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⑬: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주의를 뛰어넘는 작업장 조직을 건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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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낳았다. 본지는 올 한 해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한 기사를 꾸준히 번역 연재하려고 한다.
2월 혁명으로 차르 독재가 무너지자, 노동자들은 새롭게 얻은 정치적 자유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전까지 노동조합은 수가 적고 규모도 작고 또 탄압받았다. 그런데 혁명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나 초반에는 정당들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했다.
페트로그라드의 금속 노동조합은 조합원이 거의 없었지만 4월에 5만 명으로 늘었고 여름 동안 그 3배가량으로 또 늘었다.
1917년 6월 러시아 전체에 노동조합이 거의 1천 개 있었으며 조합원은 1백40만 명에 이르렀다.
10월에는 노동조합 2천 개에 노동자들이 대략 2백만 명 조직돼 있었는데, 이는 전체 임금 노동자의 10퍼센트에 해당했다.
그러나 노동조합만 성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2월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공장에 위원회를 세웠다. 이 공장위원회는 대규모 총회를 통해 전체 노동자들의 부름에 답하고 책임을 져야 했다.
1917년에 그런 위원회들이 대략 2천1백51개로 집계됐다. 이들 위원회 대표들은 도시 단위로 “소비에트” 즉 노동자평의회를 구성했는데, “소비에트”들의 권위는 국가의 권위에 비할 만했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이 성취한 가장 중요한 경제적 요구, 즉 8시간 노동은 노동조합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전혀 아니었다.
공장위원회
공장위원회들이 직접 행동을 통해 8시간 노동을 강제했으며 소비에트가 그것을 구속력 있는 규범으로 선포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생활 수준이 악화하자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들이 벌어졌고 노동조합은 이 속에서 성장했다.
저임금 비숙련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몰려들었으며 파업을 주도했다. 파업의 요구 중에는 여성에게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라는 것도 있었다.
서구의 초창기 노동조합들이 보였던 직종별 노동조합 경향(직업이나 부문, 직책에 따라 노동자들이 따로 조직되는)이 러시아에서는 훨씬 약했다. 관료주의의 영향도 더 적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행동에 나섰을 때, 유급 상근 관료들로 구성된 노동조합 기구의 관여에서 자유로웠다.
1917년 여름이 되면 금속 노동조합의 상근자가 1백 명을 넘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현장 노동자 출신이었고 또 대부분은 헌신적인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이들에게는 보존해야 할 노조 기금이 있었다. 또한 노동자와 사장 사이를 중재하도록 돼 있는 조직(노조)을 돌봐야 했다.
초반에 주요 투쟁들이 승리한 결과로 사장들은 임금 단체협상을 일정 정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러나 이 때문에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에게 타협을 종용하는 위치에 놓이게 됐다.
부문 간의 갈등도 되살아났다. 단체협상 전체를 유지하려고 특정 부문 노동자에게 더 낮은 임금 인상을 수용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장들이 자신들의 손실을 줄이고 좌파 정부를 약화시킬 목적으로 공장 폐쇄와 대량 해고를 이용했다.
이러한 경제적 사보타주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자들의 공장 통제뿐이었다. 그렇지만 정부는 운동이 이 방향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으며 사장들의 “경영권”을 지켜 주려 애썼다.
사장들은 이에 대해 8월에 벌어진 우익 군장성 코르닐로프의 쿠데타 시도로 ‘보답’했다.
무장한
페트로그라드 노동조합들은 노동자들을 무장시키고 도시 방어에 나섰다. 철도 노동조합 빅젤은 열차를 멈춰 쿠데타 군대가 도시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이 사건들로 정부와 노동자 중 누가 사회 운영에 더 적합한가 하는 문제가 더 선명하게 제기됐다.
그 결과 노동조합들이 양극화됐다. 멘셰비키들은 정부를 지지하길 원했고 볼셰비키들은 소비에트가 정부를 타도하기를 원했다. 이들은 이전까지는 노동조합 활동가로서 종종 협력했었다.
이제 공장위원회들은 점점 볼셰비키 쪽으로 결집해 소비에트 권력을 준비했다. 반면 노동조합은 구조상 변화에 더 더뎠고 노조 상층부는 여전히 멘셰비키가 다수였다.
혁명은 러시아의 노동조합들을 만들어 내고 동시에 노동조합주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정치적 도전을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