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땅에서 힘을 겨룬 두 강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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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한편으로 김일성과 이승만의 전쟁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열강 간의 국제전이었다. 후자가 더 주된 측면이었다.
윌리엄 스툭이 지적하듯이 “한국의 궁극적인 운명은 외부세력에 의해 결정되었”고 “그들에게 한국은 복잡한 국제 장기판에서 하나의 말에 불과했다.”
김일성의 남한 공격 염원은 매우 컸지만 소련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집요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1949년 말까지도 전쟁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는 북한이 38선 상에서 감행한 소규모 충돌에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그에게는 제국주의 세력 간에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1950년 초에 들어서 태도를 바꾼다. 전쟁을 승인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그가 한반도 민중에게 관심 있어서가 아니라 제국주의 간 세력 균형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스탈린의 전쟁 결정 배경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들이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마오쩌둥이 중국 내전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동북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바꿔놓은 동시에 동북아시아의 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얄타체제는 깨지게 된 것이다.
1950년 1월 22일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한 회담에서 “새로운 중·소 조약 체결이 얄타협정 위반 아니냐”는 마오쩌둥의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그렇소. 위배됩니다. 그러나 그게 어떻단 말이오? … 그리고 우리는 미국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렇게 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이에 대응해 미국은 일본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일방적인 강화조약에 나섰다. 미국은 대소련 봉쇄 전략의 일부로 일본을 재무장시켰다. 이런 과정은 다시 소련·중국·북한 블록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에버렐 해리만은 “일본 점령에 참여해 줄 것을 노리고 한반도의 남부를 양보했던 소련은 일본이 모두 미국의 세력권 아래 놓이자, 이에 대항하여 한반도 전체를 자기의 세력권 아래 놓이게 하려고 한국전쟁의 도발을 지원했다”고 말했다.
이것은 냉전 초기 미국의 봉쇄 정책을 만든 조지 케넌도 말하고 있는 바다.
1950년 1월에 발표된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선언도 스탈린의 전쟁 결정 의지를 굳히게 만든 계기였다. 애치슨 선언은 한반도를 미국 방위선 밖에 놓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애치슨 선언이 북한의 공격을 유도할 의도가 있었는지는 별개로 하더라도 소련과 북한이 전쟁을 낙관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이미 미국이 중국에서 장제스가 패배할 때 손을 뗀 바가 있다는 사실은 그들을 더욱 고무하고 있었다.
소련과 북한의 낙관적 전망과 달리 미국은 남한에서 쉽게 손을 뗄 수는 없었다. 남한은 장제스의 중국과는 다르게 미국의 직접 후원 아래 세워진 정권이었다. 트루먼이 1949년 6월에 말했듯이 “한반도는 … 공산주의 통치와 서로 맞붙어 경쟁을 벌이고 있는 하나의 시험장”이었다.
미국에게 한반도는 자신의 봉쇄 정책을 실험할 첫 무대였던 것이다.
몇몇 관찰자들은 스탈린이 ‘중국과 미국을 이간질시켜 중국을 미국 쪽으로 붙지 못하게 하고, 한편으로 미·중 양쪽 세력을 모두 약화시키기 위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후 결과론적인 해석에 가까울 뿐 실증된 바는 없다. 오히려 존 루이스 개디스가 지적하듯이 한국전쟁에서 “가장 앞을 내다보지 못한 지도자는 스탈린이었다.”
한국전쟁의 결과는 스탈린이 애초에 의도한 것과 달리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극동에 끌어 들였다. 뿐만 아니라, 참전한 중국군에 대한 소련의 군사적 원조는 종종 인색했는데 이는 마오쩌둥의 환멸만 자아냈다.
중·소 간 갈등의 기원은 오히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후에 벌어진 사태에서 싹텄다고 할 수 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전쟁을 승인하고 지원했지만 한편으로 자신이 개입했다는 사실은 철저히 은폐하려 했다.
예를 들어, 당시 연대급까지 배치된 소련의 군사고문단은 전쟁계획의 세부적인 차원까지 결정했지만 북한군과 함께 38선 아래로 진출하는 것은 회피했다.
또, 중국군의 참전을 엄호하기 위해 전투기 사단과 전투조종사를 참전시켰지만 그들의 작전 반경은 39도선 이북으로 제한됐다. 소련군이 전쟁포로가 되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소련군을 대신해 미군을 상대한 것은 중국군이었다. 중국은 소련의 참전 압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은 ‘대만 해방’, ‘티벳 해방’ 등의 문제와 내전 동안 피폐해진 중국의 내부 사정 때문에 소련의 지원이 절실했다.
또한 마오쩌둥 자신은 아시아의 티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탈린에게 입증해야 했다. 그래서 마오쩌둥은 내전 승리가 임박하자 ‘대소련 일변도 정책’을 발표한 바 있다.
와다 하루끼와 같은 학자들은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쟁의 본질이 ‘중·미 전쟁’으로 바뀌었다고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스탈린이 설정한 범위 안에서만 그럴 수 있었다.
스탈린은 중국군의 세부적인 작전까지 통제했다. 전쟁의 시작과 휴전협정에 이르기까지 최종 결정권자는 스탈린이었다.
김일성은 전쟁 초기 몇 개월 간은 전쟁의 주연인 듯했지만 곧 엑스트라로 전락했다. 남한군 작전권이 미군으로 넘어간 것과 꼭 마찬가지로 북한군의 작전권은 중국군으로 넘어갔다. 김일성은 작전 통제권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가 없었다.
이승만 역시 자율성을 누리지는 못했다. 1950년 10월, 연합군이 38선을 넘었을 때 북한에 대한 점령통치를 담당한 것은 유엔군이었지 한국 정부가 아니었다.
물론 이승만은 휴전 협상이 시작되자 대대적인 ‘휴전반대 운동’을 일으키고, 일방적인 포로석방으로 미국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미국은 이른바 ‘에버레디 계획’을 통해 그가 자신의 통제선을 넘으려 할 경우 제거하려고 했다.
소련과 미국 모두 전황이 불리해졌을 때 각각의 꼭두각시 정부를 버릴 것을 검토했었다. 소련은 압록강까지 유엔군이 진격하고 중국이 참전을 주저하자 미련없이 북한을 포기하려 했다.
1950년 12월 28일자로 적혀 있는 한 극비문서를 보면, 중국군이 참전하고 다시 38선이 돌파되자 미국은 한국군의 소개를 심각하게 고려했다.
박명림이 전하는 이 문서에서 미국은 소개된 한국군이 “특히 필리핀이나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1951년 중국군의 5차 공세가 실패로 끝나면서 전쟁은 지금의 휴전선과 비슷한 곳에서 지루한 소모전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후 2년 간 더 진행된 전쟁은 어떻게 전쟁을 끝낼 것인가를 둘러싼 전투였다.
김일성은 중국군의 5차 공세 실패 이후 휴전을 원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생각은 달랐다.
루마니아 노동당 정치국원 보드나라스의 메모를 보면, 스탈린은 “미국이 앞으로 2년 내지 3년 동안 아시아 지역에 묶여 있게 될 것이므로 이 기회를 잘 활용해 동구 공산국가들의 군사력을 증강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저우언라이와 한 회담에서 스탈린은 “북한이 잃는 것은 인명뿐”이라며 전쟁의 지속을 주장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덜레스는 한국에서 휴전 조약을 맺을 경우 인도차이나반도에 미칠 영향을 두려워했다. 한국전쟁이 끝나면 중국이 남쪽으로 호치민을 지원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중국을 확실하게 공격해서 우리의 분명한 우위를 모든 아시아에 보인 다음에야 한국 문제 해결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 소련·중국 양쪽 진영 모두 상대방을 근본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드러나게 됐을 때야 정전 협정에 진지해졌다.
미국과 소련 제국주의 국가들의 개입은 남북한 민중에게는 엄청난 재앙을 몰고왔다. 그들은 남북한 민중의 삶과 처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미군과 남한군이 학살한 민간인들의 숫자는 파악조차 되고 있지 않다. 다만 4·19혁명 직후 ‘전국 피학살자 유족회’로 접수된 신고 건수가 1백만 명에 이른다는 점만 확인된다. 이것은 미군이 북한지역에서 자행한 ‘인종청소’를 방불케 한 공중폭격 피해를 제외한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가 말하듯이 “진정한 비극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순전히 한국인들끼리의 내부 충돌이라면 식민주의, 민족분단, 외국간섭 등으로 야기된 엄청난 결과들이 해결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극은 이 전쟁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