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투쟁의 중심에 있어야 할 혁명적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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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혁명을 고찰하는 크리스 하먼의 칼럼 중 마지막이다.
나는 지난 글에서 혁명을 시작하는 데는 혁명정당이 필요하지 않지만, 혁명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혁명정당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혁명정당은 과연 무엇인가? 이 의문에 대한 두 가지 흔한 이해 방식들이 있으나 모두 틀린 주장이다.
첫째는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이 영국의 노동당이나 유럽 대륙의 사회민주주의 당과 같은 ― 그러나 좀더 좌파적인 ―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1백여 년 전 영국의 첫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사회민주주의연맹의 방식이었다. 1950년대 초 구 공산당도 “사회주의에 이르는 영국적 길”을 표방하며 이렇게 하려 했다.
의회에서 벌이는 선거 활동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계급투쟁 사상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기회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작업장이나 거리에서 실제로 벌이는 투쟁을 대체할 수는 없다.
수많은 사람들을 정치로 끌어들이는 대규모 사회적 위기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은 의회 회의실도 아니며, 그런 전투가 의회 일정에 맞춰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선거 운동에 초점을 둔 협소한 전략은 잘해야 비효과적일 뿐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재앙을 부를 수도 있다.
혁명정당에 대한 두번째 관점은, 노동자들에게 혁명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자신들이 노동자들을 위해 혁명을 만들겠다고 공언하는 엄격히 조직된 단체가 곧 혁명정당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단체들은 상황이 진짜로 절박해지면 노동자들이 결국 자신들에게 의지하게 되리라고 기대한다. 그 때까지 그들은 행여라도 노동자들에게 개혁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게 될까 봐, 자본주의의 특정한 폐해에 맞선 투쟁들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이것은 19세기 프랑스 혁명가 오귀스트 블랑키의 관점이자 1920년대 초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 공산주의자이던 아마데오 보르디가의 관점이기도 했다.
여러 면에서 이 좌파 엘리트적 방식은 좌파 선거주의적 방식의 거울 이미지다. 그들은 모두 혁명가들이 대중을 대리해 사회를 변혁한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들에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구실은 좌파 성향의 국회의원이나 무장한 좌파 투사에게 수동적인 지지를 제공하는 것뿐이다.
진정한 혁명적 방식은 이와 매우 다르다. 이 방식으로는, 오직 노동자들이 자기 손으로 권력을 장악할 때만 계급사회의 공포와 결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기 위한 힘과 인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그들 자신의 투쟁을 통해서밖에 없다.
거대한 사회적 위기와 혁명적 격변이 일어나는 시기에는 대다수 노동자들이 혁명가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지배계급을 전복하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과는 거리가 먼 시기에도 혁명적 사회주의에 이끌릴 수 있는 소수의 노동자들이 항상 있다.
자본주의는 민중이 자신이 받는 압력에 맞서 사소한 방식으로나마 끊임없이 저항하게 만든다. 이러한 저항은 임금 인상을 위한 단기간의 파업이나 주택 사유화에 맞선 운동, 인종차별에 맞선 시위,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항의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시점이든 여러 투쟁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투쟁들 속에서 사람들은 체제의 우선순위에 도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체제 전체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스스로 던지기 시작한다.
진정한 혁명 조직은 이러한 사람들을 규합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사상을 명확히 하고 체제에 맞서 성공적으로 투쟁하는 방법을 집단적으로 배울 수 있게 말이다.
그러려면 토론이 필요하고 과거의 투쟁 경험에서 배우기, 체제를 분석하기, 체제에 맞선 오늘날의 투쟁들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결론과 사상들을 다시 나날이 벌어지는 투쟁에 적용하는 것도 필요하다.
혁명정당의 목표는 각각의 작업장과 지역에 가장 전투적인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해 서로 힘을 강화하고, 서로 약점을 보완하며, 서로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혁명가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서로 다른 투쟁에 개입하고 그 투쟁들을 더욱 긴밀히 연결하는 작업을 할 수 있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려는 지배계급과 언론의 시도도 막아낼 수 있다.
이러한 구실은 투쟁의 수위가 낮을 때조차 매우 중요하다. 패배한 경험은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반동적인 절망에 더욱 쉽게 빠지게 한다. 그러나 승리한 경험은 지배계급이 노동자들과 빈민을 완전히 제압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
투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모든 작업장과 지역에 활동가들의 네트워크가 있는 혁명조직의 존재는 결정적으로 중요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이 ‘전위’ 조직에 반대한다고 말할 때 그들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장 투쟁적인 노동자들이 그들의 힘을 결합해서 체제에 맞서 효과적으로 싸우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싸움은 여러 형태를 띤다. 오랜 기간 이러한 싸움은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진지전” ― 더디게 전진하는 장기전 ― 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 기간에 혁명가들은 노동계급의 조건을 개선하고 한두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혁명적 정치로 설복하기 위해 수많은 소규모 전투에 개입한다.
이러한 전투의 전형적 형태는 노동조합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나 복지삭감에 반대하는 투쟁,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 파업에 대한 연대 건설 등이다. 선거 공간을 활용해 광범한 대중에게 좌파적 초점을 제시하는 것도 이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러한 활동은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조금씩 성장시킨다. 이 네트워크들은 “진지전”이 그람시가 말한 “기동전” ― 수많은 사람들의 정서가 하룻밤 사이에 변할 수 있는 갑작스럽고 긴박한 대결 ― 으로 전환될 때 그 진가를 드러낸다.
혁명조직이 약하거나 없으면 민중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뀔 수 있고 모든 것은 예전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혁명조직이 강력하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회 전체를 전진시키는 데 필요한 방향을 일러줄 수 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정당으로 힘을 결집하고 현실의 투쟁과 운동에 뛰어들어 정당을 건설하는 일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조민정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