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⑧:
2월혁명은 순전히 자발적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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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낳았다. 본지는 올 한 해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한 기사를 꾸준히 번역 연재하려고 한다.
많은 제도권 역사학자들은 누가 러시아 혁명을 조직했는지를 놓고 혁명의 정당성을 판단한다.
이들은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1917년 10월 혁명을 ‘쿠데타’로 본다. 왜냐하면 볼셰비키가 혁명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차르를 끌어내린 2월 혁명은 자발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혁명을 상세히 묘사한 레온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를 보면 이런 구분이 얼마나 조야한지, 그 의도가 뭔지 알 수 있다.
2월 혁명의 승자는 노동자와 병사였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썼듯이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다. 누가 이 혁명을 이끌었는가?”
대다수 평론가들은 이 문제를 “만능 공식에 대입해 아주 간단히 해결했다. 즉, 아무도 혁명을 이끌지 않았다. 혁명은 저절로 일어났다.”
이런 “자발성 숭배론”은 “어제까지만 해도 [차르 밑에서] 평온하게 관리, 판사, 검사, 변호사, 기업가, 장교 노릇을 하다가 오늘 갑자기 혁명에 아부하느라 분주한 양반들”의 입맛에 딱 맞는 것이었다.
이것은 “혁명이 일어나는 동안 멍하니 있던” 사회주의자들을 속 편하게 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조직
2월 혁명이 자발적이었다는 것은 절반은 진실이었다. 노동자와 병사 자신의 행동이 결정적이었으며 대다수 정치 조직은 노동자들 사이에 영향력이 없거나 혁명을 바라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예외였지만, 극심한 탄압 때문에 “지도부가 없는” 상태였다. 지도부는 유형지에 있거나 망명 중이었고, 활동가는 뿔뿔이 흩어져 있었으며, 간행물은 금지됐다.
그런데도 전국의 노동자와 병사가 조직도 없이 동시에 들고일어난 것은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언론과 거의 모든 정당이 반대했는데도 국가에 맞서 닷새 동안 투쟁을 지속한 것도 경이롭다는 말로 모자랐을 것이다.
노동자와 병사는 그저 무정형의 대중이 아니었다. 이들은 각자의 작업장과 주둔지에서 자신의 경험, 집단적 토론, 그리고 지도자들을 통해 의식을 발전시켰다.
노동자들은 거대한 파업과 자유주의 개혁가들의 배신, 무엇보다 군대에 의해 진압됐던 1905년 혁명의 경험에서 배웠다. 병사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바로 지배자들 탓이고 노동자들이야말로 동맹임을 이해하게 됐다.
이런 토론이 발전하는 데 조직된 혁명가들과 그들의 간행물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트로츠키는 “대체로 볼셰비키에게 교육받은 의식적이고 단련된 노동자들이 2월 혁명을 이끌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런데 노동자와 병사는 차르를 무너뜨렸지만 자본주의와 전쟁을 지지하는 자들이 혁명을 도둑질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혁명을 되찾는 데는 훨씬 더 예리한 논쟁이 필요했다. 또 훨씬 더 강력하게 조직될 필요가 있었다.
“의식적이고 단련된 노동자들”이 볼셰비키로 몰려들었고 이것이 상황을 완전히 바꿨다.
차르를 몰아내는 것은 수도에서 일어난 봉기만으로도 가능했다. 그러나 러시아 국가 전체를 무너뜨리려면 전국에 걸친 봉기가 필요했다. 볼셰비키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획득했기 때문에 수도의 노동자들이 너무 이르게 행동하지 않도록, 다른 지역의 노동자들이 너무 늦게 행동하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
또 국가의 심장부를 급습하는 무장봉기를 조직하려면 어느 정도의 비밀 유지가 필수불가결했다. 만약 이런 일이 ‘자발성’에 맡겨졌다면 국가는 눈치채고 대비했을 것이다. 봉기가 설사 일어난다 해도 말이다.
결정적으로, 군 장성, 사장 그리고 개혁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갖은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볼셰비키 덕분에 후퇴를 반대하는 주장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러시아 혁명의 결말이 그 전후의 혁명들과 완전히 달랐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트로츠키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지도하는 조직이 없다면 대중의 에너지는 피스톤 실린더에 담기지 않은 증기처럼 흩어져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사물을 움직이는 동력은 피스톤이나 실린더가 아니라 증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