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산업 위기와 “광주형 일자리”라는 임금억제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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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자동차산업이 위기에 빠졌다는 얘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올해 초 한국GM이 군산공장을 폐쇄한 데 이어, 최근 자동차 부품회사들은 ‘줄도산’ 위기에 처해 있다며 정부에게 3조 원가량의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정부는 자동차 부품회사들에게 2조 원을 지원하는 계획을 이달 말까지 내놓겠다고 밝혔다.
게다가 현대자동차는 올 3분기 영업이익이 2889억 원이라고 발표했다. 지난해 3분기와 비교하면 76퍼센트나 줄었다.
그러자 보수 언론들과 기업주들은 한국 노동자들의 고임금을 탓하며 임금을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문재인 정부는 반값 일자리인 ‘광주형 일자리’를 적극 추진하며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을 압박하고 있다.
세계 자동차 시장의 정체와 과잉 생산 위기
현대차 3분기 영업이익이 급락한 것은 일회적 비용을 반영했기 때문이지만, 현대차의 수익성 하락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현대차의 영업이익은 최근 몇 년간 계속 하락해 왔다.
그러나 현대·기아차만 위기인 것도 아니다. 최근 폭스바겐, 다임러, 르노, PSA(푸조·시트로앵) 같은 대형 자동차 업체들도 모두 부진한 실적을 발표했거나 예고하고 있다.
전 세계 자동차 산업이 위기에 처한 것은 그동안 급성장해 온 세계 자동차 시장이 최근 정체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2000년 이후 급성장하며 자동차 판매 증가를 이끌어 온 중국까지 정체하고 있다. 중국의 높은 부채와 무역 전쟁 등이 중국 소비에 타격을 줘, 올해 중국의 자동차 판매량은 고작 1.2퍼센트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전 세계 자동차 판매가 정체하면서 자동차 기업들의 ‘과잉 설비’가 문제가 되고 있다. 몇몇 기업들은 또다시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올해 한국에서 군산공장을 폐쇄하고 한국GM 구조조정을 쉽게 하기 위해 법인 분리 절차를 밟고 있는 GM은 북미 지역에서도 1만 8000명 해고를 추진 중이다. 포드도 유럽에서 2만 4000명을 해고할 계획이다.
현대·기아차도 과잉 설비가 수익성을 갉아먹고 있다. 현재 현대·기아차의 전 세계 생산능력은 908만 대인데, 내년에 기아차 인도공장이 완공되면 940만 대로 늘어난다. 그러나 현대·기아차의 올해 판매량은 750만 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현대차는 2016~17년에도 중국 공장을 증설해, 현대·기아차의 중국 생산능력은 270만 대나 된다. 그러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여파 등으로 지난해 현대·기아차의 중국 판매량은 114만 대로 36퍼센트나 감소했다. 이 때문에 현대·기아차의 중국 공장 가동률은 40~50퍼센트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현대차가 중국 공장을 증설할 때 한국의 부품회사들도 중국 설비투자에 나섰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현대·기아차의 판매가 급감하자 부품회사들의 가동률도 급락했다. 최근 자동차 부품회사들의 ‘줄도산’ 위험은 바로 중국에서 현대·기아차의 판매 부진 때문이다.
이처럼 자동차 산업 위기는 단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 세계 자본주의의 불안정성과 과잉 생산 위기가 원인이다. 따라서 이윤 경쟁을 위해 생산 확대를 결정한 기업주들이 책임져야 할 문제이지, 노동자들의 책임은 전혀 없다.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과 거세지는 보호무역주의 압력
한편,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보호무역을 강화하는 것도 자동차 산업의 위협 요소가 되고 있다.
앞서 봤듯이, 현대·기아차는 중국 자동차 시장의 정체뿐 아니라 사드 문제와 같은 지정학적 갈등의 여파로 판매가 급감했다. 사드 배치는 미중의 제국주의 경쟁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미국 트럼프 정부의 무역 전쟁도 한국 자동차 기업들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미국은 수입 자동차에 최고 25퍼센트 관세 부과를 검토 중이다. 미국에 자동차를 수출하는 나라는 일본·독일·한국 같은 미국의 동맹국들이다. 트럼프 정부의 무역 전쟁이 단지 중국만을 겨냥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최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개정한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도 미국 정부가 자동차에 관세를 부과하는 정책을 계속 추진할 것임을 보여 줬다.
미국 정부가 수입 자동차에 25퍼센트 관세를 물리더라도 멕시코·캐나다에는 260만 대씩의 무관세 쿼터를 보장하기로 했는데, 이는 결국 미국 정부가 수입 자동차에 관세를 부과할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 준다.
지난해 한국산 자동차의 미국 수출 물량은 104만 대다. 한국 자동차 생산량의 4분의 1가량이고, 수출량(250만 대)의 40퍼센트나 된다. 무역협회는 미국이 자동차 관세를 물리면 한국산 자동차 수출이 22.7퍼센트(50만~60만 대)나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처럼 자동차 산업이 정체하자 각국 정부는 보호무역 강화로 다른 나라에 위기를 떠넘기는 ‘근린궁핍화(이웃 나라 거지 만들기) 정책’을 펴고 있다. 그리고 각국 지배자들은 자국의 자동차 산업을 보호하려고 보호무역정책 강화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자국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려 한다.
한국 노동자들의 고임금·저생산성이 문제라고?
최근 한국 자동차 산업이 위기에 빠지자, 보수 언론들과 기업주들은 모두 한국 노동자들의 고임금과 저생산성이 문제라며 임금을 깎아야 한다고 떠들고 있다.
그러나 보수 언론들이 제시하는 다른 나라와의 임금 비교에는 노동시간과 같은 기본 정보조차 일절 없다. 한국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훨씬 길고, 따라서 연장근로와 특근 수당 등이 포함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간당 임금은 오히려 크게 낮다는 계산이 나온다.
한국 자동차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최근 보수 언론들에는 한국 자동차 공장의 차량 1대당 생산 시간이 다른 나라보다 길다는 식의 기사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비교도 각 공장의 조건이 다르다는 점을 애써 무시하는 흑색선전일 뿐이다.
예를 들어 어느 공장에서 대형 트럭을 생산한다면 소형 승용차 공장보다 생산 시간이 더 걸릴 공산이 크다. 또, 모듈화된 부품을 받아 조립만 하는 공장이 있는 반면, 그 부품을 직접 생산하고 조립까지 하는 공장이 있을 수도 있다. 생산 시간이 길다고 비효율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5~6년 전인 2012~2013년에도 보수 언론들과 기업주들은 한국 자동차 노동자들의 고임금과 저생산성을 비난했었다. 그러나 그때 한국의 자동차 생산은 450만 대, 수출은 300만 대가 넘어 역대 최대였고, 현대·기아차는 최고의 수익을 거두며 한국 주식시장을 이끈 바 있다.
한국 자동차 노동자들이 비효율적이라면 어떻게 이게 가능했겠는가?
광주형 일자리는 임금 삭감 정책이다
문재인 정부는 자동차 산업 위기를 맞아 ‘광주형 일자리’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광주형 일자리는 현대차·기아차 노동자의 반값 임금(약 3500만 원)으로 1000명 정도를 고용하는 소형차 공장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즉, 문재인 정부도 한국 노동자들의 고임금 때문에 생산성이 떨어지고 일자리 창출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뿐 아니라 11월 5일 열린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도 ‘광주형 일자리’의 성공을 위해 초당적 지원을 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노사민정 대타협’을 표방한 ‘광주형 일자리’ 사업은 이미 추진 과정에서 노동조건과 임금이 너무 열악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광주시와 현대차 간의 투자 유치 협상 과정에서는 초임 연봉을 사실상 최저임금 수준(2100만 원)을 주려고 계획했다. 결국 광주시와 문재인 정부가 노동계 파트너로 끌어들인 한국노총 광주본부조차 반발하자 최저임금 수준의 초임 얘기는 들어갔다. 그러나 이제 현대차는 5년간 단체협약 유예가 없으면 투자할 수 없고, 최소 물량 배정도 약속할 수 없다며 버티고 있다고 한다.
현대차 사측은 저임금이 확실하고, 자신들이 원하면 언제든 폐쇄할 수 있어야만 투자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저질 일자리가 확대되면 노동자 전체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끌어내리는 효과를 낼 것이다.
따라서 현대차노조를 비롯해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이 광주형 일자리에 반대하고 나선 것은 옳다.
문재인 정부는 “일자리가 없어 고통받고 있는 청년”을 위해 광주형 일자리가 성공해야 한다며 민주노총을 비판하고 나섰다. 조중동 같은 우파 언론은 물론이고 〈한겨레〉와 〈경향신문〉 같은 중도 진보 언론들도 광주형 일자리에 반대한 민주노총을 “집단 이기주의”라고 비난했다. 즉, 이들 모두는 노동자들이 임금 삭감을 받아들이면, 일자리를 창출·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광주형 일자리의 실제 모델인 독일의 사례를 보더라도 임금 양보가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했다. 폭스바겐 노조는 1993년에 고용을 지키는 대신 임금을 삭감하기로 합의한 이래로 거듭 임금·근무체계 개악 등에 합의했지만, 2006년에는 1만 3000명이 해고됐고, 2008년에는 비정규직 1만 6000여 명이 해고됐다.
한편, 광주형 일자리는 문재인 정부가 사회적 대화를 통해 얻어내려는 게 무엇인지도 보여 준다. 이들은 ‘노사민정 대타협’을 운운했지만, 결국 저임금 일자리를 늘리는 데 사회적 대화를 이용했다.
따라서 민주노총은 경사노위 참여와 같은 사회적 대화에 미련을 갖지 말고, 문재인의 노동 개악,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공약 폐기, 저질 일자리 확대 추진 등에 맞서 아래로부터의 대중 투쟁을 고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