가 정부에 맞서 우익 쿠데타를 시도하자 케렌스키는 정부를 지키고자 노동자들을 무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쿠데타 위협이 사라지자마자 다시금 권력 집중을 시도했다.
사회혁명당은 자본가 정부를 떠받치는 것과 성장하는 노동자 운동의 선두에 서는 것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 결국 분열했다. 혁명이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결정적 충돌을 뜻하는 만큼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갈라져 나온 좌파 사회혁명당은 올바른 결정을 하고 소비에트 편에 섰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반대쪽으로 넘어갔고 그 대가를 치렀다. 케렌스키는 10월에 노동자들이 벌인 두 번째 혁명으로 타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