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캘리니코스 논평:
독일의 연정 수립 난항은 유럽 중도계 세력의 취약성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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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협상을 둘러싸고 쏟아지는 논의들을 보면, 영국 측은 취약하고 혼란을 겪는 반면 유럽연합 측은 강하고 단결돼 있다는 것이 통설이다. 영국 측이 취약한 것은 맞지만 유럽연합 측이 꼭 여유 만만한 것은 아니다.
유로존 경제가 드디어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11월 넷째 주에 공개된 수치들을 보면, 2017년 4분기 유로존 경제는 전년 대비 3퍼센트 성장할 듯하다.
이 회복을 이끌고 있는 것은 수출 붐이 일고 있는 독일이다. 하지만 옥에 티가 있으니, 바로 정치 상황이다.
9월 독일의 총선 결과를 보면 오늘날 서방 자본주의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독일에서도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는 중도계 정치 세력들의 기반이 축소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 기민당·기사당 연합(이하 기민당)과 중도좌파 사회민주당이 독일 정치를 양분하는 주요 세력인데, 두 정당은 합쳐서 53퍼센트를 득표했다. 1949년 서독이 수립된 이래 두 정당이 거둔 최악의 선거 결과이다.
한편 이주민과 유럽연합에 적대적인 극우 정당 ‘독일을위한대안’당은 약진했다. 연방의회에서 처음으로 의석을 획득했다.
사민당 대표 마틴 슐츠는 2013년 이래로 기민당과 함께해 온 대연정을 중단하겠다고 선거 직후 선언한 바 있다. 슐츠는 사민당이 메르켈과 너무 동일시되는 면이 있다며 야당으로 남아 지지층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메르켈은 더 작은 정당들인 녹색당, 자유민주당과 연정 협상을 벌였다. 두 정당 모두 지조 없는 신자유주의 정당이지만, 11월 20일에 자민당 지도자 크리스티안 린트너는 연정 협상을 중단했다. 독일 자민당은 갈수록 유럽연합에 회의적으로 되고 있다.
연정협상이 중단된 까닭은 린트너가 유로존 통합 강화 움직임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신임 중도계 대통령인 에마뉘엘 마크롱이 유로존 통합 강화안을 제안했는데, 메르켈은 이를 수용하는 모양새를 내고 싶었지만 린트너는 그럴 의사가 없었다.
손해
이 쟁점 너머에는 더 정치공학적인 계산도 깔려 있다. 자민당은 2009년부터 2013년까지 기민당 주도의 연정에 참여했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너무나도 참담했다. 그 다음 선거에서 자민당은 의석을 죄다 잃었다. 린트너는 또다시 자민당만 손해 보는 꼴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파이낸셜 타임스〉 칼럼니스트 볼프강 뮌차우가 말한 것처럼, 린트너는 “타협을 통해 상시적 대연정을 꾸리는 것에 불만에 가득 찬 기민당 투표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속셈도 있을 것이다.
불행한 사민당은 이 와중에 다시 호랑이의 아가리에 제 머리를 집어 넣었다. 결국 슐츠가 메르켈과의 연정 협상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독일 대통령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와 사민당 의원들이 슐츠에게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다. 사민당 의원들은 메르켈이 재선을 실시하겠다는 위협을 실천으로 옮기면 자기 의석을 잃을까 봐 걱정한다.
만일 사민당이 다시금 대연정을 이루기로 한다면, 사민당의 득표 기반이 더 침식될 소산이 크다. 좌우에서 기성체제에 적대적인 정당들이 그 기반을 갉아먹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사민당과 기민당은 집권했을 때 독일의 거대 은행과 기업들의 이익에 복무했다. 다시 말해 구조조정을 하고 긴축의 강도를 높여 왔고, 그 결과 한때 세계에서 가장 탄탄했던 복지국가가 꾸준히 훼손됐다.
독일은 2010~2015년 유로존 위기의 타격을 다른 나라들보다 적게 받았다. 그러나 갈수록 많은 노동계급 사람들은 불안정한 조건으로 내던져지고 있다.
기민당과 사민당으로 대표되는 주류 기성체제의 합의에 맞서겠다고 자임하는 정당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투표 의향이 더욱 커지게 된 사회적 배경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반란을 주도하는 세력이 린트너 같은 무리나 독일을위한대안당이라면 비극일 것이다. 좌파 정당인 디링케[독일어로 ‘좌파’라는 뜻]는 9월 총선에서 9.2퍼센트를 득표하며 미세하게 성장했다. 하지만 디링케는 너무나도 쉽사리 우파들이 유럽연합 반대 정서를 주도하도록 내줬다. 기존의 독일 정당 질서가 위기로 향하는 지금, 디링케가 성장하려면 반드시 바뀌어야 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