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게재
비동의 간음죄의 쟁점들:
‘여성의 No는 No’ 원칙이 확립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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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3일자 머리말]
최근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은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를 결성했다. ‘비동의 간음죄’ 관련 법안들에 대한 국회 논의를 앞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연대회의는 현행 ‘강간죄’의 구성요건이 매우 협소하고 보수적이라고 옳게 지적하며, 그 구성요건을 ‘동의’ 여부로 개정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다만 ‘명백한 거부의사 표시에 반한’ 성관계를 강간으로 규정하는 대안(이른바 ‘No Means No Rule’)에는 이견을 표하면서, ‘(명백한) 동의 없는’ 성관계를 강간으로 규정하는 대안(이른바 ‘Yes Means Yes Rule’)을 지지하고 있다.
이 글은 지난해 미투 운동의 영향으로 ‘비동의 간음죄’ 논의가 부상할 때 그 쟁점과 대안을 다룬 것으로, 현재 연대회의가 제기하고 있는 쟁점들도 자세히 담고 있다. 이에 이 글을 재게재한다. ‘비동의 간음죄’에 대한 발전적 논의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미투 운동과 안희정 무죄 판결을 계기로 성폭력 피해자 권리 강화를 위한 ‘미투 법안’들이 140건 넘게 발의됐다. 하지만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의 형량 강화를 제외하면, 다른 법안들은 아직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최근 열린 ‘5차 편파판결 불법촬영 규탄시위’ 참가자들은 이를 강력 성토했다. 문재인 정부와 국회가 성평등 과제에 대해 립서비스만 하지 말고 실행에 옮기라는 시위대의 요구는 완전히 옳다.
특히 안희정 무죄 판결을 계기로 현행 강간죄의 편협하고 보수적인 요건이 대폭 개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비동의 간음죄’ 도입이 그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법안의 구체적 내용에서는 견해가 갈리지만, ‘가해자가 폭행·협박·위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해도 피해자의 동의 없이 성교를 했다면 범죄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취지는 공통된다.
‘비동의 간음죄’의 핵심 취지는 지지받아 마땅하다. 현행법상 ‘강간과 추행의 죄’는 “폭행과 협박”이 있었음이 입증돼야 한다. 게다가 ‘여성의 저항이 현저히 곤란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만 강간으로 인정받는 최협의설이 통용되고 있다. 이는 성관계 합의 여부가 아닌 피해자의 저항 수준을 성폭력의 기준으로 삼는 것으로, 성폭력 피해자에게 매우 불리한 조항이다.
최협의설에 따르면, 여성의 의사에 반해 물리적 제압이 있는 상태에서 성폭력이 벌어졌더라도 여성이 필사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면 성폭력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안희정 사건 1심 재판부도 사실상 이런 잣대를 들이댔다.
그러나 이런 편협한 잣대로 포괄할 수 없는 성폭력이 엄연히 존재한다. 공포에 휩싸이거나 불이익이 걱정돼 적극 저항하지 못한 경우, 저항하면 더 큰 폭력이 뒤따를까 봐 저항하지 않은 경우, 수치심에 구조를 요청하지 못한 경우 등등.
현행 강간죄의 편협함
따라서 성폭력 판단의 기준은 피해자의 저항 수준이나 가해자의 의도, 사건과 무관한 여성의 ‘행실’ 등이 아니라 여성의 성관계 동의 여부여야 한다. 또한 성폭력은 ‘정조’ 침해 범죄가 아닌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범죄로 규정돼야 한다.
이런 취지에서 ‘No Means No Rule’(‘여성의 노는 노다’, 여성이 거부 의사를 표명했는데도 성관계로 나아간 경우에는 이를 성폭력으로 처벌하는 법)이 확립돼야 한다.
최근 정의당 이정미 의원이 발의한 ‘비동의 간음죄’ 형법 개정안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핵심은 “명백한 거부 의사 표시에 반한 강간”을 (폭행·협박이 없더라도) 성폭력 범죄의 하나로 포함시키는 것이다. 다만 폭행·협박의 유무나 그 수위에 따라 형량을 달리하자는 제안이다. 지지받아야 마땅하다.
다만, 이 법이 통과된다면 실제 적용 과정에서 입증의 문제를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물론 성폭력 범죄는 물증이 남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물증만을 성폭력 피해 인정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 ‘물증 지상주의’는 배척해야 마땅하다.
또한 공정한 진상조사 전에 이미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작용하는 등 여성의 피해 호소가 일방적으로 무시되는 관행에 반대해야 한다.
성폭력 피해호소 여성의 진술은 진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가정 하에 진지하게 경청돼야 한다. 그리고 그 진술이 일관되고 정합성이 있다면 중요한 증거의 하나로 채택돼야 한다.
하지만 기계론적으로 적용된 이른바 “피해자 중심주의”를 따른다면 함정이 있을 수 있다. 즉, 아무런 증거도 없이 피해호소인의 인식과 주장, 감정만을 중심으로 성폭력 여부를 판단한다면 그 주관주의 때문에 또 다른 부작용이 따를 것이다. 따라서 ‘증거주의와 피해호소 여성 진술 존중의 종합’이 필요하다. 여성의 진술을 중요한 증거의 하나로 존중하면서도, 관련자들의 증언과 물증도 증거로 포함시켜야 한다.(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필자가 쓴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논쟁》 참고)
한편 다른 몇몇 여야 의원들도 대동소이한 형법 개정안들을 발의했고, 특히 자유한국당 나경원은 마치 자신이 여성의 대표인 양 기자회견까지 열며 안희정 판결 역풍에 숟가락을 얹었다. 미투에 편승해 자신의 우파적 본질을 희석시키고, 향후 잠재적 대권 경쟁자인 안희정도 견제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명시적 동의’를 성폭력 판단의 기준으로?
여성운동 일각에서는 ‘No Means No’의 입법화를 넘어 ‘Yes Means Yes Rule’(‘여성의 예스는 예스다’, 상대방이 명시적이고 적극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모든 성관계를 성폭력 범죄로 처벌하는 법)을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이것은 성폭력 범죄 구성 요건에 여성의 적극적이고 명시적 동의 유무를 포함시키자는 것이다. ‘비동의 간음죄’가 곧 ‘Yes Means Yes Rule’로 확대 해석되기도 한다.
국제적 사례도 있다. 올해 스페인에서 18세 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행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 항의시위가 일어나자, 산체스 총리는 ‘Yes’라고 말하지 않는 성교는 모두 강간으로 처벌하는 법안 발의를 약속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2016년 캐나다 온타리오 법원의 마빈 주커 판사가 ‘적극적 합의’를 성폭력의 기준으로 삼은 판례를 지지하며 소개했다.
여성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려는 취지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명시적 합의’를 그대로 법조문에 반영할 경우 만만찮은 난점도 있다. 성관계는 매우 유동적이고 민감하고 복잡다단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상호 교감하는 스킨십의 연장에서 눈빛과 행동 등을 통한 묵시적인 동의 하에 성관계로 나아가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에 명시적이고 적극적인 동의를 확답 받지 않았다 해서 모두 성폭력 범죄로 처벌하는 것은 법의 남용이 될 수 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최근 《형사법의 성性편향》 전면개정판을 내어 ‘Yes Means Yes Rule’을 비롯한 ‘비동의 간음죄’에 비판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그가 ‘비동의 간음죄’의 취지를 이해하면서도 이를 형법 조문화하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는 이렇다.
“‘비동의 간음죄’가 신설된다면, 성교에 대한 여성의 ‘명시적 동의’나 ‘확정적 동의’가 확보·입증되지 않은 경우, 여성과의 합의에 따른 농도 짙은 상호 애무 후에 시도된 남성의 성교 추구 행위는 항상 ‘범죄’로 처벌될 가능성이 있[다]”, “성교에 대한 ‘묵시적 동의’나 ‘조건부 동의’는 동의와 거절 사이의 회색지대에 존재하는 것이고, 이는 언제든지 피해자의 거절로 해석될 수 있[다.] … 합의성교 후 관계가 나빠져서 ‘비동의 간음’이었다고 고소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충분히 예상[된다]”, “부부가 ‘쿨’하게 헤어지기보다는 이혼 과정에서 서로 ‘원수’가 되는 일이 허다한 현실에서, ‘비동의 간음죄’는 투쟁의 도구로 사용될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조국은 이런 문제제기도 한다. “통상의 의사능력이 있는 성인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일체의 침해를 형법을 통하여 막아주어야 하는가 … 폭행·협박·위력 등이 사용된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와 그렇지 않은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는 구별해야 한다. 후자의 경우에도 피해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무조건 형법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은 오히려 여성주의의 ‘적’인 가부장주의의 관념의 산물일 수 있다. … 여성은 성교를 거절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다.”(강조는 조국의 것)
피해 여성에게 유리하게
조국이 제안하는 “형법학과 여성주의의 교집합”은 “경輕한(가벼운) 강간죄” 신설이다. 기존 최협의설(“저항이 현저히 곤란한 폭행과 협박”을 강간죄의 요건으로 삼음)은 유지하되, ‘사람의 의사에 반하여 폭행 또는 협박으로 간음한 자’도 강간죄로 처벌하자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비동의 간음죄’의 문제의식은 대부분 흡수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Yes Means Yes Rule’의 부작용에 대한 조국의 우려에 공감한다. 그러나 그가 ‘No Means No Rule’의 형법화까지 반대하는 것은 지나친 우려인 듯하다. 그의 대안에 따르면, 여성의 명백한 거부 의사에 반해 성관계가 이뤄졌더라도 폭행·협박·위력이 없다면 강간죄가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성차별 현실을 감안하면, 피해 여성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개정하는 편이 법개정 취지에 맞아 효과적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여성의 명백한 거부 의사에 반한 성관계는 성폭력으로 인정하는 다소 폭넓은 정의가 필요하다. 다만 그 구체적 적용 단계에서는 철저한 입증이 뒷받침돼야 한다. 또한 회색지대나 구체적 정황을 고려해야 하는 까다로운 성 문제에서 일도양단 식 편향도 피해야 한다. 이것은 제3의 피해자를 양산해 정의롭지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