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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45: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지 않았다면 혁명은 패퇴했을 것이다

100년 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낳았다. 본지는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한 기사를 연말까지 번역 연재하려고 한다.

러시아는 농업 중심의 후진적인 사회였으며 노동계급의 수는 적었다. 그렇지만 1917년 10월, 블라디미르 레닌과 볼셰비키가 노동계급에게 권력을 잡으라고 호소한 것은 옳았다.

당시 러시아는 우익 쿠데타냐 사회주의 혁명이냐는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차르 독재를 무너뜨린 2월 혁명 이후 들어선 임시정부는 [대중에 대한] 통제력을 빠르게 잃었고 권위도 추락했다. 임시정부가 평화를 바라는 대중의 기대에 못 미치자 점점 더 많은 노동자와 농민은 임시정부에 환멸을 느꼈다.

"무장하라! 무장하라!" 1919년 헝가리 소비에트의 포스터

공식 권력은 임시정부에 있었지만,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의 권한이 갈수록 커졌다. 그러자 군 지휘부를 비롯한 반동적 세력은 이같은 혁명적 상황을 끝장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지 않았다면, 우익은 소비에트를 깨부수고 노동계급이 성취한 것을 모조리 파괴했을 것이다.

볼셰비키는 러시아 혁명이 국제적으로 확산돼야 최종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도 이해했다.지도적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주장했듯이 “러시아 혁명이 서구에서 반란의 회오리를 일으키거나, 전 세계 자본가들이 합심해 러시아 혁명을 질식시켜 버리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것은 어려움에 처한 혁명을 정당화하려고 만들어 낸 논리가 아니었다.

1905년에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해도 “유럽 노동계급의 직접적 지원이 없다면 러시아 노동계급은 권력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대다수 사회주의자들은 러시아의 우선 과제는 “부르주아 혁명”을 거쳐 자본주의가 발전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러시아의 후진성을 국제적 맥락에서 봐야 함을 이해했다.

페트로그라드 같은 도시를 중심으로 자본주의가 급성장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인구 중 소수였던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경제를 멈출 수 있었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소수였지만, 노동계급의 사회적 비중과 잠재적 힘은 수에 비례하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 규모 때문에 노동계급이 혁명을 완수하려면 훨씬 거대한 집단인 농민의 지지를 확보해야 했다.

한편, 러시아 혁명이 전 세계에서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는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1916년 아일랜드의 부활절 봉기, 1918년 독일 킬[북부의 항구도시] 수병 반란을 포함해 전 세계 곳곳에서 [혁명적]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헝가리에서는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소비에트 공화국을 이끌고 있었다.

혁명적 물결은 독일 전역으로 퍼져 나가 카이저[독일 황제]가 타도됐고, 독일은 전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혁명의 조건은 아일랜드와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존재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 나라들에는 노동계급을 지도할, 볼셰비키 같은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이 없었다.

그렇다고 볼셰비키는 손 놓고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제3인터내셔널을 설립해 전 세계 혁명가들을 결집시키려 했다. 각고한 노력 끝에 볼셰비키는 각 나라에서 노동자들이 사회민주주의 정당에서 빠져나오도록 할 수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 등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새로 만들어진 공산당에 가입했다.

혁명적 물결은 1919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1920년 독일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군사 쿠데타 시도를 좌절시켜 노동계급의 잠재적 힘을 과시했다.

유럽에서 혁명적 물결이 가라앉았을 때조차 볼셰비키는 포기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제국주의에 맞선 동맹으로 식민지 민중에게 기대를 걸었다.

용기 있게 도전하는 사람이 언제나 성공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용기 있게 도전하지 못하는 혁명가의 앞에는 사기 저하되고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길만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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