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에서 분노가 폭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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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중순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직접적 원인은 관타나모 기지의 미국 조사관들이 꾸란을 변기에 흘려 보내 꾸란을 모독했다는 보도였다.
동부의 잘랄라바드, 남부의 가즈니와 북부의 바다크샨 등 최소한 3개 도시에서 아프가니스탄 경찰은 시위 군중에게 발포했다.
이건 중요한 변화다. 아프가니스탄의 저항은 이라크보다 훨씬 약했다. 2001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을 때, 보통의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이미 23년 동안 전쟁을 겪은 상태였다.
1978년 아프가니스탄 공산당의 쿠데타는 내전으로 이어졌다. 1979년 소련은 공산주의자를 지원하기 위해 침략했고, 대부분의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이슬람의 이름 아래 단결해서 맞서 싸웠다.
그 뒤 8년 동안 게릴라 전쟁이 진행됐다. 전체 2천5백만 인구 중 약 1백만 명이 죽었고, 6백만 명이 해외로 피난했다.
결국 소련은 철수했다. 이제 소련에 저항했던 이슬람 정당들은 권력을 놓고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평범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은 그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게 됐다.
그 때 미국의 지원을 받은 탈레반이 파키스탄에서 침공했다. 처음에 많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은 탈레반을 환영했다.
그러나 탈레반의 지지 기반은 협소했다. 남부와 동부의 파슈툰 종족이 탈레반의 지지 기반이었다. 그러나 탈레반 독재가 워낙 잔인했기 때문에, 그들은 파슈툰 지역에서조차 지지를 잃었다.
2001년 미국이 침략했을 때, 대부분의 아프가니스탄인들은 미군을 환영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평화가 오기를 바랐다. 많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처음에는 공산주의자를 위해, 나중에는 이슬람주의자와 탈레반을 위해 싸웠다.
이제 아프가니스탄인들은 모든 집단을 불신했다.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한 일상 투쟁에 골몰했다. 어쩌면, 말 그대로 어쩌면, 미국이 평화를 가져오고 아프가니스탄을 재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문제에 직면했다. 이라크 침략 전인 당시에 미국 정부는 감히 대규모 해외 파병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탈레반과 싸워 온 북부동맹을 협력자로 삼았다. 그러나 그들도 남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2001년 말, 미국·파키스탄·탈레반·북부동맹은 서로 타협했다. 탈레반은 카불을 내주기로 동의했다. 대신 그 지도자들은 자기 고향이나 파키스탄으로 안전하게 돌아가도록 허용됐다. 탈레반은 동부와 남부 농촌 지역을 사실상 지배했다.
미국은 허구적 승리를 얻었고, 친미 인사 하미드 카르자이를 대통령에 앉혔다.
그 후로 탈레반 지도자들은 아무도 체포되지 않았다. 북부에서 일부 “외국인 전사들”과 평범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체포돼 관타나모 기지로 이송됐다.
카르자이는 북부동맹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다. 카르자이 정부는 카불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여기서조차 연합군은 매일 오후 5시쯤엔 도시 외곽으로 철수해야 한다.
카르자이는 미국의 꼭두각시이다. 미국 특전사가 그의 경호를 맡고 있다. 정부 회의 때도 각료들이 카르자이를 사살할까 봐 경호원들이 카르자이를 지켜 준다.
엄청난 반감이 생겨났다. 예상대로, 카르자이 정부는 뿌리까지 부패했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은 나라의 재건을 바라지만, 재건은 여전히 요원하다.
하지만 그 동안 저항의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불안정한 평화가 유지돼 왔다. 그러나 최근 시위는 변화가 시작됐음을 암시한다.
이 시위들은 규모도 크고 진지했다. 잘랄라바드에서 시위 군중의 대다수는 학생들이었는데, 그들은 UN 건물을 공격했다.
시위대의 구호는 꾸란 모욕에 대한 부시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미국 점령에도 반대했다. 정말 중요한 점은 북부동맹의 전통적 기반인 바다크샨에서 상당한 규모의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의 절망과 환멸감이 분노와 가두시위로 바뀌고 있다.
번역 김용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