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유럽 낙태 여행》:
유럽 낙태권 운동 활동가들이 들려 주는 생생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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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출판사 봄알람이 유럽 낙태권 운동의 활동가들을 인터뷰해 책을 냈다. 봄알람 출판사 성원인 저자 4명은 아일랜드, 폴란드, 프랑스, 네덜란드, 루마니아를 직접 여행하며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 책에 소개된 유럽 낙태권 운동 활동가들의 경험은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교훈이 녹아 있다. 책은 쉽게 잘 읽힌다.
아일랜드와 폴란드
근래 대규모 낙태권 운동이 벌어진 아일랜드와 폴란드의 사례가 가장 관심을 끈다.
보수적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와 폴란드에서 낙태 금지로 인해 여성들이 겪은 고통이 가슴 먹먹하게 그려진다.
저자들이 아일랜드를 방문했을 때, ‘수정헌법 8조’(낙태 금지 조항) 폐지 운동이 한창이었다고 한다. 수십 년간 굳건하게 투쟁해 온 여성 활동가들의 헌신과 결의, 변화에 대한 열망이 인터뷰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2016년에 폴란드 보수집권당의 낙태 전면 금지 시도에 맞서 ‘검은 시위’를 이끌었던 좌파 정당 라젬(“함께”라는 뜻) 활동가들의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2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시위 당일, 바르샤바는 여성들의 것이었다!” 투쟁을 통해 여성들이 변화해 가는 과정, 대중 투쟁으로 보수집권당의 공격을 막아낸 승리의 경험은 감동적이다.
과거 루마니아의 사례는 매우 충격적이다. 공격적인 출산 강요 정책을 펼쳤던 차우셰스쿠 정권은 낙태를 전면 금지해 “여성의 신체와 인권을 처참히 짓밟았다”. 임신한 여성은 출산할 때까지 정부의 감시 대상이었다. 여성이 유산하면 경찰이 수술실에 들어와서 낙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환자 다리 사이를 검사했다. 차우셰스쿠 집권 기간 동안 위험한 낙태로 여성 수만 명이 사망했고, 신생아 수만 명이 버려졌다.
위 세 나라에서 벌어진 불법 낙태의 끔찍한 실상은 낙태 반대론자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입증한다.
부분 합법화된 나라들
임신 기간과 사유에 따라 낙태가 제한적으로 합법화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현실은 어떨까?
프랑스는 임신 12주까지만 낙태가 허용된다. 프랑스 낙태권 운동 활동가는 “임신 12주는 충분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낙태 허용 기간의 제한 때문에 “1년에 5000명가량의 여성이 임신 24주까지 낙태가 허용되는 네덜란드로 가서 수술을 받는”다고 한다. 게다가 네덜란드에서는 외국인에 대한 보험처리가 되지 않아 의료 비용이 비싸고, 여기에 이동·숙박 비용까지 고려하면 사실상 “경제력에 따라 낙태 가능 여부가 달라진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파라다이스”로 평가받는 네덜란드조차 낙태권 제약으로 여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네덜란드 산부인과 의사이자 ‘파도 위의 여성들’ 설립자 레베카 곰퍼츠에 따르면, “여성이 5일간의 ‘숙려 기간’을 거쳐 임신 중단 결정을 내린 뒤, 국가의 승인을 받은 12개 진료소에서 낙태를 받는 경우만 합법이다”. 지정 진료소가 아닌 곳에서 낙태약을 주거나 낙태 시술을 한 의료인은 모두 처벌 대상이다.
또한 “국가 지정 진료소가 너무 부족해 면담을 잡으려면 보통 3주를 기다려야 한다”. 수도인 암스테르담에도 낙태 진료소가 없다고 한다!
곰퍼츠는 “어느 병원에서나 임신 중단이 가능하고, 내국인뿐 아니라 외국인 여성에게도 무료로 제공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사례는 낙태 전면 합법화 요구가 여성들, 특히 노동계급과 서민층 여성들에게 왜 중요한지 잘 보여 준다.
온전한 낙태권의 필요성에 대한 프랑스의 노장 낙태권 활동가의 주장은 명쾌하다.
“낙태는 여성의 기본권입니다. 설령 임신 9개월이 됐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그러겠다고[낙태하겠다고] 결정하면 할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과 트럼프처럼] 항상 여성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있고, 그들은 실제로 힘을 행사해요. 커다란 권력에는 커다란 저항이 필요합니다.”
이 책에 수록된 여성 활동가들의 주장이 모두 명확한 대안을 제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세계 곳곳에서 분투하는 여성 활동가들의 경험과 고민을 정리한 이 책은 한국에서 낙태권 성취를 염원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