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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교수의 신간 《엄마도 페미야? 젠더 갈등과 세대 갈등의 소통을 위하여》 서평:
급진 페미니즘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

다작의 유명 작가 강준만 교수의 신간이 얼마 전 나왔다. 다소 도발적 제목의 《엄마도 페미야?》이다.

넓은 의미에서 페미니즘은 성평등 사상과 운동을 가리키고 그 내에는 때로 상충하는 여러 조류가 있다. 강준만 교수가 논하는 페미니즘은 오늘날 한국에서 영향력이 큰 급진 페미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급진 페미니즘은 사회의 근본 분열이 젠더, 곧 남성과 여성 사이에 있고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있다고 보면서 여성 평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저자 강준만 교수는 급진 페미니즘의 일부 측면에 꽤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 2018년에 출판된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에서 급진 페미니즘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과는 논조가 사뭇 다르다.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밝힌다. “나는 그간 페미니즘의 ‘정체성 정치’가 불가피하다며 지지해온 사람이지만, 날이 갈수록 악화되기만 하는 젊은 남성들의 ‘반反페미’ 정서를 그대로 방치하거나 비난하는 걸로 대처하는 페미니즘 진영의 안이한 대응 방식엔 동의하기 어려웠다.”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24쪽, 14,000원

사실 지난 몇 년간 급진 페미니즘의 과도한 측면에 대한 반감과 비판이 늘어 왔는데, 강준만 교수의 변화도 이와 같은 맥락 속에 있는 듯하다.

급진 페미니즘은 여성 차별에 맞서는 데서 일정한 구실을 했지만, 일부 과도한 측면들은 성평등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반감을 키워 왔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 측의 성찰이 필요하다는 그의 문제의식은 매우 적절하다. 그의 전제들이 마르크스주의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문재인 정부의 배신에서 반사이익을 얻은 우파가 급진 페미니즘의 약점을 이용해 젠더 갈등을 부추기며 집권까지 한 상황에서 인기 있는 다작 저술가의 문제제기는 토론과 논쟁을 활성화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성찰을 자극하는 문제들

저자는 페미니즘에 반감을 갖는 20대 남성이 많은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문재인 정부가 “‘페미니스트 코스프레’를 했지만 이대남과 관련된 정책들에서 위선과 무책임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문재인 정부의 위선을 꼬집을 뿐 아니라 페미니즘 진영도 성찰할 바가 있다고 지적한다. “‘남자 대 여자’라고 하는 전통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집단주의적 접근으로 [여성 차별에 대한] 남성 전체의 연대 책임을 물어” 반감을 키워 왔다는 것이다.

또한 페미니스트들은 문재인을 친親페미니스트로 여기며 ‘박원순 사건’과 ‘윤미향 사건’에서 ‘내로남불’을 보여 줬다고도 강 교수는 비판한다.

그는 이것이 페미니즘이 ‘상징 투쟁’, ‘진영논리’, ‘정치적 당파성’, ‘집단주의’ 등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페미니즘 진영은 생각이 다르면 죄다 ‘백래시’나 ‘맨스플레인’로 치부한다는 것이다.

페미니즘 측의 이런 독단적 태도가 특히 이대남의 반감을 낳고 페미니즘을 고립시킨다고 한다.

이는 강 교수 자신의 경험도 반영된 불만인 듯하다. 지난 4월 저자가 〈한겨레〉 칼럼에서 페미니즘의 “‘피해 서사’의 한계”를 지적하자, “예상대로” 곧 “맨스플레인”이라고 저격당했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혹 독선과 오만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 성찰해야 한다”며 이렇게 항변한다. “메타페미니즘 담론에 대해 남자가 말하는 건 주제넘고 싸가지 없고 불경不敬한 짓인가? … 왜 협력할 수 있는 파트너를 적敵으로 만드는가?”

이런 지적은 당연하다. 본지도 급진 페미니즘의 일부 과도한 주장과 실천이 평범한 사람들의 반발을 낳고 젠더 갈등을 부추기는 데 일조해 왔다고 지적해 왔다.

특히, 남성 일반을 잠재적 성범죄자나 가해자로 취급하는 주장은 실천에서 평범한 여성과 남성이 단결해 강력한 투쟁을 만드는 것을 가로막고, 운동 안에서 여러 불필요한 반목과 갈등, 분열을 낳았다.

그런데 좌파의 대다수도 급진 페미니즘을 수용하며 분열을 주도하거나, 그에 추수하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비판의 자원

강준만 교수는 성별 이분법적 페미니즘이 젠더 갈등을 부추기는 효과를 낸다는 점은 여러 사례를 들어 보여 준다. 그러나 그는 급진 페미니즘의 이론적 약점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급진 페미니즘은 근본적으로 이 사회를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위계적 체제로 본다. 이 사회의 근본적인 분리를 계급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와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급진 페미니즘은 여성 차별을 유지하고 이로부터 득을 보는 사람들이 지배계급이 아니라 남성 일반에 있다고 보며 남성을 규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급진 페미니즘이 득세하는 여성운동은 결국 정치적으로 개혁주의로 경도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급진 페미니즘의 중간계급 지향 리더들은 자본주의 내에서 공직 진출을 통해 성평등을 실현하려는 전략(‘성 주류화 전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물론 여성이 공직에 더 많이 진출하는 것을 반대해야 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페미니스트들이 공직에 진출해도 평범한 여성들의 삶은 별로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 차별이 자본주의 체제(임금노동 착취, 가족제도를 통한 노동력 재생산)에 토대를 두고 있고, 자본주의 국가는 이런 체제를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강준만 교수는 페미니즘이 ‘부족주의’ ‘정파성’에서 벗어나 그 이상과 대의를 회복해야 한다고 옳게 지적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 주지 않는다. 그의 분석에 여성 차별의 원인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이 결여된 결과다.

특히 계급 분석의 결여는 문제적 주장도 낳는다. 예컨대 강준만 교수는 세대론을 수용하면서, 이대남과 달리 ‘기성세대 남성’은 여성 차별의 수혜자라고 주장한다. 성별임금 격차가 30대 이상부터 벌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는 피상적인 경험주의이고, 급진 페미니즘의 문제적 가정을 절반쯤 수용하는 셈이다.

여성의 낮은 임금으로 득을 보는 것은 ‘기성세대’ 남성 일반이 아니라 자본가와 국가관료 등 지배계급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노동계급은 남녀, 세대를 불문하고 차별로 결국 손해를 본다. 차별은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그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단결하고 투쟁할 능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혼란

민주당 페미니스트의 ‘내로남불’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언급되는 ‘박원순 사건’에 대해서 저자는 혼란스럽다. 강 교수는 민주당 페미니스트들이 “피해호소인” 용어를 쓴 것을 문제 삼는다. 그리고 우파 변호사 김재련을 여러 번 우호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보면, 이 문제에 대한 김재련 입장을 수용하는 듯하다.

그러나 김재련은 진상 규명에는 진지하지 않은 채 서울시와 민주당이 쓴 “피해호소인” 표현이 “2차가해”라고 비난하며 이 문제를 우파에 유리하도록 이용했다.

‘피해자’, ‘가해자’는 법률적 사건이 됐을 때 편의상 지칭하는 용어다. 팩트 여부나 확실성 여부를 특별히 문제 삼을 때는 ‘피해호소인’, ‘가해지목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박원순 사건’에 대한 실체적 진실은 현재로서는 알기 어려울뿐더러, “피해호소인” 용어도 이미 여성운동 일각에서 독단적 성폭력 중심주의 개념에 대한 문제의식 속에서 사용돼 온 용어이다.

무한 확장된 ‘성폭력’ 개념이나 피해자 중심주의나 2차가해 개념은 실체적 진실 인식의 필요성을 부정하며 합리적 의혹 제기를 가로막는 구실을 해 왔다.

강 교수가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가해 개념을 지지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박원순 사건’을 암묵적으로 단정함으로써 급진 페미니즘의 혼란을 종식시키는 데 일조하지는 못하는 측면이 있다.

한편, 저자가 독선적 태도를 보이는 페미니즘 측에 성찰을 촉구하려고 우파 여성단체인 ‘찐여성주권연대’도 우호적으로 언급하는 것도 우려스런 처사다.

젠더 갈등을 해소하려면 평범한 여성의 지위를 낮게 유지하는 자본주의와 이를 지키려는 (수혜자이므로) 지배계급의 시도에 보통의 남녀들이 단결해 맞서야 한다(물론 트랜스젠더가 이에 꼭 포함돼야 한다). 결국, 단결된 계급 투쟁이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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