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군부 무력 진압 시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실체와 “혁명의 현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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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시절, 군부 핵심이 정권 퇴진 촛불 집회 진압을 위해 군대 투입을 논의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군인권센터는 3월 8일 기자회견을 열고, 촛불 집회로 인한 ‘소요 사태 발생시 무력 진압’을 논의한 일이 국방부 내에 있었다고 폭로했다.
국회 탄핵소추 가결 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등이 논의를 주도했는데, 헌재가 탄핵을 기각해서 시위가 격화되면 위수령을 발동하고 특전사 등 진압 가능 부대가 나서는 안을 모의했다는 것이다.(위수령은 일부 지역의 치안을 군대가 통제하는 것으로 대통령이 선포할 수 있다. 유신 직전과 1979년 부마항쟁 때 박정희가 위수령을 선포했다.)
이 폭로가 사실이라면, 군부 내 핵심이 퇴진 촛불을 무력으로 진압할 논의를 한 것이다.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정권 퇴진 운동에 맞선 박근혜의 친위 쿠데타였을 것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아래서도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려고 얼마든지 “민주주의”, “문민 통치” 같은 기존 통치 질서와 공언을 뒤집고 유혈 참사를 일으킬 수도 있음이 드러난 셈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100년이 넘은 영국에서도 1970년대 초에 북아일랜드 사태 진압을 위한 군부 쿠데타 논의가 있었다. 2010년 그리스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1918년 독일 노동자와 사병들의 혁명을 막으려고 사회민주당에 정권을 넘긴 독일 군부는 결국 1933년 초에는 노동운동과 진보·좌파를 쓸어버리려고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해 나치가 집권하는 길을 열어 줬다.
프랑스 지배자들은 1934년 나치의 의회 공격을 막아 낸 노동계급의 투쟁과 사기가 오른 덕에 1936년 공산당이 포함된 민중전선의 집권을 용인했고, 5월 대중 파업에 커다란 양보를 했다. 하지만 그들은 1940년 독일 나치 군대의 점령에 협조하며 꼭두각시 비시 정부를 통해 이 양보들을 원상 회복하려 했다.
1973년 칠레에서는 미국의 후원을 등에 업은 군부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좌파 정부를 뒤엎고 좌파와 노조원들에게 유혈낭자한 복수극을 펼쳤다. 그때까지 칠레는 라틴아메리카 나라 중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가장 오래 정착된 극소수 나라에 속했다.
한국 노태우 정부 때에는 일부 시위 진압 경찰에게 M16 총기가 지급된 적이 있었고, 군부 내에서 쿠데타를 검토했음이 폭로된 바 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도 지배 계급인 자본가 계급의 지배가 위험해졌다 싶으면 계급 독재로서의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다.
도박
그렇다면, 2016년 말이나 2017년 초에 군부 쿠데타나 군대의 무력 진압이 없었던 것은 운이 좋았던 일일까? 실제로 당시에 민주당 대표 추미애가 계엄령 소문이 있다고 했다. 낌새를 눈치 챈 일부 우익도 태극기 집회에서 군대가 나서라고 촉구했다.
당시 계엄령 검토 의혹 제기는 화제가 됐지만, 사람들이 진지하게 고려하지는 않았다. 계엄령은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당시 정권 퇴진 여론과 촛불 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정치 상황상 국회가 계엄령에 찬성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때문에 박근혜가 계엄령을 선포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전격적인 유혈 쿠데타를 각오한다는 것인데, 운동의 기세 때문에 이런 도박은 성공할 가망이 거의 없었다.(그래서 위수령을 검토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 그런 쿠데타 시도는 5·16의 반복이 아니라 혁명에 의한 카운터펀치를 부를 가능성이 더 컸다. 당시 대중의 기세가 너무 커서 검찰, 법원, 국회 모두 운동에 양보했다. 게다가 그 시기에는 노동계급의 투쟁성이 (발휘되지는 않았어도) 잠재해 있었다.
모두가 경멸하는 대통령의 쿠데타 시도에 대중은 격분했을 것이고, 사병들도 동원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순식간에 혁명적 상황이 조성됐을 것이고, 당황한 지배계급 내 일부가 박근혜를 비합법적으로 자리에서 제거해 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대중의 분노와 사기는 오히려 올랐을 것이고, 대중의 격렬한 저항 태세가 결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런 저항의 최종 성패는 결정돼 있지 않다. 박근혜와 군부가 도박을 했다면, 노련하고 명확한 판단에 기초한 단호함을 갖춘 지도력의 존재가 중요했을 것이다. 반면,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의 지도자들 일부는 12월 초순에 촛불 집회를 중단하자고 했다. 좌파가 강력히 반대했고 대중이 호응해 계속 대규모 집회가 유지됐는데, 돌아보면 촛불 중단은 매우 위험한 시도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지배계급은 이미 정치적 실패가 명백한 박근혜 정부를 지키려고 그런 위험 부담을 감수했을 것 같지 않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들겨 봐도 이런 답 말고는 잘 나오지 않으니, 청와대나 군부에서도 소수가 고려만 하고 실행에 옮길 생각은 포기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헌법재판소라는 헌법 절차를 통해 박근혜를 퇴진시킨 것이 결과적으로는 혁명으로 발전할 작은 가능성을 억제하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방어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혁명은 점진적 과정인가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런 분석은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에서도 혁명이 단지 점진적으로 다가올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적 가능성(현실성, 실재성)을 지닌 사건이라는 점도 보여 준다.
1934년 봄 프랑스에서 나치의 쿠데타가 공산당·사회당 공동 시위에 부딪혀 좌절되자 트로츠키는 프랑스 혁명의 서곡이 울렸다고 선언했다.
글로벌 장기 침체 시기에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정상 상태를 준수하고 적응하려는 개혁주의는 전략적으로 부적절하다. 퇴진 촛불 때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어떻게든 운동이 국회 탄핵과 조기 대선이라는 헌정 절차로 수렴되게 하려고 애썼다. 국회 탄핵 후에는 집회도 멈추려 했다. 만일 국회 탄핵 이후 12월 중순에 퇴진 촛불을 멈췄다면, 일부 우익에게 오판할 기회를 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헝가리인 마르크스주의자 죄르지 루카치는 레닌주의 정치의 핵심은 “국제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사건 모두를 혁명의 현실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대중의 자발성을 뒤따르다가 오히려 혁명적 자발성의 발목을 잡으려 했던 나머지 좌파들과 달리 레닌과 볼셰비키가 결정적 순간에 대중과 함께 혁명적 권력 장악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다.
개혁주의자들의 소심함과 달리, 한국 지배자들 다수는 오히려 ‘혁명의 현실성’을 계산에 넣었고, 그래서 당시에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더 심화·안정시키는 쪽으로 비교적 영리한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심화시킨 것은 ‘혁명의 현실성’이 주는 압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앞으로도 오판을 안 한다는 보장은 없다. (임박한 가능성은 아닐지라도) 제국주의 시대는 “전쟁과 혁명의 시대”, 격변의 시대이므로 누구든 큰 실수를 범할 수 있다.
‘혁명의 현실성’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심화시킨 동력이었다는 역설과 현재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불안정성이 점증하는 상황은 혁명이냐 개혁이냐 하는 전략 문제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