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민족 단결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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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협상이 미국의 강경한 태도 때문에 교착 상태에 빠지자, 진보진영 내에서는 남·북한이 힘을 합쳐 판문점 선언을 이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 왔다. 가령 이런 주장이다. “미·중 관계의 적대적 원심력이 강해질수록 남·북한은 우호적 구심력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진보계 지도자 상당수는 판문점 선언 이행이 더딘 데 대해 미국의 간섭을 주로 비판한다. 반면, 문재인 정부를 향해서는 미국의 태도를 살피느라 남북 화해·협력 정책에서 후퇴하지 말라고 촉구한다. 한반도 평화 문제에서 만큼은 문재인 정부가 여전히 잘하고 있다고 보는 것을 반영한다.
문재인 정부가 평화 체제 진전에 기여하리라는 전망은 문재인 정부와 협조 관계를 구축한다는 구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평화 체제를 위해 계급을 초월한 국민적 연합을 형성한다는 대의명분 하에 말이다.
제국주의는 민족 내부적으로 단결을 촉진하는 외부 압력으로 흔히 여겨진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정반대로 계급 갈등을 오히려 날카롭게 만드는 내적 동인이었다. 제국주의의 실체가 자본주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내내 사드 배치, 대북제재 동참, 한·일 ‘위안부’ 합의 존속 등 한미동맹을 우선하는 선택을 해 규탄받아 왔다. 지난해 9월 러시아 대통령 푸틴을 만나 대북 원유 공급 중단을 적극 설득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문재인이었다.
2017년 5월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에서 문재인은 한미동맹을 “위대한 동맹”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트럼프의 적대적 발언 때문에 한반도에 긴장이 증대하던 상황이었다. 만약 트럼프 정부가 대북 정책을 급격히 전환하지 않았다면, 올해 들어 문재인 정부가 남북 화해·협력을 추진할 여지를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도 문재인 정부는 남북 관계에서 미국보다 앞서나가는 선택은 삼가고 있다. 문재인은 종전선언을 체결해도 한미동맹 약화와 주한미군 철수는 없다고 거듭 못 박았다. 정부는 내년도 국방예산을 크게 늘렸는데, 이는 문재인 정부 자신의 부국강병책인 동시에 한미동맹의 약속을 이행하는 조처이기도 하다. 지난해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의 공동성명은 군비 증강 계획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정부는 올해 예산안에 이 약속을 충실히 반영했다. 북한 공식 매체가 이를 두고 “판문점 선언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비판할 만하다.
견인?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문재인 정부를 압박해 한반도 평화를 일관되게 지향하도록 견인하는 게 가능할 것이라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자본주의·제국주의 세계 체제에 얽히고설킨 한국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넘어 문재인 정부가 그렇게 견인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하에서의 경험을 돌아보면, 외려 정반대의 일이 벌어질 공산이 훨씬 크다. 즉, 자유주의 포퓰리스트 정부와의 계급 협조 압력에 진보·좌파가 견인되는 상황 말이다.
노동조합 상급단체 지도자들 대다수도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에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8월 양대노총이 북한 직총(직맹)과 함께한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는 노동조합 상급단체 지도자들이 문재인 정부와의 협력을 다지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더 나아가,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국민적 단결에 조직노동자 운동이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조직노동자 운동이 문재인 정부와의 협조에 참여하는 것은 자본가 계급의 정치조직인 문재인 정부가 노동자를 공격하는 것에 저항하는 데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오히려 노동계급이 자신의 크고 작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제대로 발휘해야 민족문제나 반제국주의적 과제를 성취할 가능성도 열린다. 자유왕래처럼, 정부 당국 간 협상에서 실종되다시피 한 요구도 다시 떠오를 수 있다. 과거에 통일운동이 대중적으로 부상한 것은 모두 1960년 4월 혁명이나 1987년 6~8월 대중투쟁 같은 대규모 저항의 여파 속에서였다.
따라서 노동자 운동은 문재인 정부의 우경화에 맞선 투쟁을 고무하고 조직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와는 독립적으로 제국주의·군사주의에 반대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사드 배치 철회,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폐기, 군비 증강 반대 같은 요구들을 중심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