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28:
“빵, 평화, 토지!” – 농민과 노동자를 이어준 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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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는 자본주의가 발달한 방식의 영향으로 공업지구와 도시의 노동자들에게 엄청난 힘이 있었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전체 인구 대비 비중이 몹시 작았다.
러시아 인구의 절대다수는 농민이었기 때문에, 혁명을 완수하려면 농민의 지지를 얻는 것이 필요했다.
1861년에 차르가 농노해방령을 내리자 농노는 지주의 사유재산이나 다름없던 처지에서 형식적으로 벗어났다. 하지만 “해방”된 농민에게 남은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레닌은 1911년에 “농민들이 여전히 찢어지게 가난하고 혹사당하고 무지몽매하며 봉건지주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썼다.
1860년대의 “개혁”은 오히려 지주와 귀족에게 훨씬 이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차르 시대의 지주에 맞서 들고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군대에 강제 징집되고 식량 가격까지 폭등하자 농민들의 인내심이 바닥나고 말았다.
1916년 러시아령 중앙아시아 지역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제국의] 주둔군을 공격했다. 투르키스탄에서는 7월 8일부터 13일까지 농민들이 페르가나 지방을 점령했다. 계엄령이 투르키스탄 전역에 걸쳐 선포됐다.
그렇지만 에드워드 데니스 소콜이 [《러시아령 중앙아시아의 1916년 반란》에서] 썼듯이 “이 운동들은 체계적 조직이나 응집력이 거의 없었다.” 농민 운동은 노동자 운동과 결합되지 않는 한 지속적이지 못했다.
농민은 노동자와 다른 식으로 착취를 겪는다. 농민은 자신을 착취하는 지주를 체제의 일부로 여기기보다 그저 개인이라 여긴다.
농민이 이 억압자들의 재산을 뺏거나 이들을 죽이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농민 집단은 지주의 토지나 가축, 작물 등을 강탈하고는 다시 각자의 땅뙈기를 돌보러 돌아가기 일쑤였다. 농민은 노동자와는 달리, 하나의 집단으로 행동하는 게 지속적이지 못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혁명이 농민 계급의 지지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병사들의 대다수도 주로 이 계급에서 충원됐다.
참상
제1차세계대전의 참상 때문에 농민과 노동자가 힘을 합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이 형성됐다. 전쟁에 반대해 병사 평의회들이 조직됐는데, 그것은 대개 농민으로 구성됐다. 병사 평의회를 통해 농민들은 노동자 평의회(혁명의 중심지였던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 기반을 둔)와 교류했다.
전선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병사들은 러시아제국 전역으로 흩어지며 그곳에 혁명적 조직의 기초를 세웠다. 사회혁명당은 주되게 농민을 조직하려 애썼다. 사회혁명당은 혁명적 투쟁에서 농민을 결정적 계급이라고 봤다.
레닌은 1905년에 이렇게 물었다. “농민이 혁명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혁명이 농민에게 줄 수있는 것은 무엇인가?”
1917년에 가서 볼셰비키는 그 답을 찾아냈다. 농민에게 주어졌던 “자유”는 농민 스스로 먹고살 수단조차 보장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빵, 평화, 토지”라는 슬로건으로, 차르 체제와 그것을 옹호하는 부르주아지에 맞서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관계를 하나로 묶어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국가가 토지를 통제한다는 볼셰비키의 강령은 10월혁명 동안과 그 이후에 수정됐다. [국가가 아니라] 농민들 자신이 직접 토지를 장악했으며 그 결과 소지주 계급이 만들어졌다. 이는 장차 혁명 과정에서 여러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오늘날 노동계급은 농민에 비해 세계적 수준에서 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혁명 정당이 [노동계급뿐 아니라] 모든 사회집단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다.
노동계급은 다른 모든 집단이 벌이는 투쟁의 맨 앞에 서서 등대 구실을 해야 한다. 레닌이 말했듯이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토지와 자유를 위한 투쟁일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착취에 맞서는 투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