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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죽이지 말라
김용균 씨의 죽음을 애도하며

또 사람이 죽었다. 내 첫 제자뻘 되는, 얼마 살아 보지도 못한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촛불 대통령 운운했던 문재인은 비정규직을 없애 달라고, 그래서 안전한 일터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호소했던 노동자의 절절한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죽음의 일터에서 일하도록 방치했다.

어느 일간지에서 고 김용균 씨의 죽음을 그린 만평을 봤다. 거기에는 목부터 비어 버린 비정규직 김용균 씨가 살아 생전 마지막 남긴 사진 모습 그대로 팻말을 들고 서 있다. 비정규직과 불법파견 없는 사회를 바라면서. 문재인은 그 당연한 바람을 쌀쌀히 외면했고, 김용균 씨는 처참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얼굴이 없는 그 그림은 단지 김용균 씨의 처참한 죽음만이 아니라 마치 이 나라에서 일하는 노동자 누구라도 그러한 위험 속에서 일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너무 많은 자식, 친구, 형제·자매, 제자들이 죽었다. 그리고 죽음의 위험이 있는 일터와 세상에서 살아간다. 나는 어릴 적 부산 구포역에서 기차가 탈선해서 80명이 죽고 200명이 다친 현장을 지나친 적이 있었다. 수많은 엠뷸런스가 실어 나르던 그 불안함을 여전히 기억한다. 20년이 지났는데도 얼마 전에는 KTX가 탈선했다. 백석 역에서는 사람이 끓는 열수에 익어 죽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의 죽음, 용광로 쇳물에 빠져 죽은 하청 노동자.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세월호...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너무 많이 들었는데도 정부와 가진 자들은 이것을 바꿀 생각이 없다. 그래서 울분이 치밀었다.

일요일에 있었던 김용균 씨 추모 집회에서 사람들이 써 놓은 편지를 보며 분노와 슬픔으로 마음이 먹먹했다.

“어머니, 오늘도 무사히 퇴근했습니다. 이 밤이 지나면 내일 또 출근하겠지요. 언제부터 직장이 죽음을 두려워 해야 하는 장소가 되었을까요?”

이런 일들은 돈벌이를 위해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자본주의 초기부터 지금껏 반복된 체제의 고질병이었다.

마르크스의 동지였던 엥겔스는 19세기 영국 노동계급의 비참한 삶과, 그 비참함을 만든 자본가들과 자본주의 체제를 고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체에 상해를 입혔는데 그 상해가 죽음을 초래한다면, 우리는 그 행위를 과실치사라고 부른다. 만일 가해자가 자신이 입힐 상해가 치명적인 것을 사전에 알았다면, 우리는 그의 행위를 살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회가 프롤레타리아 수백명을 제 수명보다 훨씬 일찍 부자연스럽게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로 내몰 때, 즉 칼이나 총알 못지않은 폭력을 휘둘러 죽음으로 내몰 때, 수천명에게서 생활필수품을 빼앗고 그들을 도저히 살 수 없는 위치로 몰아넣을 때, 법의 완력을 이용해 그들을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묶어둘 때, 이 희생자 수천명이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상황이 지속되도록 허용할 때, 그럴 때 사회의 행위는 앞에서 말한 한 사람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살인이다. 그 살인은 실상을 감춘 악의적인 살인, 아무도 막아낼 수 없는 살인, 아무도 살인자를 볼 수 없는 데다가 작위보다 부작위에 가까운 범행이라서 희생자가 자연스럽게 죽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이다. 그렇지만 살인은 엄연히 살인이다.”

고 김용균 씨의 일터는 분진과 어둠으로 앞을 보기 어려웠고, 위험한 일이 생기면 컨베이어 벨트를 멈출 수 있는 동료도 없이 혼자 일해야 했고, (경악스럽게도) 컨베이어 벨트 아래로 머리를 집어넣고 점검을 해야 했고, 이를 그나마 덜 위험하게 수행할 헤드 랜턴도 충분히 지급되지 않았다. 사고가 안 일어나는 게 이상했을 지경이었기에 그 어머니는 그 일터를 ‘살인병기 같은 데’라고 이야기했다.

이런 일터에서 노동자들을 굴린 발전소, 외주화와 비정규직 일자리를 양산하고 유지한 문재인 정부, 안전 규제를 풀고 비정규직을 늘리는 데 혈안이었던 주류 정당들. 이들이 살인자라고 하는 것이 틀렸는가.

태안 발전소 노동자들은 살인을 막기 위해서 진작부터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인력 충원을 요구하며 싸워 왔다.

비록 우리의 분노로도 떠나버린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고인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슬픔과 분노를 모아 더는 죽이지 말라는 절박함만은 이뤄 내야 하지 않겠는가. 정말 두 팔 걷고 나서서 함께 투쟁해야 한다.