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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성실하지만 피상적인 강준만 교수의 페미니즘 이슈 정리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 한국 여성의 인권 투쟁사》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17000원, 400쪽

강준만 교수(이하 존칭 생략)가 페미니즘 열풍 속에서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 한국 여성의 인권 투쟁사》라는 책을 내놨다.

월간 《인물과 사상》으로 잘 알려진 다작의 유명 작가 강준만이 우리 시대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인 페미니즘을 소재로 다뤘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은 인기를 끄는 듯하다.

저자 강준만은 자신을 “관찰자”이자 “기록자”로 자처하며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한국 온라인 세계를 달군 다양한 페미니즘 이슈들을 400쪽에 걸쳐 나름의 구도로 성실히 정리했다. 온라인 상 페미니즘 논란에 관심은 있으나 일일이 따라가기 어려웠던 독자들에게는 이런 갈무리가 자료로서 유용한 측면이 있을 듯하다.

저자는 남자인 자신은 페미니스트로서는 “자격 미달”이라며 겸손한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저자는 단지 중립적 기록자는 아니다. 여성 비하를 일삼는 악플러들이나 마초적 태도를 보이는 남성 지식인 등 성평등 열망에 재 뿌리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그에 맞서 페미니스트들을 옹호한다. 성차별에 반대하는 독자들, 특히 급진 페미니즘에 매력을 느끼는 여성 독자들은 이 대목에 공감할 법하다.

강준만은 페미니즘을 둘러싼 ‘성 전쟁’의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짚고, 이를 바탕으로 남녀 양쪽의 소통에 기여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최근 여성운동에서 분리주의적 페미니즘이 다시 등장해 득세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여러 반발과 논란이 파생되고 있는 복잡한 상황을 의식한 듯하다.

저자는 이 논쟁에서 단지 사실관계(“팩트”) 공방만 하기보다는 그 이면의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고 옳게 지적한다. 메갈리아 등 분리주의 페미니즘이 득세한 맥락은 물론이고, 그에 대해 일부 젊은 남성들이 반발한 맥락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그 맥락을 과연 정확히 짚었는지와는 별개로, “사실 물신주의” 대신 맥락을 중시해야 한다는 저자의 접근법은 적절하다.

하지만 몇몇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전반적 관점은 물질적 조건들의 분석보다는 이데올로기와 담론 분석에 치우쳐, 지나치게 단순하고 피상적인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애초에 저자가 보인 의욕과는 달리,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쟁의 역사와 맥락을 정확하게 보여 주지는 못한다.

각 사건과 쟁점들에 대한 정리는 대부분 몇몇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소개하는 것에 그쳐, 그들 주장의 관념적 급진성과 약점을 제대로 조망하지 않는다.

온라인 공방에 맞춰진 초점

이 책의 주제는 무려 30년 가량의 “한국 여성의 인권 투쟁사”이지만 저자의 관심은 정부와 기성체제에 맞선 실질적 투쟁보다는 압도적으로 온라인 논란에 맞춰져 있다.

저자는 “사회운동의 역사는 사이버 세계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규정할 정도로 온라인 공간을 지나치게 격상시킨다. 사실 이는 단지 강준만뿐 아니라 요즘 반차별 운동 대부분에서 유행하는 견해다.

물론 온라인은 사회운동의 유용한 수단으로 자리매김되고 있고, 부차적으로 선용한다면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운동의 핵심 특징을 바꿨다거나 중심적인 수단이라는 주장은 지나치게 부풀려진 얘기다. 근래의 노동자 파업이나 박근혜 퇴진운동에서도 드러났듯,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파업과 가두 시위 등 다양한 형태의 오프라인 집단 행동이 가장 유력하고 효과적인 운동 수단이다. 온라인은 이를 보조할 수는 있을지언정 대체할 수는 없다.

환상을 거둬 내고 현실을 직시하면, 온라인이 실제 세력관계를 고스란히, 정확하게 반영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온라인 댓글 논쟁은 익명성 뒤에 숨어 무책임하고 왜곡된 형태로 벌어지기 쉽다. 국정원이나 드루킹 일당의 사례에서도 보듯, 온라인에서는 여론 조작도 더 손쉽다. 이런 환경에서는 ‘가짜 뉴스’나 근거 없는 비방이 마치 사실처럼 퍼져나가기도 쉽다. 따라서 온라인 “여론”을 곧 현실 세력관계의 반영으로 여기면 분석의 출발점에서부터 균형을 잃게 된다.

한 사례로, 강준만은 영화배우 유아인의 ‘애호박’ 댓글 논란에 무려 10쪽이나 할애하며 잘못된 ‘오빠 페미니즘’이자 대표적 ‘백래시’(반동) 사례라도 되는 양 다뤘다. 그러나 이는 과장일 뿐 아니라 당시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의 공격이 과도하다는 유아인의 반발에도 일리가 있었다.(관련 기사: 〈노동자 연대〉 232호, ‘유아인과 페미니즘 논쟁’)

이처럼 강준만은 자본주의 국가의 근본적 성격과 근본적 분단에서 비롯한 계급 갈등은 다루지 않은 채, 온라인 일각에서 벌어지는 ‘여혐’ 대 ‘남혐’의 논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본질적인 동역학을 놓치고 만다.

가령 그는 여성의 노동시장 대거 진출과 이런 물질적 변화가 남녀 모두의 조건과 의식을 꽤 바꾼 점을 간과한다. 이 점이 지난 30년간 한국 여성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이자 특징인데도 말이다. 또한 체계적 성차별이 (강준만의 명명에 따르면) “국가 페미니즘” 시기였다는 민주당 집권기에도 왜 여전했는지 피해 나간다.

사실 이에 대한 분석은 역사유물론과 자본주의 비판에 기초한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자들(아우구스트 베벨, 클라라 체트킨,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등이 그 선구자인)이 발전시켜 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 차별 반대 운동에 주도적으로 동참했지만, 분리적 페미니즘 노선의 고유한 약점에 대해서는 비판적 문제제기도 해 왔다. 하지만 저자 강준만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기여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적 좌파에 대한 예의 그 무지한 편견도 여전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메갈리아와 ‘오빠 페미니즘’의 대립항

강준만이 온라인 상 페미니즘 논쟁을 다룰 때 가장 큰 약점은 ‘몇몇 유명 급진 페미니스트의 주장 대 가부장제에 찌든 마초적‍·‍반동적 남성들의 반응’이라는 구도 위주로 다루는 것이다.

저자는 메갈리아의 탄생을 “한국 여성운동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다른 시기는 여러 해씩 묶어 다루는 반면, 메갈리아가 탄생한 2015년은 그 한 해만 한 장 전체를 할애한다. 거기서 메갈리아를 전적으로 옹호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소개하는 데 역점을 둔다.

저자는 메갈리아와 워마드의 충격 요법의 배경에는 그간 차별을 겪어 온 여성들의 분노가 있다고 인정한다. 메갈리아와 일베를 동일선상에 놓고 말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는 것이다. 완전히 옳은 지적이다. 이 책의 제목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도 ‘페미니즘은 좋지만, 메갈리아 같은 페미니즘(가령 ‘미러링’)은 허락할 수 없다’며 윗사람인 척하는 일부 남성들의 거만한 태도를 비꼰 말이다.

그러나 저자가 메갈리아가 드러낸 분리적 페미니즘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지지 일색으로만 다룬 것은 딱하다. 심지어 그는 분리적 페미니즘에 대한 일리 있는 비판까지 반동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강준만이 찬양 일색으로 소개한 2000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이하 100인위) 사례는 반성적으로 돌아볼 사례다. 당시에 성폭력을 분명하게 반대하면서도 “피해자 중심주의”나 “2차가해” 개념 등 100인위 방식의 역효과를 비판한 마르크스주의적 좌파도 있었다. 100인위가 유행시킨 두 도그마적 개념에 대한 반성은 불충분하지만 근래 페미니즘 진영 내에서도 제기됐다.(관련 기사: 〈노동자 연대〉 209호,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토론회에서 제기됐어야 했을 쟁점들’)

사실 분리적 페미니즘의 남 대 여 구도는 그 출발점에서 남성과 여성이 각각 모두 동질적이라는 가정을 깔고 있다. 이는 남성이 모두 여성 살해나 성폭력의 잠재적 가해자라는 주장과 손쉽게 연결된다. 강남역 살인 사건 당시 메갈리아 식 페미니스트들의 주요 주장도 마찬가지였다. 한 조현병 환자의 망상에 의한 살인을 두고 ‘여성혐오 살해’라고 규정한 것에서 더 나아가, 그 사건이 곧 ‘우리 사회가 여성혐오 사회’이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주장의 증거인 양 비약했다.

그러나 여성차별 관념을 가지고 있는 남성도 대개는 여성에 대한 폭력‍·‍살인을 저지르지 않는다. 여성차별 관념을 수용할 때조차 전폭적이고 일관된 방식으로 수용하는 남성은 비교적 소수이다. 다수는 모순된 방식으로 수용한다. 지난 수십년 동안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결혼‍·‍출산‍·‍육아‍·‍가사노동 등에 대한 남성의 평균적 의식과 실천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남녀 노동자의 단결 투쟁이 벌어졌고, 이것이 남녀 모두의 성 의식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남성과 여성 모두 삶의 조건과 의식이 동일한 집단이 아니다. 계급에 따라 엄청난 격차가 존재한다. 지배계급(자본가나 국가 관료층)과 노동계급의 삶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노동계급 사람들은 사회의 모든 중요한 결정권과 통제력에서 소외돼 있다. 이처럼 소외는 사회의 계급 분리에서 비롯한다. 소외의 효과인 범죄, 비행, 편견 등도 계급에 따라, 개인(계급 사회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 어떻게 맞서 왔는지 등)에 따라 양상이 다르다.

그런데도 저자가 분리적 페미니즘의 프레임으로 모든 문제를 환원하다 보니, 성평등에 반발하는 일부의 반응이 마치 전체 남성 의식의 표준이라도 되는 양 쉽게 비약하는 경향을 보인다. 심지어 모든 남성들에게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유전자화”돼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여성 차별의 원인을 남성의 고유한 의식(본성의 발현) 문제로 환원시키는 셈인데, 이런 식으로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문제 해결 가능성도 찾기 어렵다. 여성 차별적 관념이라면 남성뿐 아니라 상당수 여성들도 공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식이라면 ‘자매들의 연대’도 불가능한데 여성 해방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또한 이는 차별을 체계적으로 양산하는 사회 체제가 아니라 남성 개개인에게 화살을 돌려, 차별의 진정한 근원에 도전하기 어렵게 만든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 삼가기

강준만이 친문 인사들의 잘못된 진영 논리를 실명 비판한 것은 옳다. 저자는 열성 친문 인사들이 문재인 정부와 페미니즘 가치가 충돌할 때 페미니즘을 부당하게 공격하며 정부의 잘못에 면죄부를 제공하는 행태를 보여 왔다고 지적한다. 이들을 가리켜 “정치 종교적 오빠들”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그 비판 대상에는 문재인 정부를 위한 ‘어용 지식인’이 되겠다고 선언한 유시민, 여성 비하적 책들로 악명 높은 청와대 행정관 탁현민, 그를 감싸는 문성근‍·‍김미화 등 친문 인사들, 미투 운동에 진영 논리를 들이대거나 미투 감별사를 자처한 김어준‍·‍조기숙‍·‍최민희 등이 포함돼 있다.

그런데 강준만은 정작 이들이 비호하는 정부 수장인 문재인에 대한 비판은 삼간다. 문재인이야말로 여성들의 성평등 염원을 배신하고 있는 문제적 ‘오빠’인데도 말이다. 강준만은 워마드와 불법촬영 항의 시위 주최측에 대한 온라인 일각의 비난은 문제 삼지만, 놀랍게도 그 시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자 강점을 한 줄도 다루지 않는다. 주류 여성운동 지도자들과 다르게 문재인 정부의 배신을 날카롭게 성토하고 있는 점 말이다.

이런 한계는 이전 민주당 정부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강준만은 2000년대 중반부터 여성운동이 위축되기 시작한 것이 당시 남성들의 온라인 상 ‘백래시’ 때문인 양 주장한다. 그리고 당시 여성운동 위축의 상징으로 《이프》 지 폐간이나 여성부가 여성가족부로 변경된 것을 꼽는다.

이런 분석은 부정확하다. 분리적 페미니즘 경향의 《이프》 지가 운영난을 겪은 것은 그런 식의 페미니즘 노선에 대한 평가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여성부가 여성가족부로 변경된 것도 ‘저출산 위기’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의식적 대응이었다. 여성 정책의 초점을 노동력 재생산 통제를 위한 가족 정책에 맞춘 결과였던 것이다.

하지만 강준만은 친민주당 경향의 포퓰리스트 지식인답게, 노무현 정부를 호주제 폐지 등을 이뤄낸 “국가 페미니즘”의 주역으로 칭찬할 뿐, 그 정부가 여성 노동자들에게 한 배신과 자본주의 정부로서의 한계는 일절 거론하지 않는다. 또한 당시 주류 여성단체들이 추구한 ‘주류화(개혁주의) 전략’이 자본주의 국가를 헛되이 성평등의 지렛대로 삼았기에 그 정부와는 독립적인 운동을 이끌 수 없었고, 따라서 그 정부의 배신에 대처하기 어려웠으며, 환멸을 느끼는 기층 대중과 교감하기도 어려워졌다는 점을 보지 못한다. 당시 여성운동의 위축은 바로 이 점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도 말이다.

조악한 좌파 매도

저자가 틈만 나면 꺼내드는 좌파 매도도 터무니없다. “진보‍·‍좌파가 보수진영 못지 않게 가부장제에 찌들었다”, “가부장제 중독은 보수와 진보를 초월해 존재한다”, “여성혐오엔 보수와 진보의 구분이 없다” 등등. 앞서 언급된 몇몇 친문 인사들의 보수적 행태를 두고 곧장 ‘좌파는 다 그렇다’는 식으로 엉뚱하게 비약하거나, 조직 노동계급과 진짜 좌익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에 기초해 비난하기 일쑤다.

하지만 그가 한통속인 양 뭉뚱그린 집단 내에는 구분선이 존재한다.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를 떠받친 집단과 그에 맞서 싸운 세력들은 그 기반과 실천이 엄연히 다르다. 특히 혁명적 좌파는 민주당 정부로부터의 독립적 정치와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강조해 왔다. 앞서 살펴봤듯, 이는 여성 문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저자와 수많은 분리적 페미니스트들이 2008년 ‘민주노총 김00 성폭력 사건’이 노동운동의 ‘가부장성’을 드러낸 대표 사건인 양 얘기하지만, 정작 당시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대부분과 노동운동 단체들은 가해자의 행위와 일부 간부의 은폐 의혹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강준만이 ‘진보진영은 여성 동지들을 시녀 취급했다’거나 ‘치어리더로 소모했다’고 말하는 것도 일부 사례를 침소봉대해 좌파에 대한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편견을 재생산하는 것일 뿐이다.

오히려 혁명적 좌파는 여성 차별의 근원과 해방의 급진적 전망을 발전시키는 데서 중요한 기여를 해 왔다. 강준만의 주장과 달리,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이등 시민’으로 취급 받아 온 이유를 계급을 초월한 ‘오빠’들의 여성차별적 의식 탓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젠더 이분법적 정치는 차별을 체계적으로 양산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 남성 개개인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려 정의로운 열정을 낭비하게 만든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현재와 미래 노동자를 출산하고 돌보는 일(노동력 재생산)의 부담을 개별 노동계급 가족, 특히 그 내의 여성들에게 떠넘기는 것을 통해 사활적인 이득을 얻는다. 게다가 여성 차별은 지배계급이 노동계급을 이간시키는 데도 매우 유용하다.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체계적으로 여성 차별이 유지‍·‍강화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와 그 수혜자들인 지배계급에 도전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전략을 발전시킬 때만 여성해방이라는 비전도 실현 가능하다. 강준만과 그가 무비판적으로 편드는 분리적 페미니스트들은 바로 이 점을 놓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의 전략적 공백과 맹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그런 공백과 맹점은 강준만 식 포퓰리즘으로는 메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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